조이미용실
 

김명인


늦은 귀가에 골목길을 오르다보면

입구의 파리바게트 다음으로 조이미용실 불빛이

환하다 주인 홀로 바닥을

쓸거나 손님용 의자에 앉아 졸고 있어서

셔터로 가둬야 할 하루를 서성거리게 만드는

저 미용실은 어떤 손님이 예약했기에

짙은 분냄새 같은 형광 불빛을 밤늦도록

매달아놓는가 늙은 사공 혼자서 꾸려나가는

저런 거룻배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이

허술한 내 미(美)의 척도를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몇십년 단골이더라도 저 집 고객은

용돈이 빠듯한 할머니들이거나

구구하게 소개되는 낯선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소문난 억척처럼

좁은 미용실을 꽉 채우던 예전의 수다와 같은

공기는 아직도 끊을 수 없는 연줄로 남아서

저 배는 변화무쌍한 유행을 머릿결로 타고 넘으며

갈 데까지 흘러갈 것이다 그동안

세헤라자데는 쉴 틈 없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얼마나 고단하게 인생을 노 저을 것인가

자꾸만 자라나는 머리카락으로는

나는 어떤 아름다움이 이 시대의 기준인지 어림할 수 없겠다

다만 거품을 넣을 때 잔뜩 부풀린 머리끝까지

하루의 피곤이 빼곡히 들어찼는지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저렇게 쏟아져나오다가도

손바닥에 가로막히면 금방 풀이 죽어버리는

시간이라는 하품을 나는 보고 있다!




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03&pID=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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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의 1단원을 끝내고 2단원으로 들어간다.

앞에 '허생전'과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이야깃거리 많은 텍스트가 기다리고 있지만
사실은 이제 막 끝낸 1단원과 같은 무미건조한 내용들이 더 가르치기 편하기는 하다.
열심히 받아적으면서 아이들이 바짝 긴장하니 진행하기 쉽고,
뭘 필기해야 할지 쉽게 알 수 있고 중간중간 의미없는 유머들이 들려오는 이런 수업을,
아이들도 더 편안해 한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알아듣고 열심히 반응하는 아이들과
'시험에 안 나오는 얘기군'하면서 관심없는 아이들이 갈린다.
본격적으로 아이들이 졸기 시작하기도 한다.

수업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모두 다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 다운 수업을 만들고 나 다운 교사가 되는 것.
모든 아이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몇몇 아이들이 불편한 마음이 생기더라도 어쩔 수 없다. 
뭐, 내 수업이니까.
음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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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이런 얘기.
"'합리적'이라는 간판을 달고 공리주의, 자유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도덕적'이라는 가치는 '합리적'이라는 가치보다 그렇게 쓸모없는 것인가?
'도덕성'을 제쳐놓고 정치를 이야기하고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한편으로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 의무감을 자연스런 도덕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미덕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정의'라는 거창한 이름만큼 싱거운 결론이기도 했지만
'보편적 언어'로 타인에 대한 연대의식을 이야기했다는 점,
갈등 상황에 대하여 '사실은 그게 더 이득이 아닐수도 있어'라는 유사한 공리주의적 관점으로만 반박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정면으로 지적했다는 점, 등이 배울만 하다.
최근 관심을 가져왔던 '공감','도덕 감수성'에 대한 연장선상에 이 책이 놓여있다.

세미나 말 말 말
"정의를 꿈꾸는 데 돈드냐? 꿈이라도 꿔 보자,고 나는 아이들한테 이야기한다"
"MB의 큰 죄 중에 하나는 언어를 망쳐놓은 죄.
휴가철에 이 책을 읽고 나서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고 하는데
정의, 공정, 이 모든 단어들을 망쳐놓았다."
"마이클 샌델이 한국에 와서 한 강연에 강남 엄마들이 아이들을 밀어넣느라 북새통.
하버드 교수의 강연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영어실력을 뽐내보라고 밀어넣었다고."
"힘이 정의가 아니라 정의가 힘이다."
"마이클 무어의 <자본주의>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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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에 태풍이 찾아온 날,
다섯 시 반, 그러니까 곤파스가 강화도에 상륙하기 직전에, 
고요한 새벽을 울리는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 굴러다니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깼다.
바깥에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침대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웅크린 침대 안에서 손에 잡히는 거라곤 핸드폰 뿐이었다.
정전이다, 지하철이 안 다닌다, 하면서 소식을 전해주던 핸드폰 속의 트위터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무서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겨우 참고 라디오를 틀고 밥을 먹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다 너무 엄청나서 출근하다가 뭔가에 얻어맞을까봐 겁이 났다.

겁이 나고, 두렵고, 불안한데
이 불안을 몰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냥 아침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 것밖에 없었다.

고백하건대,
밥을 먹으며 고기를 챙겨먹었던 것은
재난을 당하더라도 기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원피스를 입지 않고 티셔츠와 바지를 입었던 것은
재난을 당하더라도 몸이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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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인권 교육센터 들' 연수에서의 메모들

1. 일본 푸른잔디회(아오이시바)의 행동강령

1. 우리들은 우리들이 뇌성마비자라는 것을 자각한다.
2. 우리들은 강렬한 자기주장을 행한다.
3. 우리들은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4. 우리들은 문제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5. 우리들은 비장애인 문명을 부정한다. 
  
 첫째,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란 단순히 자신이 뇌성마비라는 인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른잔디회’의 기관지 <발걸음>에는 ‘우리 뇌성마비자는 이 사회에 원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취급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부정당하는 존재로서의 자각, 자신의 신체성이 사회체제를 부정하고 있다는 자각인 것이다.

 둘째, 강렬한 자기주장이란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자기주장과 자기결정’을 의미한다. ‘푸른잔디회’의 대표적 이론가인 요코다는 “우리 뇌성마비자는 날 때부터 계속 완전히 대행(代行) 당해왔고, 생활하는 것 혹은 식사하는 것 등 아주 작은 일조차 그 자신이 살아간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간다”라며, “때문에 대행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의지를 강렬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의 투쟁방식에 있어 중요한 기조는 비참한 현실을 비참한대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셋째, 사랑과 정의에 대한 부정은, 동정과 시혜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증장애인을 대상화시키는 이데올로기와 감정 모두를 부정하는 섬뜩한 비판이다.

 넷째, 문제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강령은 일반적으로 ‘푸른잔디회’가 고립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부분이다. 잘못된 것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비장애인 중심의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그들의 현실적 대안이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다섯째, 비장애인 문명의 부정은 비장애인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존재를 감안하지 않고 설계된 지금의 사회가 애초에 잘못 만들어진 사회라는 인식이다.


2. 청소년 보호주의
- 보호의 반대말은? 공격? 방임? 자립!
-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여성의 다른 이름이다
Untitled (We don't need another hero)
Barbara Kruger


3. 최규석, <불행한 소년>





4. 기타
- 군대는 인간 자격 심사의 장이다.
- '양성평등'이념으로 혜택받는 것은 알파걸, 즉 남성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여성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기껏해야 2등 남성이다. 박근혜/전여옥/나경원 등을 비난하는 언어들이 '성'을 매개한다는 것이 그를 말해준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 등교시간 늦추기에 대한 지식채널 영상 : <나에게 잠을 허하라> / 다큐 <10대 성장 보고서>
- 성폭력 사건 지원에 대한 좋은 책 <성폭력 사건 지원 나침반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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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슨웹 인터뷰 http://www.personweb.com/beta/main/interview/229?page=1

청소년 인권 운동가, 배경내

8월 중순의 비 내리는 토요일 점심, 충정로의 한 카페에서 인권 운동가 배경내 씨를 만났다. 활동가들 사이에서 ‘개굴’이라 불리는 배경내 씨는 ‘인권 운동 사랑방’을 거쳐 지금은 ‘인권 교육 센터 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우리교육, 2003)는 저서의 제목이 말해주듯 학교 내 인권, 청소년 인권이 그의 주요 관심사이다.

두리번/ @redpebl



나는 그를 작년 여름 교사 연수에서 처음 만났다. 청소년 인권 운동가로 유명했던 그는 ‘교원 인권 감수성 향상’ 연수의 강사로 등장하였다.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울림은 한여름 밤 팔딱이는 개구리의 목청만큼이나 우렁차고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학생 인권 조례 제정을 비롯하여 학생 인권에 대한 논쟁이 시끌벅적한 요즘, 그는 전국을 누비며 교사와 교육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바쁜 일정을 쪼개 어렵게 시간을 낸 배경내 씨와 마주했다.

 


학교 안 인권 문제를 제기하다

 두리번(이하 두) : 많이 바쁘시죠? 인터뷰 약속 잡기도 힘들었어요. 어제도 교육 때문에 천안에 다녀오셨다 들었어요. 종횡무진 활약이십니다. 어때요, 요즘 들어 더 바빠지신 거죠?

 배경내(이하 배) : 그렇죠. 학생 인권 조례 때문이죠. 요즘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운동 본부를 만들고 있거든요. 곽노현 교육감이 당장 2학기부터 체벌을 금지하기로 하는 바람에 각종 교육 일정들이 늘어났어요.*

 * “서울시 교육청 2학기부터 각급 학교 체벌 전면 금지” (연합뉴스)

두 : 게다가 학생 인권 조례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서울뿐만 아니라 강원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죠.

배 : 네. 그런데 조례 제정하려면 당장 인권 교육이 필요하거든요. 자료 요청과 연수 요청이 몰려오죠. 학생 인권 조례를 제정하는 것은 무척 필요하고 중요하고 기쁜데, 일이 몰리고 있어서 힘들기는 해요. 8월까지는 너무 바빠요.

두 : 학생 인권 조례는 먼저 경기도에서 제정되었잖아요? 배경내 씨는 가까이에서 과정을 지켜보셨죠? 그 과정에 대해 듣고 싶어요.

배 : 경기도 교육청에서 자문위원단을 꾸리고 조례안 작성을 시작했죠. 꽤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했습니다.

두 : 자문위원단은 어떻게 구성되었어요?

배 : 국가인권위에서 온 분, 인권 법학자 한 분, 교육 운동가, 현직 교장 교감 등으로 구성되었었는데, 교장, 교감 선생님들의 자세가 인상적이었어요. 주어진 일이니까 최선을 다 해보자는 태도였고 학생 인권에 대해 배우려는 자세이셨어요.
그런데 12월에 초안이 발표되고 조·중·동에서 조례안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잖아요. 그걸 보고 자문위원들, 특히 현직 교장, 교감 선생님들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학생 인권에 대한 관심이 막 생기려고 하다가 밖에서 우려하는 걸 보고 금세 위축되어 버렸던 것 같아요.

두 : 보수 언론의 공격이 영향력을 발휘한 셈이네요.

배 : 보수 언론의 공격과 일련의 논쟁들을 지켜보며, ‘학생 인권’은 아직 사회적 합의가 안 된 주제임을 실감했죠. 그래서 2월에 학생 인권 조례 최종안을 발표했을 때 초안보다 청소년의 사상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축소된 채로 발표되었어요.

두 : 그래도 경기도 교육청의 학생 인권 조례안이 지닌 의의가 적지 않죠.

배 : 네, 경기도 교육청의 학생 인권 조례안은 사회적 공감대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추진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촉발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죠.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 인권 조례안을 마련할 때, 모델로 삼기에 크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생각해요.

두 : 진행 과정에서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요?

배 : 짧은 기간에 준비하는 바람에 고려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어요. 먼저 실효성 면인데요, 과연 실효성이 있을 것인지, 싶어요. 또 한 가지는, 조례안이 여러 다양한 조건을 가진,  다양한 학생들을 포괄할 수 있는지 미처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워요.


왜 학교 안 인권이 문제인가

두 : 최근의 학교 체벌 논쟁은, 서울시 교육청에서 2학기부터 ‘학교 체벌 전면 금지’ 발표 이후 본격화되었죠. 저는 물론 체벌 금지에 동의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소위 ‘위로부터의 개혁’이 가지는 한계가 분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배 : 맞아요. 경기도는 사회적 여건이 부족한 지역이었어요. 교사들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죠. 그러나 서울에서는 이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합의를 모으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조례 제정을 추진한다면 학생, 학부모, 교사가 주체가 되는 운동 단위가 꾸려져야 해요.

두 : 그래야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겠네요.

배 : 사실 조례 제정은 중요한 게 아니죠. 진짜 중요한 건, 우리 사회에서 학생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성숙하는 과정, 그리고 현장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물꼬를 트는 일이죠. 이게 정말 ‘우리가 하는 운동이다’는 느낌이 드는, 현장의 꿈틀거리는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 거예요. 

두 : 서울에서 학생 인권 조례를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나요?

배 : 7월 7일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서울 운동본부’가 발족했어요. 전교조, 참교육 실천 학부모회, 평등교육 실현 학부모회, 또 각종 청소년 단체들, 사회단체들이 모였어요. 지금 이들의 입장은 경기도와는 달리 인권 조례 제정을 ‘주민 발의’로 시작하자는 거예요.

두 : 주민들이 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것이군요.

배 : 네, 지금 학교 체벌 논쟁을 보수 언론이 주도하면서 학생 인권 조례의 제정 여부가 ‘진보 교육감의 공과 실’로만 논의되고 정작 중요한, 학생 인권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은 사라졌어요. 우리는 이 논쟁의 방향을 틀어 보려 합니다. 그러려면 교육 주체들이 참여가 필요하죠. 보수 언론의 공격이 계속된다면, 인권 조례의 내용과 시기가 후퇴될 수 있고, 교육청의 인권 조례 의지도 위축될 가능성이 높아요. 우리는 교육청과 보수 언론을 모두 압박하는 역할을 하려 해요.

두 : 보수 언론에서 학생 인권의 문제를 그렇게 열심히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요?

배 :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어요. 하나는, 질문하는 힘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학교 교육이 인간이 감당할 만한 상황인가?’, ‘내 삶은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일상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중요해요. 질문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체제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되죠. 저들은 질문하는 힘이 체제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거예요.

두 : 두 번째 이유는?

배 : 학교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들은 학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중요하죠. 특히 사립학교는 더욱. 그런데 학생 인권에서는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의견을 내고 정보를 요구할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생들과 교사들을 무력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학생 인권에서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이야기하죠.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결국 그들이 지금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다수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거예요.

두 : 학생 인권 문제가 학교 운영의 민감함 문제를 건드리는군요.

배 : 그렇죠. 세 번째는 우리 학교 교육 자체가 포함의 논리가 아닌 탈락의 논리로 학생들을 통제해나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죠. 현재 학교 교육은 더 많은 학생을 감싸 안는 곳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을 탈락시키는 명분을 부여하는 곳인 것 같아요. 그런데 학생 인권은 이 탈락의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이들이 다시 포함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결국 지금의 학교 교육의 방향과 학생 인권이 추구하는 방향은 정반대인 거죠.

두 : 학생 인권 논의가 지금의 학교 교육 전반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문제였군요.

배 : 조·중·동에서 학생 인권 조례 제정을 비판하면서 대립각이 선명해진 면도 있어요. 예전에는 학생 인권 문제는 ‘하면 좋지만 꼭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조·중·동에서 저렇게 반대하는 것이라면 학생 인권이 진보적 사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 보다”, 그러죠.

두 : 조·중·동에서 의도하지 않은 도움을 주었네요.

배 : 그런 셈이죠.(웃음)

두 :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서울 운동본부’에서 주민 발의를 위해서 9월까지 조례안을 만들고 10월부터 10만 명 서명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배 : 예, 서울시 주민 10퍼센트의 서명을 받으면, 법적으로 주민 발의가 가능하거든요. 서울 시민의 10퍼센트는 8만 2천명 정도인데, 서명을 받다보면 서명을 놓친다든지 주민등록번호를 놓친다든지 서울 시민이 아닌 사람이 섞인다든지 하기 때문에, 십만  명을 받는 거예요. 유권자만 유효한 서명이라 학생들에게는 ‘청원 서명’을 받으려고 하고요.

두: 와, 청소년을 빼고 학생 인권 조례에 동의하는 사람 10만 명이라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배 : 그래요. 어려운 일일 거라 생각은 들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말 걸기를 시작하려고 해요. ‘부모’의 정체성에 말을 걸고, 교사에게도 ‘선생님’의 정체성에 말을 거는 거죠. 저희는 ‘학생 인권을 보장하는 서명을 해 주세요’라고는 하지 않으려고요. 그 대신 ‘우리가 원하는 교육을 우리가 만들자’고, 함께 서명을 해서 제출하자고, 그렇게 말을 걸려고 해요.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에 좋은 매개가 되는 활동일 것 같아요.


청소년도 사람입니다

두 : 우리 사회에서 진보 진영이 선점한 가치들이 몇 가지 있죠. 이를테면 민주주의와 평등. 그런데 학생 인권, 청소년 인권은 진보적 인사들 사이에서도 아직 낯설어 하는 이가 많아요.

배 : 지금까지 진보 진영에서는 주로 균등한 기회, 평등한 지원과 같이 교육 복지의 측면에서 교육 문제를 접근해왔죠. 그런데 학생 인권은 쉽게 말해 학생들에게 자유와 참여를 보장해주는 거거든요. 근데 생각해 봐요. 먹고 살 수 있게 해줬는데 자유롭지도 않고 의견을 낼 수도 없다면, 그건 사육되는 동물과 같은 삶이잖아요? 자유와 참여가 빠져 있는 복지는 동물적 복지죠.

두 :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배 : 인권 의식은 우리가 사실은 모두 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통찰이 필요한 거거든요. 이런 성찰이 사회 전반에 진행되면 아마 인권 문제도 잘 풀릴 텐데, 진보 진영이 지금까지 사회에 필요한 활동을 많이 해 왔지만, 우리 사회에서 인간 이하로 취급받는 존재에 대한 고민은 생략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두 : 진보 진영에게는 뼈아픈 지적입니다.

배 : 생각해 보면요, “때리지 마세요”라는 부탁은 노예들이 했던 거잖아요. 또 우리나라 감옥 수감자들의 두발 자유는 2000년에 와서야 가능해졌거든요. 체벌 금지, 두발 자유는 정말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이잖아요. 체벌 금지와 두발 자유는 인간 이하의 등급에 놓여 있던 존재들이 인간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돼요. 그것이 학생 인권이라는 이슈가 갖는 의미이죠.

두 :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이 척박한 상황에서 교육 문제를 이야기하며 다른 주제가 아닌 ‘인권’으로 접근한다는 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배 : 외로웠어요. 많이 외로웠어요. 나 혼자 세상에 맞서는 느낌이랄까? ‘당신이 와서 가르쳐보라’는 반응이 많았어요. 가끔은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도 청소년들과 만나본 경험이 적었기 때문에 말이 안 통할 때가 많았어요. 말이 먹히지 않는 느낌이었고 외롭기도 하고 자신 없기도 했어요.

두 : 그래서 청소년 모임과 만나기 시작하셨나요?

배 : 학생 인권 운동이 옳으니까 이루어져야 한다는 식의 가치 운동으로는 소용없다고 생각했어요. 청소년들이 자기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고 봤죠. 그래서 청소년 모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두 : 그렇지만 학교 밖에서 청소년들을 안정적으로 만나기는 어려웠을 텐데요.

배 : 예, 계속 교류하는 청소년들이 있기는 했는데, 청소년 모임이 잘 되다가도 잘 안 되는 부침이 심하고, 그리고 청소년들은 나이를 먹고 자라나잖아요. 그러면 다른 운동으로 옮겨가고. 그런 게 힘들었죠.

두 : 청소년들과 모임을 지속해온 동력이 있을까요?

배 : 모임이 사라지더라도 개인은 남는다거나 구체적 활동을 통해 중요한 장면들이 만들어지면서 운동이 성장하는 것 같아요. 청소년 모임들도 여러 다양한 단체들이 있어서 정체성이 애매한 단체들이 있는데, 그 단체들이 문제적 장면에 노출되면서 ‘인권’이라는 가치에 직면하고 인권을 자기 의제로 가져가는 흐름이 있어요. 그러면서 청소년들이 많이 그룹화 되었어요. 청소년들 스스로 만들어내는 목소리들도 커졌죠.

두 : 그런 청소년들이 학교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죠.

배 : 학교에 간혹 계시던, 학교를 바꾸려고 헌신했던 선생님들, 보통 혼자 열심히 노력하다 실망하곤 하시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분들이 청소년을 통해서 자극을 받기도 하구요.

두 : 요즘 청소년 인권활동가 네트워크**라는 이름이 자주 보이던데요.

** 청소년 인권활동가 네트워크 홈페이지 http://cafe.daum.net/youthhr

배 : 네, 2005년에 만들어졌는데, 2006년부터 제대로 구실을 하기 시작했죠. 네트워크는 아수나로***, 중·고등학교 학생회 간부들 모임, 전북 학생 인권 모임 나르샤 등등 몇몇 단체가 묶인 거예요. 처음에는 느슨한 네트워크를 소박하게 만들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만들고 무척 바빴어요, 스쿨 어택, 전국 행진, 캠프, 학생의 날 행사까지.

*** 아수나로는 2004년말에 탄생한 청소년 인권 단체이다.

아수나로 회원의 칼럼 바로가기

   
두 : 경내 씨는 다른 누구보다 청소년을 함께 활동하는 동료, 동지로 삼고 있는 거죠? 오랫동안 그래왔으니 이미 성인이 된 친구도 많을 테고, 또 그러다보면 경내 씨 곁을 떠나간 친구도 많을 거 같아요. 그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배 : 오랫동안 만나온 청소년들은 이제 친구나 다름없죠. 제가 청소년들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물론 청소년은 미성숙하지만 그건 경험의 절대치가 다르기 때문일 뿐이지 다른 의미는 아니라는 거예요.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지금의 사회가 더더욱 청소년을 미성숙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의 권리-인권은 미성숙 여부와 상관없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단단해졌어요. 이건 이 사회에서 미성숙하다는 취급을 받고 있는 여성이나 장애인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이라고 봐요.

두 : 그래서인가요? 언젠가 ‘인권교육센터 들’**** 소식지에서, ‘세상에 저항하는 나만의 방법’으로 경내 씨는 ‘청소년과 함께 담배 피워 주기’라고 한 적이 있죠. 어른인 경내 씨가 청소년과 동료로 지내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취하는 태도나 행동들이 있으면 좀 더 말해 줄래요?

**** 인권교육센터 ‘들’ 홈페이지 http://www.dlhre.org

배 : 음, 이건 정말로 진지하게 각오해야 하는 건데요, ‘최대한 솔직해지기’. 투정도 부리고, 정말로 투정 부려요. ‘나 힘들어~’ 하고. 그들 앞에서 어른이 아니기 위해서요. 또 ‘나쁜 짓 같이 해주기’. 술집에 같이 가주고, 담배도 사다주고.

두 :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배 : 술이나 담배에 대해서 다른 어른들이 아이들의 상태를 걱정하며 하는 말, 이를테면 ‘쟤 요즘 술 너무 마신다’, ‘담배가 너무 는 것 같다’고 하는 걸 보면, 저는 “~~하니까 그만 피워. 안 돼”라고 하지는 않아요. 대신 이렇게 해요. “몸의 변화는 없어?”, “남들이 이렇게 말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라고 물어보죠.

두 : 청소년들과 거리가 느껴질 때는 없으신가요?

배 : 조급함과 답답증이 생길 때도 있어요. 저는 오래 전부터 이들의 문제를 고민해서 어느 때는 좀 적극적으로 치고 나갔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들은 아직 고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만 청소년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 운동이니까 제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돼요. 조급함을 누르고 그들의 속도를 기다려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또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에너지를 제가 못 따라가기도 하고요.


가장 보편적인 언어, 인권을 만나다

두 : 이야기를 듣다보니 배경내 씨 개인이 궁금해지네요.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배 : 특별히 문제의식이 많은 학생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죠.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참 좋은 분이고, 반 분위기도 참 좋았어요. 수업 시간에 재미있는 말 하는 친구들, 기상천외한 질문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 친구들이 인기도 많고, 인정받는 분위기였어요.
그 중에 무슨 문제든 끝까지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담임선생님께 뭔가를 또 끝까지 물어본 거예요. 선생님을 곤혹스럽게 한 거죠. 그 지경에 이르니까 그 좋던 선생님이 그 아이 볼때기를 막 때렸어요. 진짜 심하게. 그걸 보면서 느꼈죠. ‘저 사람은 권력자였어. 그동안 그 권력을 사용 안 했을 뿐 사실은 우리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때 받은 느낌이 굉장히 강렬했어요.

두 : 아...

배 : 고 2때 전교조가 막 만들어졌는데, 이웃 학교에서 해직된 선생님이 순회투쟁이라는 걸 하더라구요. 우리 학교에서 선전전을 했는데 지금 뭔가 세상에 부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죠. 그렇지만 저는 그때 오로지 지상목표가 서울로 대학 가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거였어요. ‘나는 공부해야 한다’ 생각하고 그냥 공부를 열심히 했죠.

두 : 대학에 가서는요? ‘강경대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던 글을 봤어요.

배 :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그때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이 터졌는데, 그런저런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유인물을 나눠 주더라구요. 그걸 받으면서, ‘아, 이제 이런 질문들이 나에게 주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러다 강경대 사건이 터지고 우연히도 열사의 시신이 세브란스로 왔어요. 학교 전체가 술렁술렁했죠. 도서관에서도 다들 그 얘기. 그때 마음이 무척 무거웠어요. 한 백 미터만 가면 되는 곳에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나에게 정면으로 질문이 던져지는 느낌. 결국 갔죠. 그날이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거죠.

두 : 원래 전공이?

배 : 아, 이거 우스운데. 영문과예요. 제가 남들에게 늘, 영문도 모르면서 영문과 갔다고 하죠. 4학년 때까지는 그냥 학생회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 대안 교육 운동 동아리를 만들면서 교육 운동을 시작한 거예요. 그 세대는 어떻게 보면 축복받은 세대죠. 대중 운동이 엄청나게 고양된 시기였고. 그런 걸 보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두 : 요즘 마음은 어때요? ‘학생 인권’이라는 이슈는 경내 씨가 십여 년 동안 중요하게 붙들고 있었던 주제인데, 드디어 제대로 펼쳐보는 느낌일 것 같은데.

배 : 네, 정말 그래요. 저는, 학생 인권이 진짜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학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학교라는 공간에 있는지가 중요하다고요. 그리고 그게 어떤 정책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청소년 자신의 문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대안 교육에 관심이 있어 대안 교육 운동에 기웃거렸어요. 그런데 음, 뭐랄까…… ‘좋은 어른들이 좋은 교육을 만들려는 거구나.’ 싶었죠. 뭔가 꽉 차 있어서 더 텅 비어있는 느낌? 너무 잘 만들어진 관상용 같은 느낌? 그랬어요.
저는 좋은 교육 만들기는 시끄럽고, 너저분하고, 힘든 거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학생들이 주인이 되는 거여야지, 어른들이 만들어주는 거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니 ‘학생인권’이라는 주제에 주목하게 됐죠. ‘인권’이 갖는 정체성, ‘인권’이 주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모든 걸 다 말하는 느낌이 좋았어요.

두 : 아, 그랬나요? 저는 대학 다닐 때 ‘인권’에 대해 말하는 건 왠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고, 몰계급적인 것 같고, 너무 맨숭맨숭하다 싶었는데.

배 : 그렇죠. ‘인권’이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로만 멈추면 재미없죠. 인권이 문제적인 구체적 장면과 만나면 정치성이 확실해져요. 인권이 침해받는 구체적 장면들 하나하나는 매우 정치적이죠. 사람이 정말 스스로 바닥까지 내려갈 때가 있잖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정말 바닥일 때, 그럴 때조차도 이 사회에 기본적 조건을 요구할 수 있는 언어, 그게 ‘인권’이죠.

두 : 경내 씨는 인권 운동 사랑방에서 사회 운동을 시작했잖아요? 인권 운동 사랑방과 만남을 ‘운명적 조우’라고 하셨죠?

배 : 아, 제가요?(웃음) 대학 때는 인권이라는 말을 몰랐어요. 대안 교육 기웃거리면서 살아가다가 어느 날 인권영화제 포스터를 봤는데, 그 포스터가 엄청나게 컸던 것만 같아요. 주변의 다른 것들을 제치고 그것만 엄청나게 확대되어서 보였던 느낌?

두 : 인권이 경내 씨 가슴 속으로 뛰어 들었네요. 그게 몇 년이죠?

배 : (웃음) 96년이요. 1회 인권영화제. 96년 말에 사랑방에 갔어요. 80년대 대학생들은 졸업하면 모두 위장취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90년대부터 좀 달라진 거죠. 그때 ‘진보적 사회 진출을 위한 학교’라는 일종의 실습학교가 있었죠. 실습학교라고 해봤자 그땐 그냥, 재미도 없는,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입력하는 자원 활동을 했어요. 그치만 공부할 때는 참 좋았어요.

두 : 제가 대학 갓 졸업했을 때, 인권 운동 사랑방은 박봉으로 유명한 곳이었는데요.

배 : 네, 그 당시 월급이 35만원이었어요. 그 월급을 그만둘 때까지 받았나, 그래요. 그런데 나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찾고 싶었어요. 그러면서도 진보적 사회 진출이 좋기는 하지만 먹고 살 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유네스코도 기웃거려봤는데 유네스코는 현장성이 없더라구요. 인권 운동 사랑방에서는 뭔가 도전 의식이 생겼어요. 사랑방이 93년 창립됐는데 그 당시 인권운동의 사회적 기반이 하나도 없었어요. 내가 할 일이 많은 것 같았어요.
게다가 저는 조직 기반이 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랑방에는 ‘교육실’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교육실에 왔다 갔다 하던 사람들 중 교사 분들이 있었는데, 인권 교육을 고민하다보니 교육 내 인권을 고민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둘 다 하게 되었죠.


지금, 여기의 삶을 사랑하라

두 : 인권 운동 사랑방에서 인권 교육 센터 ‘들’이 분리된 과정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배 : 사랑방은 단체 하나 가지고 몸을 불리지 말고, 자꾸 알까기를 해서 더 많은 단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자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먼저 분리된 게 ‘인권 연구소 창’이고, 다음으로 인권 교육실이 분리되면서 ‘인권 교육 센터 들’이 생긴 거죠.

두 : ‘들’에서 활동하는 청소년들의 활동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재정과 학습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요.

배 : 네, 활동가 청소년들이 대부분 학교를 싫어하다보니 학교 공부는 재미없어 하는데 그러다보니 배울 기회 자체를 놓쳐요. 그 친구들이 어떤 자기 세계를 가지고 어떤 자기 전망을 펼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안타깝죠. 우리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천천히 맞이했던 그 질문들을 그 친구들은 당장 눈앞에서 만나게 돼요.

두 : 그들에게 학교 밖 학습을 위한 도움을 주는 것이군요.

배 : 공부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강사와 공간은 후원을 받아야 할 거예요. 청소년친구들에게는 수업료를 주려구요.

두 : 수업료를 받아야 할 텐데 주신다구요?

배 : 네. 활동 기반을 마련하자는 거니까요. 재정이 많이 필요하니 후원이 절실해요. ‘들’뿐만 아니라 문화연대, 교육공동체 나다, 진보교육 연구소, 동성애자 인권 연대 등 함께 해온 단체들이 같이 준비하고 있어요. 두리번도 강사 후원해 줄 거죠?

두 : 하하, 아는 건 없지만 노력해 볼게요. 짧은 기간이지만 약 1년 여 정도 제가 경내 씨를 보면서 받은 느낌은, 굉장히 ‘바르고 단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어요. 혹시 그런 거 있어요? ‘나는 운동가로서 이래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원칙 같은 것?

배 : (부끄러운 듯 웃음) 하하하. 저 스스로 활동가라고 생각해요. 제가 세운 원칙에 따라 제 삶은 구성되어야 한다고, 그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고, 그게 재미있죠. 저는 제가 어딘가에 쓰이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일을 많이 맡고 거절은 잘 못하죠. 쓰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뒷바라지하는 것도 좋아 하구요.

두 : 엄청난 활동력의 비결이군요.

배 : 제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요, 어느 순간에 일을 만들고 있고 사람들을 일하게 만들고 있어요. “야, 그거 진짜 재밌겠다. 그럼 우리 이거 해보지 않을래? 그래 이건 내가 하고 저건 네가 하고. 응응 와 진짜 재밌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러죠. “개굴이랑 같이 있다 보면 내가 어느 순간 일을 하고 있어!” (웃음) 나쁘게 보면 일중독 기질이 있기도 해요. 제 스스로 주의해야 할 기질이라 생각해요.

두 : 혹시 소모되는 느낌이 있지는 않아요? 쓰인다는 거는 닳는 것이기도 하니까.

배 : 글쎄요, 제가 해왔던 일이 다 혼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 일이었으니까 소모되는 느낌은 아니에요. 가끔 길게 보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해요. 지금의 과제는 이거죠. ‘지치지 않기!’
2005년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떠나면서 처음으로 좀 헛헛한 느낌이 왔어요. 그래서 그때 나를 여유롭게 해주는 뭔가가 필요했어요.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걷는 시간을 가지면서 극복했어요. 그때의 경험이 나이 들면 서울을 벗어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자연과 벗하는 삶을 고민하게 됐죠.
요즘은 쉬기 위해 가끔 거짓말도 해요. 옆에서 바쁜 게 보이는데 쉬러 간다고 하면 미안하니까 그냥 거짓말해요. 일 때문에 가는 것처럼. 근데 웃기는 거는 그게 별로 죄책감이 안 들어.(웃음)

두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배 : 저는 6개월 이상의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어요. 6개월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어려서부터 마흔 살 이상 살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게 버릇이  되다보니 긴 계획은 세울 필요가 없었어요. 대학 때는 학기 중에 열심히 돈 벌어서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모든 삶이 6개월 단위로 돌아갔어요.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6개월 단위로 계획하고 살기.

두 : 막연한 미래보다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는 뜻이죠?

배 : 네. 그래서 저는 보험, 적금, 이런 거 안 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나는 아프면 국민 건강보험 앞에 가서 농성할거야” (웃음) 어느덧 내년이 마흔이에요. 지금도 장기 계획은 전혀 없어요. 엄마나 언니가 저 대신 들어준 연금보험이 있어서 나중에 얼마간 나오기는 한다던데, 그거 말고는 전혀.

두 : 당분간은 ‘들’ 일에 매진하시겠네요.

배 : 네. 무슨 일을 해도 10년은 해야지 밭을 일궜다는 느낌이 들어요. 활동해 온 경험으로 알고 있는 거죠. 6개월 이후 무엇을 할지 계획하지 않아도 다른 일을 갑자기 선택하게 되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거. 지금까지 해온 일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거고요.
사랑방에 10년 있었고. ‘들’을 2008년에 만들었으니 또 한 십 년 걸리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 다음에는 귀촌이 꿈이에요. 그래서 농사짓는 친구들, 지역운동 하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만나고 있어요. 활동하다 보면 각 지역에 친구들이 많이 생겨요. 귀촌도 꾸준히 준비해야겠더라구요. 꾸준히 만나면서 앞으로 살아갈 구상을 하는 게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계획이죠.

두 :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눠 주어 고마워요. 또 일하러 가신다구요?

배 : 네, 월요일부터 교사 대상 연수가 있어 그거 준비하러 가요. 저도 두리번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는 술을 한 잔 해요. 오늘 재밌었구요, 나중에 두리번 이야기도 듣고 싶네요.

 

총총히 사라지는 배경내 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체벌과 두발 단속은 학생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우받고 있다는 증거’라던 배경내 씨의 말을 되뇌어 본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를 외치는 10대 소녀들이 성인 남성들에게 ‘섹시하다’는 경탄을 받는 사회에서, 청소년이기 때문에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치마 길이와 머리 모양을 단속받아야 하는, 이 모순의 시대에 교사로 살아가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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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etcar at Bloor station. 출처 : http://wvs.topleftpixel.com/


사진을 보고 왠지 캐나다 여행할 때 지나갔던 터미널들에서의 밤들이 떠올랐는데,
확인해보니 토론토. 캐나다 맞다.

2004년, 캐나다 동부를 열흘 동안인가 보름 동안인가 동행 1인과 함께 여행하던 때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버스에서의 잠으로 숙박을 대신하고는 했었다.
캐나다는 워낙 넓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열 시간 내지 스무 시간은 기본이었으므로.
그래서 한 도시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터미널로 이동하여 막차를 타면 그날의 숙박이 해결되는 식이었는데
그 막차를 두 번인가 놓쳤었다.

8월 초에 여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추위 걱정은 없었지만
휴가철이라 방을 예약하지 않으면 숙박할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도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최악의 도시로 기록되는 몬트리올일 것으로 추측됨)
차를 놓쳤던 우리 둘은 그냥 터미널에 앉아 밤을 새기로 마음먹었는데
터미널도 문닫는 시간이 있었던지 거기서도 쫒겨났다.
터미널 앞에서 어떤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와 영어로(몬트리올이니까 불어였을까?) 뭐라고 제안을 했었는데
나는 그 사람 말을 못 알아들었고 나의 동행은 그 아저씨를 피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정말 갈 곳이 없었던 우리는 짐을 질질 끌며 도시를 헤매다녔다.
피씨방에도 한 시간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나올 수밖에 없어서, 길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동양인 여자애 둘이 길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걸 보고는 자기네 집에서 재워주겠다는 남자애들도 있었고
내 동행은 따라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도 했지만
나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도리질을 하고 길바닥에 있는 쪽을 택했다.
실상 낯선 도시에서 깜깜한 밤에 길바닥에 앉아있는 일이 낯선 사람 집에 가는 것보다 덜 무섭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나에게 서양 남자애네 집에 가는 일은 각종 불쾌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무서운 일이었다.

또 어느 도시에서였는지 또 한 번 막차를 놓쳐 터미널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터미널에서 만난 어떤 남자애가 자기가 마침 잡아놓은 방(정확히 표현하자면 유스호스텔의 침대)이 남는다며
숙박을 해결해주겠다고 따라오라고 했다.
그런데 유스호스텔에 도착하고 나니
한 명은 여자들 방에서 자고, 한 명은 자기와 같은 남녀혼숙방에서 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애는 함께 여행할 계획이었던 여자동행을 (어떤 이유에선지) '상실한' 상황이었나보다.
뭐 한 침대를 쓰자는 건 아니니 별일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나는 처음부터 이 남자애를 따라오기가 싫었는데 이런 상황이 되고보니 좀 짜증스러웠다.
결국은 더 어렸던 나는 여자들 방에서 자고, 언니 노릇을 했던 나의 일행이 그 남자애를 따라가서 자고 오기로 했고
여차저차, 그날 밤을 또 넘겼다.

마지막으로는 동부 여행을 마치고 밴쿠버로 넘어왔을 때다.
다음 날에는 내 동행이 서울로 귀국하고 나는 밴쿠버에 더 남기로 했었으므로
우리가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막차를 놓쳐 숙박할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좀 편히 쉬고 싶어서, 한인이 하는 민박집으로 미리 예약을 잡아놓기는 했는데
막상 공항에 내리고 보니 그 민박집이 공항에서도 다운타운에서도 꽤 멀었다.
공항에서 서성거리며, 어떻게 거기까지 가나, 민박집 간 다음에는 다운타운에 어떻게 놀러나오나, 하고 있었는데
어학연수온 한국인 남자애 두 명이 오더니 한국 사람이냐고 묻고, 사정을 듣더니
자기네가 사는 아파트가 가깝고 빈 방이 있으니 공짜로 재워준다며 그리로 가자고 했다.
나는 역시나 반대했는데 결국은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가깝다더니, 그들의 집은 걸어서 한 열 블록은 되었던 것 같다.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건 아닐까 잔뜩 긴장을 하고 도착을 했는데 뭐 멀쩡한 아파트였고 비어 있는 방도 있었다.
동행과 나는 짐을 풀고 다운타운으로 놀러나갔는데
여행 중 쌓여있던 서로에 대한 감정이 하필이면 그날 폭발하고 말았다.
밴쿠버 다운타운 길에서 악을 쓰며 울고 싸우고 그 남자애네 집에 들어와서도 훌쩍훌쩍 울며 다투고 화해를 하고 
남자애들이 같이 맥주나 한 잔 하자고 방을 노크하는데
나는 퉁퉁 부은 눈이 창피해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고
역시 이번에도 언니였던 나의 동행이 대표로 나가서 그들과 맥주 한 잔을 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울었으니 일찍 잠이 들고 일어나서 아침에 그 남자애들을 만났는데
전날에 그들을 건달 취급했던 것도 미안하고 뜬금없이 남의 집에서 울며불며 한 것도 민망하고 그랬던 것 같다.


이 싱거운 이야기들의 결론
1. 일상은 일상이고 영화는 영화다. 영화에서와 같은 무서운 / 혹은 극적인 일은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2. 나는 지나치게 남자들을 무서워했던 것은 아닐까? 저랬으니 캐나다에서 그냥 빈 손(!)으로 온 것이 아닌가.
3.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못할 마구잡이 여행을, 그 때는 잘도 저질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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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자고 아주 대놓고 작정한 영화.
지금 보니 사실 좀 민망할 지경이기도 했다.

DVD를 사다 쟁여놓는 것으로도, 자꾸만 영화를 보는 것으로도, 포스터를 집에 붙여놓는 것으로도,
어느 것으로도 영화를 온전히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러므로
영화를 쓰는 것 외에 영화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김혜리가 어느 글에선가 썼다.

따지고 보면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 사진, 그림.... 다 그렇다.
집에 쌓아 놓는다고 늘 그것만 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아름답다고 어쩔 것인가?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어질 테면 그대로 흘러가 버리라고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사람도 그렇다.
곁에 둔다고 곁에 두어지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사랑한다고 어쩔 것인가?
너도, 그리고 나도, 변하는 것이 사람이라 더 좋다고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

눈이 멀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다 담아둘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슬픈 미셸도,
그녀가 곁에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아 애달픈 알렉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영화를 잊고 있다가 근 20년만에 다시 보러 모인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들을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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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치(!)들의 공통점

줄담배
슬쩍 찌푸린 미간
무직 but 한탕주의
시 쓰기
밥보다 커피
기꺼이 위험해짐
다리 꼬기
어이없는 유머
흐물흐물한 척추
예민한 자존심
비상한 생존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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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첫 수업시간.
2학기 수행평가를 안내하고
남는 시간에는 2학기 발표 주제인 지식채널을 보았다.
(지식채널 틀기 실습 차원)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문제의식 있는 걸 봐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잊혀진 대한민국> 시리즈를 보았는데, (나도 참.)
하나 보고 났을 때는 괜찮다 싶었는데 같은 주제로 두 개, 세 개를 이어서 보니까
너무나 무겁고 우울하게 가라앉는 분위기여서 내가 감당이 안 되었다.

네번째 반에서는 그 무게가 싫고 여러 번 보는 게 지겨워서,
가벼운 걸로 틀었다.
가벼운, 여고생 특유의 탄성들이 이어지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학생들이 어떤 종류의 감성을 편하게 느끼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경험.

편안하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감성을 울리면서도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전달하기.
그러니까, 조금씩 역치를 늘려가기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유머감각을 유지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의 수업의 패턴에 이제는 익숙해진 아이들과 함께,
그런 만큼 더더욱, 좀 팽팽한 긴장감으로
수업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작년엔, 뭘 해도 감동이 없었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을 읽어도
간디의 물레를 읽어도
눈길을 읽어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는데 그 이야기의 무게에 오히려 내가 눌리는 느낌이었달까.
서로가 익숙해져 있으니 내가 하는 이야기도 뻔하게 들릴 것 같아서였는지,
내가 스스로 그 이야기에 푹 젖어서 문제의식을 전달하기보다는
나와 학생들과 이야기주제가 비눗방울처럼 붕 떠 있었던 느낌이다.

이 교과서 안에 들어있는 것은 내가 오랜 기간 공들여 갈고 닦아 길을 냈던 텍스트들인데,
내년부터는 교과서가 바뀌니 이 텍스트들을 들고 학생들을 만날 일은 한 십 년 간 없을 것 같다.
그런 만큼, 애틋하게, 다시 시작해야겠다.
처음처럼이 아니라 마지막처럼,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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