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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08 수업일기 1107
  2. 2010.11.01 변혜정 선생님 인터뷰
  3. 2010.10.28 이근행 MBC 노조위원장 강연에서의 메모 2
  4. 2010.10.25 '3. 대화'
  5. 2010.10.17 인천, 골목길 산책 1
  6. 2010.10.15 걷기 2
  7. 2010.10.14 영화로 배우는 여성주의 연수 첫 날
  8. 2010.10.11 '외박'
  9. 2010.10.10 수업일기 1010
  10. 2010.10.10 Gabriel's Oboe



'눈길' 시즌. 

긴 소설, 
줄거리를 머릿 속에 넣어주려고 한 반에서는 릴레이로 줄거리 말하기를 시도하기도 함.
서사 중심의 소설은 길어도 줄거리 다루기가 어렵지가 않은데
'눈길'과 같은 소설은 학생들이 이야기의 뼈대 잡아내기를 어려워하고,
이걸 도와주는 일도 쉽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걸 '재미있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본문을 다루는 일도 만만치 않은 것이,
감정의 결이 중요한 소설이다보니 곳곳에 살펴봐야할 지점들이 많은데
너무 길어서 하나하나 다 읽다보면 학생도 나도 너무 지치고,
좀 다이나믹하게 하려고 스킵하다보면 학생들이 따라오지 못한다.

나도 교과서를 찍어서 진행해 볼까?

쓰다보니 너무 초짜같은 고민이라 부끄럽네.

쩝. 내년엔 '문학'을 가르치게 될 테니 더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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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한의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중에서 '눈길' 부분

- 세상에는 진리도 존재하지만 진실도 존재한다. 단편소설 '눈길'에서, '나'가 어머니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도움도 받지 못했으므로 '나는 어머니에게 빚이 없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한편으로 어머니를 외면하는 그가 진실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진리의 논리'도 있지만 '진실의 논리'도 있는 까닭이다. 문학은 주로 이 진실의 논리를 추구한다. '눈길'은 진리를 지향하는 논리가 진실을 지향하는 논리에 지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은 '어머니의 사랑을 외면하면 안 된다' 혹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진실의 논리에 따라 주인공이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리를 읽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 이야기는 점심 때 시작되어 밤중에 끝난다. 전면에 서술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서술된) 사건, 즉 '현재(적) 사건'이 일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0시간 내외이다. 이 사건의 '서술된 시간'과 서술자가 그것을 '서술하는 시간'은 순서상 '함께 간다'.
'눈길'의 현재적 사건에는 그 이전의 과거 사건이 끼어들어 있다. '나'는 회상 형식으로 17, 8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사건(과거사건1)과 어젯밤의 사건(과거사건2)을 이야기하는데, 앞의 과거 사건1은 어머니의 회상 형식으로도 제시된다. 회상, 특히 일인칭 서술에서의 회상은 그 자체가 행동이요 사건이다. 따라서 이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서술은 회상된 시간 위주로 보면 과거 사건이나, 회상하는 시간 위주로 보면 현재사건이다. 그러므로 줄거리를 잡거나 핵심적 갈등을 논의할 때,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읽으면 정리가 어렵고 생각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눈길'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한 서술의 양이 많고, 그 현재 시간 중에 중요한 상황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기 때문에 현재 사건을 중심으로 삼는 게 적절하다. 그러면 약 10시간 동안 일어난 현재 사건이 줄거리의 기둥이 되고, 이 작품의 중심 사건, 곧 핵심적 변화와 갈등을 내포하거나 전달하는 사건을 거기에 설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과거 사건은 이 중심 사건의 처음 상황과 끝 상황의 원인과 전개 과정에 수렴되거나 그것의 전개를 돕게 된다. 과거 사건이 줄거리에서는 현재 사건 앞에 놓이지만, 그것을 '회상하는 행위'의 의미와 결과는 현재사건의 의미와 전개를 돕는 데 초점을 두고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작품의 결말부에서 어머니는 과거 사건 1, 즉 눈길에서의 모자 이별에 대해 회상하는데, 아들은 그것을 듣고 운다. 이 '운다'는 행동이 '눈길'의 핵심적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할 때, 과거 사건 1 혹은 그것을 회상하는 어머니의 행동은, 그에 수렴되거나 그 전개를 돕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 '눈길'은 아예 집이라는 공간소가 주인공인 듯한 소설이다. 예전에 잘살던 시절의 집, 남의 손에 넘어갔음에도 어머니가 굳이 아들로 하여금 하룻밤을 지내게 했던 그 좋은 집은, 거기 살았던 이들의 안락과 화목의 상징이다. 그 집은 이제 없고, 개량을 기다리는 단칸 오두막이 있을 뿐이다. 아들은 개량을 돕지 않으려고 그 집을 떠나 서울로 가버리려 한다. 옛집을 잊지 못하고 그것의 환유물, 곧 거기 놓였던 옷궤를 지니고 사는 어머니와 대조되면서, 아들이 떠나고자 하는 오두막은 '어머니에게 진 빚이 없다'는 그의 좁고 황폐한 마음과 유사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아내의 도움으로 '떠나서 피하지 않고' 오두막 개량을 돕게 되는 아들의 행동은, 자신의 마음의 집(가족, 안식처)을 되찾고 개량하는 행동이다. 이처럼 '눈길'에서 집은 물체이자 장소인 동시에 상징이다. 이런 예는 의외로 많은데, 그것은 집이 정착과 가족의 행복을 바라는 인간의 원형적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AND



사진과 함께 보기좋게 편집된 글을 볼 사람은 여기로 고고


인터뷰 전문 


유쾌한 씨의 섹슈얼리티 - 변혜정



변혜정 선생님을 소개하는 글에는 늘 ‘유쾌한’, ‘신나는’, ‘열정적인’, ‘일중독’과 같은 단어가 따라 다닌다. 오랜 기간 여성 섹슈얼리티 분야에서 활동해온 그녀는 서강대학교 성평등 상담실 상담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최근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 센터’를 만들어 이전과는 다른 섹슈얼리티 담론을 풀어내는 중이다. 지난 10월에는 그녀가 엮은 책,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가 발간되었다.


두리번 / @redpebl


나는 여자고등학교 교사다. 그리고 나는 여성주의자, 속칭 ‘꼴 페미’다. 그래서일까? 남자아이들 틈바구니에 있는 것보다 여자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더 의미 있고 즐겁다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종종 괴롭다. 여학교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치마 길이 단속, 예의범절 교육들이야 적당히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런데 ‘너희들도 남자아이들과 똑같은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어’라고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교육을 하기는커녕, 그 아이들이 성적 결정권를 행사하기라도 할까봐 벌벌 떠는 것이 현실이다.

변혜정 선생님은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낸, 두 아이를 둔 엄마다. 책 속에서 그녀는 고등학생 딸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갈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성폭력 문제 전문가인 변 선생님이 두 아이의 엄마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딸아이를 둔 엄마가 ‘10대의 섹스’ 운운하는 책을 내기까지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터뷰는 변혜정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인터뷰 시작 전 예의 빠른 말투로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 센터’ 업무를 마친 선생님은 “꼭 해야 할 통화가 있다”며 양해를 구하셨다. 그리고 외국에 있는 딸이 무언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인지 전화기를 붙들고 설득적인 어조로 한참을 옥신각신하셨다.


종갓집 며느리 페미니스트

퍼슨웹(이하 퍼) : 따님이 외국에 있나 봐요?

변혜정(이하 변) :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영국에서 학교를 다녀요. 제가 그걸 여기서 보살피느라 너무 바빠요.

퍼 : 혼자 가 있나요?

변: 네, 혼자. 원래는 가디언(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가디언을 쓰면 한 달에 백만 원은 들거든요. 학비도 비싸고.

퍼 : 가디언이 없으면 비자가 안 나올 텐데요?

변 : 그럼요. 유학생 애들은 가디언이 꼭 있어야 해요. 그런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이름만 올려놓고, 가디언 일들은 제가 다 하는 거죠.

퍼 : 선생님이 백만 원 어치의 일을 하고 계신 거네요.

변 : 그렇죠, 그런데 일이 정말 많아요. 제 일도 워낙 바쁘고, 그러다 보니까 시간을 놓치는 일이 많은데, 지금 꼭 해야 하거든요. 좀 있으면 거기 시간으로 애 잘 시간이고, 그래서 부득이 통화를 했어요.

퍼 : 먼 곳에서 선생님이 영국에 있는 딸을 돌보기가 쉽지 않으실 텐데요.

변 : 그럼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애 때문에 자기 일을 그만둔 친구도 있어요. 너무 바쁘기 때문에.

퍼 : 유학생 하나 돌보는 게 보통 일이 아니군요.

변 : 아이 공부 문제는요, 학력 자본이라는 게 한국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해결이 안 돼요. 소위 ‘스펙’이라 불리는 걸 쌓아주기 위해 엄마들이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퍼 : 선생님이 결혼해서 자녀까지 있다는 걸 이번 책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을 통해 처음 알았어요. 결혼한 분이라거나 아이가 있는 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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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6342

변 : 결혼은 일찍 했어요. 석사과정 중. 제가 페미니스트라 하고 다니고,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살아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퍼 : 결혼할 때도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셨나요?

변 : 그렇죠. 그래서 파토도 냈죠. 남편이 종갓집 종손이에요. 청첩장까지 찍었던 상황이었지만, 이 사람이 집에만 갔다 오면 보수적으로 바뀌어서 안 되겠다 싶었어요.

퍼 : 청첩장까지 찍고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셨어요?

변 : 종갓집 종손이 청첩장 찍었는데 문제가 생기니 시어머니가 직접 연구실까지 찾아 오셨었어요. 그래서 내가 설명했죠. “나는 페미니스트고, 종갓집에서는 아들을 낳아야 되는데 아들 낳을 자신이 없다. 종갓집에서는 제사가 많을 텐데 나는 일이 많아서 제사를 모실 수 없다. 남편 될 사람이 이해하는 듯하다가도 집에만 갔다 오면 사람이 변해서 결혼 못 하겠다.” 그랬더니 우리 시어머님이 괜찮다고, 각서 쓰며 보장해 주셔서 결혼한 거예요.

퍼 : 시어머니가 대단하신 분이네요.

변 : 네, 저희 시어머니 대단하세요. 전남여고 나오셨고,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그렇지를 못해서 한이 되신 분이죠. 아마 사회가 이렇지만 않았으면 큰일을 하셨을 분이에요.

퍼 : 그런 분이 종갓집 며느리 노릇을 하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변 : 그렇죠. 결혼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일을 찾아서 사업하셨던 분이세요. 젊으셨을 때는 눈썹 휘날리게 다니셨대요. 그런데 그런 점을 시어머니의 시댁과 자식들은 좋아하지 않았던 거구요. 남편도 ‘왜 우리 엄마는 가정을 돌보지 않나’하고 불만이 많았었다더군요. 시어머니 삶 속 갈등을 제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설명해 드리면서 시어머니와 아주 친해졌죠.

퍼 : 독특한 고부관계예요.

변 : 그럼요. 세상에서는 시어머니 같은 여자를 나쁘다고 하잖아요. 남편도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저는 그랬죠. 당신 어머니 너무 훌륭하신 분이라고. 남편이 그런 주제로 여성 신문에도 글을 쓴 적도 있어요.

퍼 : 그런 과정을 통해 시어머니는 선생님과 돈독해지셨겠네요.

변 : 저희 시댁이 개인주택인데 2층에는 시할머니, 3층에는 시외할머니가 살고 계셨어요. 저희 시어머니는 외동딸이셔서 친정어머니가 큰 부담이셨나 봐요. 홀로되신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살게 되었는데, 일상에서는 매일 부딪힐 수밖에 없죠. 한번은 저희 시어머니가 당신 친정어머니 때문에 댁에서 싸우고 가출하신 적도 있는데, 이때 제가 흔쾌히 저희 집에 오시라 했어요. 남편은 중간에서 난처해하며 어머니를 시골에 다시 내려가시게 하려고 애쓰는데, 나는 시어머니께, “어머니 여기서 당당히 계셔라. 어머니는 당당하시다” 편들었죠. 이런 게 다 여성문제잖아요.

퍼 :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을 모시겠다고 오히려 고집을 부린 셈이네요.

변 : 여성 연대죠. 어머니의 힘든 상황들을 제가 제 언어로 풀어드리면서, “어머니는 훌륭하시다, 당당하게 사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어머니는 며느리가 하는 여성학을 인정하게 되신 거구요.


애 잘 낳는 엄마 페미니스트

퍼 : 결혼 전 출산 계획을 하셨던가요?

변 : 제가, 몰랐는데, 다산 체질이에요. 성관계만 하면 애가 생기는 체질. 애를 가질 계획이 없어서 피임약을 먹었었는데, 부작용이 생겨서 잠시 끊은 사이에 아이가 생긴 거예요. 그것도 대학원 레포트 때문에 바빠서 모르다가 7월 말에 생리가 없어서 병원을 갔더니 임신 4개월이라는 거예요. 병원에서는 몰랐냐고 황당해 하더군요. 그날 병원 가고 초음파 한번 안 찍어보고, 한 달에 한번 가는 정기검진도 바쁘다고 한 번도 안 가고, 애 둘을 진통도 없이 3분, 5분 만에 낳았어요.

퍼 : 진통도 없이 5분 만에 아기를 낳으셨다구요?

변 : 남편은 저더러 닭처럼 애를 낳는다고 해요.(웃음) 저 책도 냈었어요. <출산 십계명 - 아기를 5분 만에 낳는 방법>. 체질이기도 하지만, 활동적으로 사는 것도 빨리 낳는 비결일 거예요. 의사가 저더러 자궁문을 한 2센티는 열고 다니는 사람이라면서, 그러다가 길동이 낳는다고, 조심하라더군요. 저는 아이가 뱃속에 있으면 밥맛도 너무 좋고 인생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아기도 좋아하고요. 만약에 제가 바깥 일로 바쁘지 않았으면 아이를 계속 낳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퍼 : 그렇지만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변 : 못 하는 게 있긴 해요. 제가 비위가 약해요. 애가 토하면 저도 토해요. 다행히 남편이 잘해줘서, 어려움이 크지는 않았어요. 남편이 자유업종이라 시간이 조금 자유롭고, 돈을 여유 있게 벌어오니까, 사람을 썼죠. 낮 시간 동안은 그분이 돌봐주셨죠. 경제적으로 사람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아기이던 시절에는 괜찮았어요. 어려워진 건 애가 학교가 들어가서 엄마가 해줘야 할 일이 생길 때부터였죠. 숙제를 도와주고, 학교에 적응하게 돌봐줘야 하는데, 그건 다른 사람이 해줄 수가 없으니까요.

퍼 : 남편분과 역할 갈등은 없으셨나요?

변 : 물론 없을 수는 없죠. 그렇지만 저희 남편은 여성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에요. 드라마 보다가 울 정도로 감성적이고 착하고 부드러워요. 이런 것들이 애를 키우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내가 부탁을 하면 부탁은 다 들어줘요. 인간으로서, 그리고 남편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도와주는 거죠. 생색 안 내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면에서 남성적인 면이 드러나는 거라고 할 수도 있죠.

퍼 : ‘약한 여자를 돕는 것이 남자의 할 일’이라는 관점에서?

변 : 그렇죠, 술자리에서 여자 친구의 술을 대신 마셔주는 ‘흑기사’ 놀이도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비판하곤 하잖아요.

퍼 : 그렇지만 부드러운 감수성과 묵묵한 흑기사 기질을 두루 갖추신 남편 덕분에 아이 키우는 데는 많은 도움을 받으셨네요.

변 : 맞아요, 저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편했고 그래서 그럭저럭 이혼하지 않고 잘 살아요. 운이 좋았던 편이죠. 또, 제 시댁에서도 제 일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시죠.

퍼 : 집에 들어와서 살림하라고 하지 않으시고요?

변 : 저희 시댁이 다행히 여자가 공부하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세요. 시아버지가 교수님이셨거든요. 여자 박사, 교수가 익숙하신 분이라 ‘빨리 논문 써서 교수돼라’고 늘 말씀해주셨죠. 그런데 제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모르세요. 10대들의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라고는 아마 상상도 안 하실 거예요.

퍼 : 선생님 이름만 검색하면 자위니 섹스니 하는 온갖 민망한 단어들이 검색되는 데도요.

변 : 모르세요. 그냥 저는 전통 있는 집안의 며느리인 거예요. 여성학은 그냥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저의 사정을 아는 다른 동료가, “시아버지가 변 선생님이 하는 일이 뭔지 아느냐”며, “아마 정말로 아시면 받아들일 수 없으실 텐데”라고 하더라고요.(웃음)

퍼 : 똑똑하고 예쁜 며느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부장 권력의 해체, 자유로운 섹슈얼리티, 이런 것들을 주장한다는 걸 아시면 기절할 노릇이시겠어요.

변 : 저는 이런 제 상황들이 참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봐요. 제 수업에서도 분석적으로 다뤄요. 젠더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통념이, 여성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재미있는 지점이 되죠.

퍼 : 어떤 이야기를 다루세요?

변 : 저는 신체적으로 아이를 쉽게 갖고 낳을 수 있었기에 다 가능했던 거죠. 입덧으로 고생하고, 임신 기간에 힘든 사람이었다면?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았다면? 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다행히도 이런 부분에서 큰 문제가 없어서 아이를 잘 낳고 키우고 있기 때문에 시댁에서도 제 바깥 활동을 인정해주는 것 아니겠어요?

퍼 : 가정에서 엄마 노릇을 팽개친 여성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씀이시죠?

변 : 그렇죠. 우리 사회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면서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암묵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매우 강하죠.

퍼 :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서 겪은 어려움도 말씀해 주세요.

변 : 뒷바라지를 전혀 할 수 없는 학부모였어요. 애는 애대로 저는 저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죠. 큰 애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나는 모르는 사이에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거죠. 엄마의 뒷받침을 못 받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왕따가 된다더군요. 어느 날 친분이 있는 아이 친구의 엄마가 “‘웬만한 집’에서 왜 그렇게 애 관리를 안 하느냐, 애 옷 좀 잘 입혀라. 애가 옷을 잘 안 입어서 애들 사이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충고하기도 했죠.

퍼 : 속상하셨겠어요.

변 :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우리 아이가 무슨 준비물을 안 가지고 가서 11시부터 교실 뒤에서 벌을 섰는데, 선생님이 그걸 까먹고 애를 세워둔 채로 점심시간이 지나버린 거예요.

퍼 : 아이 점심은요?

변 : 굶은 거죠. 애가 굶는 것도 모르고 벌을 세운 거예요.

퍼 : 큰 사건인데요. 인터넷에 오르내릴만한.

변 : 그럼요, 너무 큰 사건이죠. 그때 제가 문제제기를 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학교를 다 뒤집어 놓을 각오가 아니면 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결국은 제가 편지를 써서 이야기 전달했더니 벌주었던 담임선생님은 “어머, 밥을 못먹었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넘어가더군요.

퍼 : 더 항의하지는 않으셨나요?

변 : 그때 제 지인들 중에는 비슷한 일을 학교에서 당해서 교육청에 민원을 넣어 학교를 다 뒤집어 놓은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왠지 그렇게는 못하겠더군요. 제 남편이 옆에서 ‘남의 일은 열심히 싸워주면서 왜 자식 일에는 나서지 않느냐’고 했었죠.

퍼 : 학생 인권 문제였는데도요.

변 : 네. 스스로 분석해 봐야할 문제인데, 그때는 그렇게 나서는 게 왠지 내 개인적인 이권을 위한 것 같기도 하고, 바깥 일이 너무 많다보니 싸울 에너지도 부족했던 거죠. 아이들이 ‘엄마는 모순적’이라고 해요.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하면서 집에서는 ‘너희들이 참으라’고 한다고. 그런 건 엄마가 말하는 ‘페미니스트 실천’이 아니지 않냐고요.

퍼 : 자녀분들이 서운하겠어요.

변 : 서운할 거예요. 또 제가 늘 페미니스트로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모순되기도 하죠. 생각해보면 제 안에 모순적인 논리들이 혼재되어 있어요.

퍼 : 치맛바람 일으키는 학부모처럼 보이기 싫으셨던 거 아닌가요?

변 : 어릴 때부터 유교에서 가정이 잘 돼야 다 잘 된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논리를 무척 싫어했어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집단의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런데 다른 한편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모토와 상통하는 면도 있는 거고, 가정이 사회적 변화의 거점으로 중요하기도 하고.

퍼 : 유교적 가치관이 강한 집안에서 자라셨나 봐요.

변 : 제가 종갓집 딸이거든요. 저희 외가가 정읍의 이름난 종갓집이고, 저희 외갓집은 문화재일 정도랍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러니까 종부의 딸인 거죠.


여성학과로 간 ‘명예 남성’

퍼 : 종갓집 시댁에 종갓집 따님이라니 생각도 못 한 반전이네요. 가부장에 반기를 드는 페미니스트가 되신 과정이 궁금해요.

변 : 제가 고려대 83학번 운동권이었죠. 대학 때는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퍼 : 전공은?

변 : 심리학과였죠. 사회과학 서클에서 활동했고, 여성성을 삭제당한 채로 살았어요. 막걸리 마시고, 담배 피우고.

퍼 : 그런 걸 ‘명예 남성’이라고 하죠?

변 : 그렇죠. ‘명예 남성’으로 제가 여성이라는 자의식이 전혀 없이 남자 동료들과 똑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제가 농활을 가서 성추행 사건이 있었던 거예요.

퍼 : 주민들이요? 아니면 학생들끼리?

변 : 학생들이죠. 내가 피해자였어요. 농활을 가서 숙소에서 자는데, 그땐 혼숙이 너무 당연했어요. 성별 구분해서 자는 게 오히려 더 우스운 때였죠. 그런데 내 옆에서 자던 남자선배가 자면서 나를 만진 거예요. 나는 성추행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상대가 내 몸을 만지는데, ‘어, 이 사람이 왜 그래? 이게 뭐지?’ 싶었죠.

퍼 : 성적인 의미가 있는 행동인지 알고 계셨나요?

변 : 전혀 몰랐어요. 그런 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무성적인 존재였다니까요. 연애에도 관심 없고. 80년대 엄혹하던 시절이라 그 당시엔 연애라는 것도 없고, 연애하는 건 시대적으로 부끄러운 거고, 동지적 관계만이 존재하는 시대였죠.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그 선배랑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제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하게, ‘어 선배 잘 잤어?’ 하고 오버액션할 정도였어요.

퍼 : 스스로 없었던 일로 하려고 하셨던 거네요.

변 : 네, 없었던 일처럼 하기 위해 내가 일부러 상황을 연출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그 형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그냥 그렇게 끝났어요. 아마 그 선배는 기억도 못할 거예요.

퍼 : 그게 성추행이었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인가요?

변 : 무성적 존재로 살다가, 어느 날 제가 사회과학 서클을 그만두는 사건이 생겼어요. 저희 집이 좀 잘 살았거든요. 저희 아버지 직장이 고려대 근처라 출근하시면서 항상 저를 학교까지 승용차로 태워주셨는데, 서클 선배가 그걸 보고는 저를 마구 비판한 거예요.

퍼 : 뭐라고요?

변 : 그땐, 대학 졸업하면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로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였는데, 너는 자본가의 딸인 네 성분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차를 타고 다닐 수가 있느냐. 너는 쁘띠 부르주아다. 이런 식으로 저를 너무 괴롭혔어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퍼 : 어차피 차가 오는 거니까요.

변 : 그렇죠. 같은 곳으로 오는 사람들이 같은 차를 타고 오는 일이 왜 잘못됐다는 건지. 내가 다른 걸 타고 오면 오히려 낭비 아닌가요? 이런 운동은 내 정체성을 숨겨야만 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서클 활동을 다 정리했죠.

퍼 : 열심히 하던 활동을 접을 정도로 심경의 변화가 크셨나 봐요.

변 : 그래서 4학년 2학기에는 올A를 받을 정도로 심리학 공부를 열심히 했고, 심리학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기도 했었어요.

퍼 : 어디로요?

변 : 입학 허가를 받은 대학은 독일 베를린 대학이었죠. 사회심리학을 전공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못 갔어요,

퍼 : 왜죠?

변 : 그때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사회 분위기도 많이 변화해서, ‘꼭 유학을 가야 하나’, 결정을 주저하고 있었죠. 저를 비판했던 선배의 물음도 여전히 마음에 무겁게 남아있었거든요.

퍼 : 네.

변 : 또 당시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시작했고, 집에서 유학은 결혼하고 가라 말리기도 하셨고요. 주저하던 차에, 누군가가 이대 여성학과에서 너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있는데 한 번 가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어요.

퍼 : 아무런 계기도 없이, 갑자기 여성학을요?

변 : 제가 여성성을 삭제 당하고 살았던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주 없지는 않았거든요. 당시에 이대 여성학과라고 하면, 여성 문제에 관심 있는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과였어요. 권유 받은 바로 다음 날이 원서 제출 마감이었는데, 그냥 내 보지 뭐, 하고 냈죠. 열흘 후에 시험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가 쓸 수 있는 문제만 나왔어요. 만약 떨어졌으면 유학을 갔겠죠.

퍼 : 당시 저희 대학생들은 ‘여성학’이 섹슈얼리티 문제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서 ‘성매매’, ‘성폭력’같은 사회 문제에는 발언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들고 나오셨어요. 그건 어떻게 가능했나요?

변 : 석사 논문을 쓸 때, ‘한국 성폭력 상담소(http://www.sisters.or.kr)’가 생겨났어요. 이대 여성학과 사람들이 상담소를 만들었기 때문에, 선후배들이 다 발기인이 되었죠. 성폭력에 대해서는 당위적으로만, 생각하면서 거기에 참여하게 되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섹슈얼리티에 관심을 갖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퍼 : 성폭력 문제에도 우연히 관여하게 되신 거네요.

변 : 저는 원래 일 귀신이거든요. 일을 굉장히 잘 해요. 성폭력 상담소도 처음에는 단지 ‘일’로 시작을 한 거죠.

퍼 : 상담소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변 : 많은 일이요.(웃음) 가령 당시 상담소가 돈이 없고, 국가 지원도 못 받을 때여서 규모가 큰 디너쇼를 기획해 인맥이란 인맥은 다 동원하여 몇 천만 원을 벌어들인 적도 있어요. 물론 비판도 많았죠. 그런데 저는 NGO가 살려면 개인 후원으로 조금씩 버는 걸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퍼 : ‘일중독’이라는 선생님 소개가 있던데, 사업가 기질이 있으신가 봐요.

변 : 성폭력 예방에 관한 비디오, 브로슈어, 자료 글을 번역하여 한국식으로 만드는 일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후회해요. 성폭력에 대한 이해와 사유 없이, 단순히 벤치마킹해서 만들었던 일들을 지금은 비판하고 있어요.

퍼 : 한국 실정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변 : 그렇죠. 외국 비디오를 보고 ‘필링 노 필링 예스’라는 말을 ‘좋은 느낌, 나쁜 느낌’이라는 말로 만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쁜 느낌’일 때 ‘싫어요’라고 말해요>라는 교육이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아요.

퍼 : 요즘 성교육에선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를 아예 외우도록 가르치던데요.

변 : 맞아요. 그런데 그런 기계적인 교육이 문제가 많아요. 가해자 앞에서 ‘싫어요’라고 말해서 더 위험해질 수도 있고, 말해도 우리나라 어른들은 일단 아이의 말을 무시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퍼 : 그렇죠.

변 : 그런 지침은 외국에서 아동 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좀 생겨난 후에 가능한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고 봐요. 아직도 과거의 자료들이 명맥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 제가 문제제기 많이 했죠. 없는 것보다 낫지만 근본적인 성폭력 예방 정책이 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섹슈얼리티 전문가로 ‘변태’

퍼 : 출발은 단지 ‘일’이셨는데, 주관심사가 섹슈얼리티로 옮아간 계기가 있으셨나요?

변 :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상담소를 나오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생겼어요.

퍼 : 갈등이 있으셨나요?

변 : 제가 상담소 소식지인 ‘나눔터’에 이런 글을 썼어요. ‘어린이 성폭력의 예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아이들이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확대되는데, 위험을 강조하고 조심할 것을 요구하는 성폭력 예방 교육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축소시키고 성적 성장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얘기였어요. 그 글을 쓰고 나서 너무나 많은 비판을 받았어요.

퍼 : 그건 지금 듣기에도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오르셨어요?

변 : 어느 날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예방 교육을 갔는데, 어떤 교장 선생님이 저에게 ‘성’에 관한 이야기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자꾸 ‘성’ 이야기를 하면 애들이 따라한다고. 성교육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모델링 효과를 가져온다는 거죠.

퍼 : 저도 학교에서 성교육을 고민하다보면 그런 지점이 참 어려워요.

변 : 고민이 되더군요. 나는 이 교육을 해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따라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유로 성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은 이런 식의 접근은 오히려 성 담론 자체를 위축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결론에 다다른 거죠.

퍼 : 성의 ‘폭력성’만을 강조하다보면 오히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더욱 축소시킬 수 있죠.

변 : 그러면서 갑자기 내 옛날에 대한 기억이 마구 돋아나기 시작한 거예요. 한 번도 그 경험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고 한 번도 반추하지 않았던 내 경험들이.

퍼 : 대학생 시절의 일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신 거네요.

변 : 그렇죠.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내가 성폭력 개념을 교육 받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때 저에게는 성에 대한 관념이나 욕망이 전혀 없었던 거거든요. 우리 부모님은 통금 시간을 설정하신 적도 없고 남자를 조심하라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저는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선배들하고 연애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배들 앞에서 여성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않은 거죠. 남자를 조심한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퍼 : 아예 몰랐을 때 오히려 자유로우셨다는 거죠.

변 : 이런 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명예 남성’에 불과했다고 비판받을 수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바람직한 남녀관계를 맺어 왔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 경계는 매우 모호하죠. 이런 사람에게 갑자기 성폭력 개념을 가르치고 남자가 위험하다고 이야기하면, 잘 지내다가 갑자기 위축되겠죠.

퍼 : 그 이후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셨나요?

변 : 네. 95년 상담소에서 그 글을 쓰고 엄청난 비판을 듣고 깨지고 나서, 96년부터 2000년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한 공부예요. 내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들이 필요했거든요.

퍼 : 진짜 여성학 공부는 그때 시작하신 거네요.

변 :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사실 제가 83학번이고, 사회과학 서클활동을 한 사람이다 보니, 서클활동을 다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의 시대적 무게감, 이념의 무게감을 계속 안고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무게감을 떨쳐버리고 자유로움을 획득하게 된 것은 섹슈얼리티 공부를 하면서부터예요.

퍼 :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되었군요.

변 : 섹슈얼리티 공부는 그 당시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라 처음에는 너무나 힘들었어요. 보이지 않게 저를 지배했던 386의 패러다임과 완전히 충돌한 거죠. 그래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치질에 걸렸어요.

퍼 : 스트레스로 치질까지 걸리셨다구요?

변 : 네, 몸이 여기저기가 마구 아프면서 머리의 고통, 심리적 고통이 몸의 변형 과정을 가져왔는지 저 자신이 굉장히 많이 변하더군요. 그동안 여성학 연구자로서 고민하고 부딪혀왔지만 저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이 몸의 변화를 겪으면서 제 사고 구조를 완전히 재구성하게 됐어요.

퍼 :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변 : 저는 공부를 잘한다는 여자들이 갖는 잘난 척, 자신만만, 이걸 가지고 있었어요. ‘공부 잘하는 여자’의 전형은 연애, 남자에 거리두기를 하면서 굉장히 꼿꼿한 자아를 가졌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런데 그 꼿꼿했던 자아가 다 깨진 거예요.

퍼 : 보통 대학 신입생 시절에 사회과학을 접하면서도 한 번 깨지잖아요?

변 :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여성 정체성의 고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제 계급성만 가지고 깨졌던 거라면 한 번 더 젠더 정체성을 가지고 깨진 거예요. 이렇게 삶을 재해석하다 보니, 제가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도 다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가 연관되어 있더군요.

퍼 :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변 : 시작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예요. 제가 자세가 좋지 않아서 삐딱하게 앉아서 시험을 봤는데, 그때 제 뒷자리 친구가 제 답안지를 다 베끼고 있었나 봐요. 그걸 안 선생님이, 출석부로 저를 열 대를 때린 거예요.

퍼 : 자세 똑바로 하라고요?

변 : 아뇨, 내가 일부러 보여줬다고. 너무 억울했죠.

퍼 : 앞뒤 상황을 파악하지도 않고 학생을 때리다니, 너무하네요.

변 : 그런데 고3 담임으로 그 때렸던 선생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하고 소통하는 걸 거부하면서 공부를 아예 놓아버렸죠. 그렇게 시험을 봤으니 학력고사를 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담임 선생이 너는 재수해서 서울대 가야 한다고 제가 가겠다는 고려대 원서를 안 써주겠다는 거예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퍼 : 기가 막히셨겠어요.

변 : 그래서 그동안에는 자존심 때문에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제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면서 울었죠. 울면서 다 얘기했어요. 다 당신 때문이라고. 그런데 담임선생이 몰랐다고 사과하면서, ‘나는 네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네가 연애하느라 그런 줄 알았다.’고 하는 거예요.

퍼 : 실제로 연애하셨어요?

변 : 아뇨. 그냥 친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내가 공부 안 한 원인을 연애와 관계시켜서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너무 자존심 상했어요. 그 일로 저는 그 선생과 소통을 완전히 끊어버렸어요. 그땐 저에게 심각한 충격이었고 그 선생을 혐오할 만한 거였어요.

퍼 : 아까 말씀하신 ‘꼿꼿한 자아’가 발동한 거네요.

변 : 예, 바로 그 자아를 다시 성찰하게 된 거죠. 그리고 제가 대학교 때 왜 연애를 안 했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니까, 고등학교의 일이 트라우마였던 거예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까지 남자애들하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도 연애를 안 했던 거더라구요.

퍼 : 남편분 만나기 전에는 연애를 전혀 안 하셨어요?

변 : 아뇨, 그러던 중에 운동권 총학생회 사람하고 알게 됐는데 그 사람이 술 먹고 우리 집에 데려다 주는 길가에서 강제로 키스를 한 거예요.

퍼 : 성추행이잖아요?

변 : 지금 생각하면 추행이지만 추행이라는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는? 연애의 시작이죠. 그래서 그 사람하고 사귄 게 첫 연애예요. 문제의식이 없었죠. 연애라는 걸 하면서, 이렇게 강제로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은 조금 있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았던 거예요. 이런 게 다 돌아보니 섹슈얼리티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더군요.


섹슈얼리티는 유쾌하다.

퍼 : 선생님의 삶부터 재해석하기 시작하신 거네요. 저는, 99년쯤에 <섹슈얼리티 강의>*를 읽고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됐어요.

* <섹슈얼리티 강의> 책 보러 가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4064&partner=egloos

변 : 그때가 클라이맥스였죠. 대학 학내가 성폭력 문제로 들썩거릴 때고, 학교마다 다들 성폭력 근절 학칙을 제정하고, 지금 있는 성폭력 담론의 밑바탕이 다 그때 생겨난 거예요.

퍼 : 저희 학교도 처음으로 성폭력 사건 가해자의 공개 사과 대자보가 붙고, 이에 대한 인권침해 논쟁이 일어나던 때였어요. 그때 세운 중요한 원칙이 ‘피해자 중심주의’였죠.

변 : 가해자의 의도보다 피해자가 느낀 피해가 중요하다.

퍼 : 그런데 여러 가지의 성폭력 사건이 공개되면서 사건 해결 주체로 나서는 페미니스트들도 ‘성폭력’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점점 어려워졌어요. ‘피해자 중심주의’의 대 원칙도 흔들릴 때가 있었구요. 그때 선생님의 책에서 ‘성폭력은 관계의 연속선상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하셔서 큰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 나요.

변 : 제 경험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내가 나의 성폭력 사건을 언제 성폭력으로 인지하게 되었는가를 돌아봤죠. 그리고 과연 내가 소위 ‘피해자’ 담론에 맞는 사람인가 생각해봤어요.

퍼 : 선생님은 당시에 그 일을 피해라고 느끼시지 않았던 거죠.

변 : 물론, 아주 치명적인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내가 그 당시 ‘명예남성’이었기 때문에 내 가슴은 ‘가슴’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가슴을 성애화된 것으로 인지하느냐에 따라서 성적 피해의 정도는 매우 다르다, 성폭력 개념과 피해자 개념은 하나의 잣대로 들이댈 수 없다는 거죠. **

** <‘피해자 중심주의’ 새롭게 고민하자> 관련 기사 읽기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1713&section=sc1&section2=성폭력

퍼 : 이번에 엮어 내신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에서 인상적인 점. 진보적인 활동가들도 자기 아이를 키우면서는 여러 관념이 보수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은 오히려 반대이시더군요. 성 문제에 관한 한 자녀에게 ‘10대도 섹스할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나요?

변 : 글쎄요, 저도 고민해요. 다리 벌리고 앉아서 치마 안 속옷이 보이면, 저걸 어째야 하나, 고민하죠. 아까 제가 통화하는 걸 보셨듯이, 저희 딸애도, 지금 영국에 가디언도 없이 혼자 있어 걱정이 되는데, 아이가 오히려 ‘엄마는 왜 나를 불신해? 엄마 너무 웃겨. 나한테는 한비야 책을 권하면서 세계를 다니라고 하면서? 그러는 것도 젠더 고정관념 아니야? 엄마가 자꾸 그러니까 사회 문제가 고착화되는 거야.’라고 해요.

퍼 : 따님이 이미 선생님의 언어에 매우 익숙한가 봐요.

변 : 네, 우리 딸애는 제가 일하던 성폭력 상담소에서 상근하는 언니들하고 자주 같이 지냈고, 방학이면 같이 상담소에서 개최하는 캠프에 다니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자기주장도 강하고 이런 담론에 아주 익숙해요.

퍼 : 선생님이 바쁘신 대신 상담소 언니들이 멘토 노릇을 톡톡히 했군요.

변 : 그렇죠. 그런데 딸이 자라나면서, 중학교 때까진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었는데, 고등학교에서 딱 부딪치는 거예요. 아이들로부터 ‘트랜스 젠더’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갔다가 포스터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학교와 굉장히 크게 부딪쳤어요.

퍼 : 책에 언급했던 사건 말씀이시죠? 영화 ‘작업의 정석’ 포스터를 패러디한 선거 홍보물을 만들었다고 강제로 철거당했다는.

변 : 예, 제가 보기엔 전혀 선정적이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매우 부당하게 아이를 대했다고 생각했어요. 편지를 써 들고 학교를 찾아갔는데 오히려 문제를 키운 꼴이 되었어요. 남편은 제게 책임지라고 애를 망쳤다고도 말하지만, 이게 뭐 저의 개인적인 문제인가요? 이 사회가 자연스런 10대들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문제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퍼 : 따님을 남다르게 키우신 것이 후회되지는 않으셨나요?

변 : 너무 많은 걸 가르쳐줬다 싶어서 후회할 때도 있었어요. 나이에 맞게, 몰라도 되는 것은 넘어갈 것을 그랬나, 하고요.

퍼 : 예를 들자면?

변 :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엄마, 술 먹어도 돼?” 하길래 “응, 먹어봐” 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온 거예요. 옥상에서 애들하고 술 먹다가 뻗어 있다고 남자애가 전화를 했더라구요. 가슴이 덜컥 했죠. 바로 성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요? 다행히 그 남자애가 착한 애여서 집으로 연락을 했던 거죠.

퍼 : 큰일 날 뻔 했네요.

변 : 그럼요. 그 이후로 아이에게 잔소리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갈등이 시작됐죠. 딸애는 ‘왜 갑자기 나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느냐’고 하고, 나는 “맞다, 이런 나의 간섭이 네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데 장애가 될 거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때 맞게 될 여러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냐.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나도 딜레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퍼 : 아직까지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으셨나요?

변 : 대체로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이 성문제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가 별로 남자를 좋아하지는 않더라구요. 만약 남자를 좋아한다면 사고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면의 문제는 없어서 제가 그러죠. “너 섹스는 왜 안 하니? 너는 정말 섹스 빼고는 다 하는구나”. 그랬더니 아이가 섹스 너무 싫대요. 엄마 아빠가 한다는 상상만 해도 너무 싫대요. 사실은 아이의 이런 면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고민이 돼요.

퍼 : 결국 한국에서 교육을 시키지 않으시기로 결정하셨구요.

변 : 예, 아이가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니기 싫다고 해서, 결국은 자퇴를 시키고 영국으로 보냈어요. 속상하기도 했고,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될까봐 저도 고민을 했지만, 아이가 원하는 교육을 시켜줄 수밖에 없더군요. 저희 집이 다행히 경제적으로 해줄 수 있는 환경이 되었구요.

퍼 : 요즘은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 센터’(http://www.sexuality.or.kr/)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변 : 섹슈얼리티의 위험성만을 강조하는 담론에서 벗어나서 유쾌하게,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자는 거죠. 저는 제 활동들이 너무 재미있어요. 이게 저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하는 거지 어떤 이데올로기로서 하는 건 아니에요.

퍼 : 옆에서 보기에도 즐거워 보이세요. ‘재미있다’, ‘즐겁다’는 말을 많이 하시고요.

변 : 그럼요. 저는 앞으로 시민운동도 이데올로기나 이념보다는 자기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똑똑한 젊은 친구들이 페미니즘 다 공부해놓고 왜 활동을 못 하나요. 돈이 안 돼서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NGO나 시민운동은 투잡 개념으로 접근하자는 게 제가 늘 하는 얘기에요.

퍼 : 생계 수단은 다른 것으로 하고, 사회운동은 자아를 실현하는 활동으로 하자는 말씀이신가요?

변 : 그렇죠.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물론 시민운동으로 생계를 해결하면 더 좋지요. 그렇지만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멋쟁이도 많아요. 누리고 싶은 문화 활동이 있고 자기 스타일이 있고 여행도 많이 즐기거든요. 그러려면 허리 졸라매는 과거의 운동 스타일로는 안 되죠. 저희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 중에는 보험회사 다니면서, 저녁에는 저희 활동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행복하면 된 거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즐거움을 전파하고요. 물론 이런 삶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퍼 : 구금 시설의 청소년들도 만나신다고요.

변 : 예.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 센터’에서 구금 시설의 청소년들에게 인문 강좌를 하는 프로젝트를 맡아서, 그 아이들을 만났죠.

퍼 : 특수한 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일 텐데요.

변 : 무척 강하고, 또 똑똑한 아이들이에요. 제가 ‘너희와 다른 애들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선생님, 저희는 너무 강해요.’ 그래요. 제가 ‘어머, 너무 좋겠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사회는 이런 저희를 너무 싫어해요.’

퍼 : 자신들의 모순된 상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네요.

변 : 아, 그 말을 듣고 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아이들과 만나면서 90년대 후반에 섹슈얼리티를 공부하면서 얻은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성찰을 얻었어요. 이 아이들의 훌륭한 에너지를 어떻게 발현시킬 수 있을까 싶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취직도 물어봤었어요. 그런데, 그들도 꺼리더군요.

퍼 : 위험하다고 생각하시겠죠.

변 : 그렇죠, 데리고 일하기에는 버겁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회적 편견이죠. 저는 그 아이들과 부딪치고, 만나고, 일 대 일 면접을 하면서, 구금 시설 청소년들이 가진 특별한 면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이렇게 강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자신들의 강함을 알고 있고 사회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선택을 할까 생각해봤어요.

퍼 : 자신의 강함을 포기하지 않을까요?

변 : 그렇죠. 아마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선택하겠죠.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아이들도 그걸 알고 있어요. 아이들 사연을 하나하나 소개하자면 끝도 없지요. 저는 요즘도 이 아이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퍼 : 선생님께서 사회 활동을 많이 하시는 남다른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변 : 재밌으니까요. 이게 정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그 아이들과 만나고 오면 너무너무 흥분이 돼요.

퍼 : 대학 사회가 답답하진 않으세요?

변 : 아유 그 얘기 하자면 끝도 없죠. 그 이야기는 죽을 때쯤, 다 하고 죽을 거예요. 그 얘긴 너무 기니까 생략!

퍼 : 교사들, 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한 마디씩만 해주세요.

변 : 너무 많은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은 모두 다르니 개성과 특성, 차이를 좀 인정해 주십사 하는 거예요. 부모들도, 다른 아이와 우리 아이가 다른 점, 특성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마시고. 특수함을 좀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키울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 보자는 거 말씀드리고 싶어요.

퍼 : 10대들에게는요?

변 : 친구들하고 많이 놀고 많이 먹고 많이 자라, 정말 하고 싶은 거 많이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것의 결과가 우리 사회에서는 사고나 비행으로 말해지잖아요, 그러니 그걸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이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10대 아이를 둔 엄마로서 10대들의 ‘유쾌한 섹슈얼리티’를 말하고, 종갓집 며느리이자 딸로서 ‘가부장 권력’이 여성의 삶을 억압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골치 아픈 것이 싫어서 이런 모순된 상황 속에서 쉽게 양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모순에 너무나 예민한 나머지 우울과 비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변혜정 선생님이 하고 있는 일은 세상의 거의 모든 편견 - 성별, 나이, 성 정체성, 학벌, 계층 등 - 에 도전하는 일인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활동은 끝나지 않을 허들 경주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고 변 선생님은 “나중에 술 한 잔 하며 더 깊은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하셨다. “지금이야 쉽게 말하지만, 살아오면서 어찌 쉽기만 했겠냐”며. 끝없는 장애물들을 바라보며 ‘즐겁다’ 말하는 원천 에너지를 전수받을 수 있는, 유쾌한 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 자리는 언제든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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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마지막에 소개해 준 세 편의 시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  황지우, '뼈아픈 후회' / 마종기, '3. 대화'


사랑으로 나는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김정란의 시, 참 한구절 한구절 좋아하는 시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라는 말을 자꾸만 곱씹게 돼요. 아들인 세계 - 즉 내가 가꾸고 만들어 내는 세계, 그리고 지아비인 세계 - 싫어도 살아야 하는 곳으로서(이부분에서 다들 폭소)의 세계. 이런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해요. 이렇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구나. 그리고 나의 상처를 그저 겸손히, 세계와 함께 포개어 생각하면서, 아프고 불행한 세계를 함께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마종기 시인 참 좋아하지만 나는 이 '대화'라는 시를 보고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났던 어릴 적, 이미 어둠이 깔렸는데도 오시지 않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등불을 켜고 기다리면서 어둠과 빛은 경계가 없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죠.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는 그렇게 그냥 함께 있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어둠의 세계를 밝히는 등불은, 항상 밝게 타는 건 아니잖아요. 꺼지기도 하는거죠. 그렇지만 밝게 타오르도록 심지를 돋우고 꺼지지 않게 등불을 돌보는 건, 결국 자신이 아닌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꾸는 등불.

제가 해고가 되었잖아요? 옆에서 복직이 힘들거라고들 합니다. 솔직히 걱정도 돼요. 두렵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냥 이렇게 등불 밝히면서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요." 



>>>그러면서 이걸 읽어주었다. 엠비씨 노조 카페에 올렸다는 글


빛과 어둠에 대하여

 그러니까 어린 날, 꼭 이맘때였습니다.
들일 나간 부모님은 사방(四方)이 캄캄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당신들은, 손에 잡은 연장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만 일하자, 분명 그러셨을 것입니다.

 예닐곱 살 저는 서둘러 남포등에 불을 켜 툇마루 기둥에 걸었습니다. 어둠이 무서워서였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곤 마루 끝에 서서, 마당과 울타리, 또 그 너머 골목 쪽을 두렵게 바라보았습니다. 등(燈)빛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마당도 채 밝히지 못했습니다.
 어둠은, 스무 발작도 안 되는 마당 끝에 짐승처럼 산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제가 건 등(燈)은 고작 작은 빛의 동심원을 기둥 주위에 그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빛은 어둠에 갇혀 있었고, 아이는 또 빛에 갇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빛 밖으로, 그 어둠속으로 한 발작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빛과 어둠의 경계는, 넘기 힘든 공포(恐怖)의 선(線)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등(燈)빛 밖으로 조금씩 발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빛과 어둠의 구별이라는 게 사실은 아주 작은 차이이며, 그 경계를 넘는 것 또한 한 순간의 두려움일 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빛 속에서 보는 어둠, 어둠 속에서 보는 빛. 빛도 하나의 어둠이고, 어둠도 또 하나 빛의 세계입니다. 부모님은 어두운 밭이랑을 오가며, 칠흑(漆黑)속에서 한참을 더 일하고 돌아오셨습니다.

 조합위원장인 제가 결국 해고(解雇)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조합에 짐이 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담담하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나아가고자 합니다.
 어둡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어린 시절을 결코 상처로 기억하지 않듯, 이 시절의 많은 것들도 훗날 행복하게 추억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6.10   이근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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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조세희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러 갔을 때, 조세희 선생님은 '빵과 장미'의 이야기를 해 주시며 이제 여러분에게 '빨간 장미 한 다발'씩을 안겨주겠노라고. 희망을 안고 살으라고 하셨었는데, 이근행 위원장은 등불 하나 밝혀 주었다. 내가 심지 돋우고 기름 갈아주어야 할 등불. 




>>> 그리고 강연에서의 말,말,말,


"입사 면접 당시, 중앙일보에서는 3당 합당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내 양심대로 대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입사하기위해 거짓말할 것인가 갈등하다가 대답했다. '구국의 결단이라고 생각하며,,, 갈등보다는 화합이 필요한 시국이고...' 결국 떨어졌다. MBC 면접을 보러 갔을 때에는 전교조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선생님들의 정당한 사회적 실천이며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고는 그냥 나와버렸다. 그런데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제로 나도 사범대 출신이고, 교육학과를 나와 잠시 교사 노릇을 한 적도 있다. 아내도 교사다. 그래서 전교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방어하는 편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역부족이다. 현실에 대한 대안을 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론운동도 사실 다 죽었다. 동아일보의 '동아투위' 사건이라든지 하는 역사가 기억하는 기자들의 사회적 실천은 이제 다 옛날 얘기다. 현재 언론은 찌라시지 신문이 아니다.  신채호, 박은식이 있던 황성신문으로부터 시작된 '기자'라는 명예,도 이젠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기자는 이제 없다. 기자들이 앞서서 현실에 영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호위대다. MBC를 운영하는 방문진이나 KBS이사회 모두 최시중이 임명하는 거다. 이젠 둘 다 국영방송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손석희씨는 까칠하다. 까칠하다. 냉랭하고, 까칠하다. 정말 까칠한 사람이다. 신경민도 그렇다. 까칠한 사람이다. 사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거다. '정권도 바뀌었는데 꼭 그런말을 하고 살아야 하나'.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짤렸지만 더 행복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87년에 시청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나, 2010년에 시청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 모두 다 삽시간에 모였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87년의 사람들은? 많이들 변절하고, 방향성을 상실했다. 2010년의 젊은이들은? 에너지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들이 지도와 나침반만 제대로 갖게 된다면? 아마 큰 일이 벌어질 것 같다. 386들이 젊은 세대에 대해 비난하는 걸 자주 보는데, 흉볼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 젊은이들이 더 나을 수 있다."

"386들이 욕먹는 이유는 무식하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이념의 지도를 고수하면서, 여기에 따라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이제 한계가 있다. 이런 진보는 죽은 진보다. 이제 오늘날 운동은 제 자리에서 제 역할 다 하는 것이다. 무한도전 김태호를 보라. 이 사람이 어디 운동하게 생겼나? 그런데 자기 프로그램을 KBS파업현장을 배경으로 찍고 그러는 사람이다. 이제 희생/명분/국가 이런 무거운 운동의 시대는 갔다.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서의 운동, 행복한 운동, 즐거운 운동이 필요하다."

"이런 젊은이들, 다 누가 만들어냈나? 나는 이것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교사들이라고 본다. 교사들 너무나 중요하다. 부모는 못하는 일을 교사들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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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화'

카테고리 없음 2010. 10. 25. 16:12



3. 대화 

마종기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지성사,1980)-


금요일, 해직된 MBC 노조위원장 이근행 씨의 강연에서 소개받은 시.
세 개의 시를 소개받았는데 다 참 좋았다.
그 중에서도 세번째 시.

아, 이 시는 눈물이 나서,
앞으로도 평생,
낭독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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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반짝이는 맑은 날
인천
바다냄새 섞인 부드러운 바람

맥아더의 귀신들이 지금도 진을 치고 있는 자유공원
전원주택처럼 '작정하고 예쁘게' 지은 집들
100년 동안 사연이 쌓이고 쌓였을 오래된 집들, 골목들, 교회들
'명동백작'이나 '경성스캔들' 같은 드라마에서 튀어나올 법한 오래된 가게들
삐까뻔쩍하지만 텅 비어 있는 아트플랫폼의 이물감
뻥 좀 쳐서 수백명이 먹으려고 줄 서 있던 신포시장 닭강정
스테인드글라스가, 저렇게 예쁜 거였나? 싶었던 답동성당
텅빈 골목과 가로등의 불빛과 그림자의 아름다움
벽에 붙여진 전단지, 안내문, 간판 하나하나가 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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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골목길'의 아름다움을 그린 지식채널E 영상.
'서울, 골목길 풍경'이라는 책도 읽어보고,
삼선동, 한남동, 이태원동, 북아현동, 서계동,,,, 하는 동네들도 다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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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카테고리 없음 2010. 10. 15. 00:31


목하 유행인 걷기 열풍 때문인지, 걷기에 참 좋은 요즘 날씨 때문인지,
나도 요즘 걷기에 푹 빠져서 자주 걷고 있다.

월요일엔 어른이 밥을 사주시는 자리에 가서 고기를 너무 많이 집어먹은 것 같아서
전철을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집까지 걸어왔는데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뭔가 기력이 남는 느낌이라 바로 옷을 갈아 입고 동네 초등학교로 나가 한참 또 걷다 왔다.

수요일에도 전철을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집까지 걸어왔고,
뭔가 미진한 느낌이었지만 너무 늦어서 그냥 쉬었다.

오늘(목요일)은 같은 방향에 사시는 선생님이 차로 데려다주셨는데
늘 데려다주시는 지점인, 집보다 세 정거장 전에 내려주셔서,
내친김에 거기서부터도 한번 걸어봤다.

걷다 보면, 
처음에는 자세가 제대로 안 잡혀서 이렇게 저렇게 자세를 조금씩 바꾸면서 걷는다.
그러다가 가장 편안하고 효율적인 자세를 찾게 된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어깨를 내리고, 허리와 목을 잘 세우고, 
그리고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걷는 것이다.
편안하고 효율적인 자세를 찾게 되면 속도가 붙는다.
걷다보면 점점 더 다리가 가벼워진다.
조금 있으면 땀도 난다. 
흥얼흥얼거리면서 걷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 
버스 두세 정거장 정도 되는 한적한 거리를 혼자 걸어서 등하교를 했었는데,
그때도, 타박타박 걸으며 노래를 불렀었다.
아는 노래란 노래는 모두 다, 큰소리로, 부르며 학교에 갔었다. 
그럼 지루하지 않았다.
무서운 걸 참거나, 지루한 걸 참을 때 지금도 나는 노래를 하나씩 부르곤 한다.

오늘은, 학교에서 있었던 켕기는 일들, 마음 쓰이는 일들을 생각하다보니 
절로 가락을 붙여 이렇게 흥얼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
"알게 뭐야~ 알게 뭐야~ 됐다 그래~ 됐다 그래~♪" 

걷다 보면 나처럼 걸어서 집에 가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앞에서 저만치 걷는 사람을 친구 삼아 걷고 있었는데, 먼저 다른 골목으로 빠지는 걸 보면서 인사를 하기도 하고.
뒤에서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들으면서, 어떤 아가씨가 속도를 좀 내는군, 하면서 비켜주기도 하고. 
 
그렇게 타박타박 걷다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한 시간 걸렸다. 
무릎이 좀 아프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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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에게 복수하는 법'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를 만드신 최미경 감독님을 만나는 날.

학교서 늦게 끝나서, 너무 늦게 도착했어요. 그래서 안타깝게도 영화를 보는 귀중한 기회는 놓쳤습니다.

그렇지만 발랄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감독님의 말씀이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발언들을 좀 적어볼게요.


"함께 일하는 영화계 사람 중 하나가 코미디언 김지선을 두고 이런 말을 하더라.

'어휴, 애를 저렇게 많이 낳다니 김지선은 좀 밝히나봐' 

내가 기가 막혀서 그게 무슨 말이냐, 이건 언어적 성희롱이나 다름없다고 했더니

내가 처녀라서 그런다고 손가락질 하더라."


"내가 당했던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여자 친구들에게 큰 맘 먹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 걔 그럴 애가 아닌데'라고 하거나 그냥 듣고만 있더라.

나는 속으로 '나는 그럼 그럴 년인가?' 싶었다. 

같이 화내고 같이 싸우려 하지 않고 그냥 듣고만 있었던 친구들도 너무 서운했다."


"용서의 기준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가해자들은 스스로, '이만큼 했으니 됐다'고 결정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우리는, 자신이 입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서도, 스스로 자책을 먼저 하게 된다."


"사실 우리 여자들은 너무 약하게 자라서, 따귀도 제대로 때릴 줄 모른다.

가해자를 만나도 따귀 하나 제대로 못 때리는 경우도 많다.

내 충고는, '일단 가해자 만나자 마자 때리라'는 거다. 한참 이야기 나누다가는 도저히 때릴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성폭력 피해의 치유 과정에 대해, '치유'라는 말보다는 '성찰'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치유는 왠지 약한 느낌이라 싫다. 

무척 오래걸리는 과정이고, 물론 상처가 있고 그것이 아무는 과정이 일어나지만,

그런 시간도 다 나를 위한 경험이고, 시간이고, 나를 찾는 싸움의 과정이다.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찰하고, 성숙하고, 더 강해졌다."


무척 발랄하면서도 멋지고 씩씩한 기운이 전해지시나요?


아래 링크는 감독님 영화를 소개하고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궁금하신 분은 클릭해서 읽어보셔요~!! 


http://www2.mhj21.com/sub_read.html?uid=28032&section=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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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박'

카테고리 없음 2010. 10. 11. 01:59





비정규직은 어째서 사라져야 하는가
노동자는 어떻게 '노동자'가 되는가
여성노동자는 어떻게 이중 삼중으로 착취되는가
등을 매우 명료한 영화적 화법으로 말하는 수작 다큐멘터리.

그리고
훌륭한 연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무겁게 던지는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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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과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을 끝내고 연극 수업으로 간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정말, 매년 새로운 부분에 감동하게 되는 좋은 소설.
두번째 해가 되어서야 
소설 속 주인공이 처한 현실과 허생이 처한 현실을 교차시키고 삶의 자세와 방향을 고민하는 화자의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 왜냐선생님과 투사, 허생, 홍길동과 같은 인물들을 비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세번째인 올해엔 
주인공이 열망하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름붙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소설 전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대조적으로 드러나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이렇게 한 소설을 읽어내는데 오래 걸리는데 
학생들이 몇번의 수업과 시험 공부만으로 나와 똑같은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를 또 다시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구조화된 도표' 등등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적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이것을 피하려고 하고,
오히려 소설을 통해서 느껴야 하는 감동의 지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문제의식, 주제의식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려고 하는 편인데
이런 방법은, 모든 학생에게 보편적인 질의 내용으로 전달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

그리고 나 자체가 감성보다는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고,
소싯적에도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사람이라기보다는 
지식을 구조화해서 암기하고 적용하는 데 소질이 있었던 사람이니,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사람들보다는 위의 방법으로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 데 더 약할 수도 있다.

당신의 가르치는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던 한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읽어내려가면 애들 처져서 안 된다,는 말이 이번에 유난히 귀에 꽂혔던 것이나,
오늘의 이런 생각들이나, 다 차곡차곡 모아놓았다가
수업 방법을 개발하는 데에 써야한다는 생각.

당장 앞으로 다가올 '눈길'에서 어떻게 새롭게 해볼 것인지 좀 생각해봐야겠다.

연극수업도, 작년 재작년과 달리 리딩을 좀 적극적으로 지도해볼 생각.
1 배역을 먼저 정하도록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해보고 난 후 배역 정하도록 하기
2 장면 몇 가지를 선정해서 속마음 적어넣기 등으로 인물 심리 이해하기 수업을 하기
3 발표하기 전에 중간 깜짝 발표 시켜서 중간 점검하기.

이렇게 하는 게 시간을 좀더 절약할 수도 있겠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좀더 빨리 좀더 많이 전달할 수 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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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briel's Oboe

카테고리 없음 2010. 10. 10. 00:56






남자의 자격 이후로 '넬라 판타지아'가 뜨고 있지만
사라 브라이트만의 잘 다듬어진, 어딘지 럭셔리한 넬라 판타지아보다는
떠듬떠듬, 그런데도 어딘지 도도하게, 그러면서도 어루만지는 듯한
Gabriel's Oboe가 아무래도 더 훌륭한 것 같다. 

내 기억 속에선 저 장면에서부터 가브리엘이 죽 전곡을 불렀던 거였는데, 
다시 찾아보니 그렇지는 않네. 
그래도 아름다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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