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동안 고3 담임하느라 머리에 똥만 찼다,고 개탄하면서도
아예 머리가 똥이 되어버렸는지, 인권연수 준비하는 것도 이젠 조금 지치고, 재미없고, 그러던 와중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도 하고 연수에 들어갔다.
이틀 지난 후 감상은?

인권 만세다.
꾸준히 공부하고 싶어졌다.
반했어요, 인권.
이 마음,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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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연수 메모

<류은숙샘 강연중>

인권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오해하는 두 가지 함정 
1. Rights Talk
입만 열면 권리 타령인 기득권자들의 권세와 이익 추구와 인권은 다르다.
2. 인권무용론
인권이 밥주냐? 주거권이 있다지만 집을 주는 것도 아니지 않냐? 인권 그거 어따 써먹냐?는 논리
그러나 인권은 현금인출기가 아니다. 흥부가 박타는 것처럼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인권이라 믿고 있다가 안 나오면 무용론의 함정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인권은 '나의 인권을 존중받는 행동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힘'이고, 이것은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

인권의 원칙
인권인지 반인권인지 애정남처럼 가려줄 수 없다. 예/아니오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이 인권의 원칙이다.
물 먹을래 콜라 먹을래?라는 질문에 저는 오렌지주스가 좋아요라고 말한 어린이. 이런 대안을 발언하는 것이 인권
우리 사회가 벗어나서는 안 되는 궤도로 삼을 수 있는 원칙을 정하는 것이 인권이지
구체적으로 벌금이 얼마고 벌점이 얼마인지 규칙을 정하는 것이 인권은 아니다. 

가장 큰 원칙은 인간 존엄성 dignity의 토대에서 인권의 원칙과 가치를 쌓아올리는 것
존엄하다는 것은 우리말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귀하다'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이 존엄성
과거의 인권론은 하나님에서 시작했지만 현대 인권론은 오로지 인간존재(not 능력)에 기반
dignity라는 말은 인류 역사에서 잘 쓰이지 않아왔다. 왜? 존귀한 자는 드물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존엄성을 가진다.
개인의 성취와 업적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간가치를 매기지 말자는 것.

자유
서태지의 첫 광고 : 바쁜 스케쥴 사이로 벌러덩 누워 자유시간 먹으며 "자유가 별건가?" 외치던. 이거이거 소극적 자유
안치환의 노래 :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 이거이거 적극적 자유 그런데 부담스러워
그런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자유를 여기면 내가 얻는 것도 적어질 수밖에.
우리 사회에서의 자유 : 선택의 자유, 간섭받지 않을 자유 등. 요거 다 소극적 자유. 함정. 이것을 자유라고 이해하면 평등과 부딪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실은, 평등할수록 자유롭다, 평등할수록 다양해진다.

평등
노스페이스 계급 이슈의 대안은 학교에서 노스페이스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개성있게 입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결국 소극적 자유는 소극적 평등(기회의 평등)과 통하게 된다.
출발선을 조정한다는 기회의 평등 조치는 착시현상을 불러온다. - 이 사회의 경쟁의 룰은 공정하다는 착시현상.
그런데 아니다.
자기를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는 특정한 룰을 강조한다면? 요거야말로 중대한 간섭 아닌가. 
달리기 능력으로만 사람을 평가한다면? (아 이때 나도 정말 아찔했음)

연대
연대라는 이름은 교육과정에서 도통 찾아볼 수 없게된 이름.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며 도무지 겪어볼 수도 없게되어버린 것.
연대의 한자 의미는 끈.
미국에서 일어난 집단강간사건. 바로 옆방에 40명이 파티중이었고 사건을 인지했음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40명이 피해자를 돕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물을수도 없는 것이 간섭하지 말자는 논리
여기에 비해, 영국 다이애너비가 죽었을 때 사진만 찍고 달아났던 파파라치들을 두고 사마리아인법이 등장했던 것을 생각해봐야.
타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할 자유가 바로 연대.
그리고 이것이 적극적 자유.
연대는 패거리주의와 다르다.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연대. 그렇지 않으면 패거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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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주워들은 자료들

인권활동가이면서 화가인 댄 존스 (사랑방에 걸려있는 그림이 댄 존스 그림이라고)
영화 <붕대클럽>으로 하는 수업
(붕대클럽 영화보기, 영화학습지, 모둠활동(붕대클럽 사연받아 공감가는 사연에 대해 붕대감아 이미지 만들기, 해주고 싶은 이야기 쓰기), 사진 공유하기, 소감문 쓰기) - 동아리 축제 행사로 해보고 싶어졌음
토론시간에 '반론하기'만 해보기 (반론하고 싶은 사회적 주장들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장점이 ..)
책 <레알청춘> <이어달리기>
영상 <인간의 두 얼굴> <학교란 무엇인가-칭찬의 역효과>
영화 <세 얼간이> 
AND


'인권교육센터 들'의 '인권교육 나누기 곱하기 - 학생인권' 편.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 영화 <P짱은 내 친구>

1990년 일본의 한 실험적 수업을 영화화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한 선생님이 생명과 음식의 의미를 함께 배우고자 교실에서 돼지를 키웠다.
6학년 말, 학생들은 논쟁을 벌였다. 
우리가 한 해 동안 함께 키운 P짱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원래 목적대로 잡아 먹는다 (먹는 것도 기억하는 방식이다)
2 3학년 후배들에게 물려준다 (그나마 오래 살도록)
3 동물원이나 농장에 보내준다 (이제 P짱은 우리의 친구다)
4 식육센터로 보낸다 (우리가 키운 P짱, 우리가 먹을 수는 없지만 남의 손에 보낼 수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며 수업을 하면 학생들은 '아, 나도 교실에선 P짱이었어'라고 느낀다고. 
학생들은 무척 돼지를 위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지만 결국 돼지는 말할 수 없는 존재.
학생들을 두고 말하는 어른들의 대부분의 방식들도,
결국은 학생들을 말할 수 있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 


- 프랑스 학교도 20세기 중반에는 우리와 유사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운 교실. 
그 사이에 있었던 것은? 68혁명.

그들의 68혁명 구호
학교 생활은 수감생활과 다름없다.
교육에서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자유롭게 조직을 결성, 가입하고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움 없이 학교나 교사에 대한 불만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의 동의서는 학생 의사가 아니므로 정당하지 않다.
자의적인 검열은 폐지되어야 한다.
사적인 편지를 교사가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체벌은 없어져야 한다.
양심에 반하는 종교교육이나 예배는 거부되어야 한다.
금지된 지식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AND



>>>강연 마지막에 소개해 준 세 편의 시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  황지우, '뼈아픈 후회' / 마종기, '3. 대화'


사랑으로 나는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김정란의 시, 참 한구절 한구절 좋아하는 시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라는 말을 자꾸만 곱씹게 돼요. 아들인 세계 - 즉 내가 가꾸고 만들어 내는 세계, 그리고 지아비인 세계 - 싫어도 살아야 하는 곳으로서(이부분에서 다들 폭소)의 세계. 이런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해요. 이렇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구나. 그리고 나의 상처를 그저 겸손히, 세계와 함께 포개어 생각하면서, 아프고 불행한 세계를 함께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마종기 시인 참 좋아하지만 나는 이 '대화'라는 시를 보고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났던 어릴 적, 이미 어둠이 깔렸는데도 오시지 않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등불을 켜고 기다리면서 어둠과 빛은 경계가 없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죠.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는 그렇게 그냥 함께 있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어둠의 세계를 밝히는 등불은, 항상 밝게 타는 건 아니잖아요. 꺼지기도 하는거죠. 그렇지만 밝게 타오르도록 심지를 돋우고 꺼지지 않게 등불을 돌보는 건, 결국 자신이 아닌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꾸는 등불.

제가 해고가 되었잖아요? 옆에서 복직이 힘들거라고들 합니다. 솔직히 걱정도 돼요. 두렵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냥 이렇게 등불 밝히면서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요." 



>>>그러면서 이걸 읽어주었다. 엠비씨 노조 카페에 올렸다는 글


빛과 어둠에 대하여

 그러니까 어린 날, 꼭 이맘때였습니다.
들일 나간 부모님은 사방(四方)이 캄캄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당신들은, 손에 잡은 연장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만 일하자, 분명 그러셨을 것입니다.

 예닐곱 살 저는 서둘러 남포등에 불을 켜 툇마루 기둥에 걸었습니다. 어둠이 무서워서였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곤 마루 끝에 서서, 마당과 울타리, 또 그 너머 골목 쪽을 두렵게 바라보았습니다. 등(燈)빛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마당도 채 밝히지 못했습니다.
 어둠은, 스무 발작도 안 되는 마당 끝에 짐승처럼 산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제가 건 등(燈)은 고작 작은 빛의 동심원을 기둥 주위에 그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빛은 어둠에 갇혀 있었고, 아이는 또 빛에 갇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빛 밖으로, 그 어둠속으로 한 발작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빛과 어둠의 경계는, 넘기 힘든 공포(恐怖)의 선(線)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등(燈)빛 밖으로 조금씩 발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빛과 어둠의 구별이라는 게 사실은 아주 작은 차이이며, 그 경계를 넘는 것 또한 한 순간의 두려움일 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빛 속에서 보는 어둠, 어둠 속에서 보는 빛. 빛도 하나의 어둠이고, 어둠도 또 하나 빛의 세계입니다. 부모님은 어두운 밭이랑을 오가며, 칠흑(漆黑)속에서 한참을 더 일하고 돌아오셨습니다.

 조합위원장인 제가 결국 해고(解雇)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조합에 짐이 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담담하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나아가고자 합니다.
 어둡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어린 시절을 결코 상처로 기억하지 않듯, 이 시절의 많은 것들도 훗날 행복하게 추억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6.10   이근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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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조세희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러 갔을 때, 조세희 선생님은 '빵과 장미'의 이야기를 해 주시며 이제 여러분에게 '빨간 장미 한 다발'씩을 안겨주겠노라고. 희망을 안고 살으라고 하셨었는데, 이근행 위원장은 등불 하나 밝혀 주었다. 내가 심지 돋우고 기름 갈아주어야 할 등불. 




>>> 그리고 강연에서의 말,말,말,


"입사 면접 당시, 중앙일보에서는 3당 합당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내 양심대로 대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입사하기위해 거짓말할 것인가 갈등하다가 대답했다. '구국의 결단이라고 생각하며,,, 갈등보다는 화합이 필요한 시국이고...' 결국 떨어졌다. MBC 면접을 보러 갔을 때에는 전교조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선생님들의 정당한 사회적 실천이며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고는 그냥 나와버렸다. 그런데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제로 나도 사범대 출신이고, 교육학과를 나와 잠시 교사 노릇을 한 적도 있다. 아내도 교사다. 그래서 전교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방어하는 편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역부족이다. 현실에 대한 대안을 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론운동도 사실 다 죽었다. 동아일보의 '동아투위' 사건이라든지 하는 역사가 기억하는 기자들의 사회적 실천은 이제 다 옛날 얘기다. 현재 언론은 찌라시지 신문이 아니다.  신채호, 박은식이 있던 황성신문으로부터 시작된 '기자'라는 명예,도 이젠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기자는 이제 없다. 기자들이 앞서서 현실에 영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호위대다. MBC를 운영하는 방문진이나 KBS이사회 모두 최시중이 임명하는 거다. 이젠 둘 다 국영방송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손석희씨는 까칠하다. 까칠하다. 냉랭하고, 까칠하다. 정말 까칠한 사람이다. 신경민도 그렇다. 까칠한 사람이다. 사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거다. '정권도 바뀌었는데 꼭 그런말을 하고 살아야 하나'.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짤렸지만 더 행복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87년에 시청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나, 2010년에 시청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 모두 다 삽시간에 모였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87년의 사람들은? 많이들 변절하고, 방향성을 상실했다. 2010년의 젊은이들은? 에너지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들이 지도와 나침반만 제대로 갖게 된다면? 아마 큰 일이 벌어질 것 같다. 386들이 젊은 세대에 대해 비난하는 걸 자주 보는데, 흉볼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 젊은이들이 더 나을 수 있다."

"386들이 욕먹는 이유는 무식하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이념의 지도를 고수하면서, 여기에 따라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이제 한계가 있다. 이런 진보는 죽은 진보다. 이제 오늘날 운동은 제 자리에서 제 역할 다 하는 것이다. 무한도전 김태호를 보라. 이 사람이 어디 운동하게 생겼나? 그런데 자기 프로그램을 KBS파업현장을 배경으로 찍고 그러는 사람이다. 이제 희생/명분/국가 이런 무거운 운동의 시대는 갔다.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서의 운동, 행복한 운동, 즐거운 운동이 필요하다."

"이런 젊은이들, 다 누가 만들어냈나? 나는 이것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교사들이라고 본다. 교사들 너무나 중요하다. 부모는 못하는 일을 교사들은 할 수 있다."

AND


'놈에게 복수하는 법'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를 만드신 최미경 감독님을 만나는 날.

학교서 늦게 끝나서, 너무 늦게 도착했어요. 그래서 안타깝게도 영화를 보는 귀중한 기회는 놓쳤습니다.

그렇지만 발랄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감독님의 말씀이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발언들을 좀 적어볼게요.


"함께 일하는 영화계 사람 중 하나가 코미디언 김지선을 두고 이런 말을 하더라.

'어휴, 애를 저렇게 많이 낳다니 김지선은 좀 밝히나봐' 

내가 기가 막혀서 그게 무슨 말이냐, 이건 언어적 성희롱이나 다름없다고 했더니

내가 처녀라서 그런다고 손가락질 하더라."


"내가 당했던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여자 친구들에게 큰 맘 먹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 걔 그럴 애가 아닌데'라고 하거나 그냥 듣고만 있더라.

나는 속으로 '나는 그럼 그럴 년인가?' 싶었다. 

같이 화내고 같이 싸우려 하지 않고 그냥 듣고만 있었던 친구들도 너무 서운했다."


"용서의 기준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가해자들은 스스로, '이만큼 했으니 됐다'고 결정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우리는, 자신이 입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서도, 스스로 자책을 먼저 하게 된다."


"사실 우리 여자들은 너무 약하게 자라서, 따귀도 제대로 때릴 줄 모른다.

가해자를 만나도 따귀 하나 제대로 못 때리는 경우도 많다.

내 충고는, '일단 가해자 만나자 마자 때리라'는 거다. 한참 이야기 나누다가는 도저히 때릴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성폭력 피해의 치유 과정에 대해, '치유'라는 말보다는 '성찰'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치유는 왠지 약한 느낌이라 싫다. 

무척 오래걸리는 과정이고, 물론 상처가 있고 그것이 아무는 과정이 일어나지만,

그런 시간도 다 나를 위한 경험이고, 시간이고, 나를 찾는 싸움의 과정이다.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찰하고, 성숙하고, 더 강해졌다."


무척 발랄하면서도 멋지고 씩씩한 기운이 전해지시나요?


아래 링크는 감독님 영화를 소개하고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궁금하신 분은 클릭해서 읽어보셔요~!! 


http://www2.mhj21.com/sub_read.html?uid=28032&section=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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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육의 현실에 대하여
"경기도 동탄의 한 고등학교는 현재 강제 야자를 새벽 한시까지 실시하고 있다."
"해외 유학 유행이라고 하지만, 우리 학생들이 미국 대학에서 중도탈락하는 비율이 45%다. 
 참고로 평균 중도탈락률은 23%정도 된다."
"교실 붕괴는 교무실 붕괴에서 시작된 것 같다. 
 입시철에 홍보 다니던 아는 전문대 교수 한 명 왈, 
 교무실에 들어가도 어떻게 오셨냐고 인사하는 사람 하나 없는 냉랭한 분위기에서 
 다들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더란다."
"강원도의 한 학교는 수능으로 대학 가는 아이가 단 한명도 없는데 매년 보충수업비로는 1억을 쓴다고 한다."
"한 학생이 숙제로 만들어 온 동영상에서 학교의 현실을 꼬집으면서 각 학교의 교육목표들을 모두 찍어왔다.
 교육목표에는 좋은 말만 가득한데 현실은 왜 이러냐고 말하는 그 영상 보면서 너무나 속상했다."

>> 혁신학교라는 쉽지 않은 실험
"현 교장 공모제는 대부분 초빙제로, 정년 연장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장의 의지가 중요한 혁신학교는 그 의의를 살리기 어려운 상황이고,
신청하는 학교의 대부분이 예산 신청을 목적으로 혁신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어린 백수라는 사진 아시나? 이 사진의 주인공과 같은 아이들이 우리 학교 대부분의 아이들이다. 
입학식 날 장미 한 송이씩 나눠주며 교사 모두가 학생을 한번씩 안아주었는데,
학생마다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서 힘들었다. 
입학식 끝나고 화장실에 처박혀 있는 꺾어져있는 장미들..."

"혁신학교라고 해서 다 같은 뜻을 가진 교사들이 모인 것도 아니고,
생활지도 방향에 대해서 대여섯 시간씩 논쟁을 벌이는 걸 여러 번 해야했다."
"나머지는 다 교사들 자율에 맡겨놓았지만 두 가지만은 하지 말자고 했다. 
체벌. 그리고 증오적 발언(이를테면 너 부모가 그 따위로 가르쳤어?)"
"의견이 각자 달랐던 교사들이 결국 합의한 벌은 교사와 운동장 함께 뛰기. 
뛰다가 힘들면 걷기도 하고. 그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며 대화도 하고."

"결국 이 시대에 중요한 건 지식을 구성하는 능력이고 일을 기획하는 능력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수학여행도 열명에서 열다섯명씩 그룹을 지어 2박3일 일정 짜서 기획해서 다녀오도록 했다.
보고하는 날, 아이들이 훌쩍 크는 걸 느꼈다."
"학생총회보다는 소집단 토론활동이 좋더라."
"우리학교 시작종은 유행가다. 요즘은 '나 이런 사람이야'가 나온다.
기자가 취재하러 왔다가 음악이 나오니까 교장 선생님 전화받으시죠, 하더라."
"교사 문화를 자발성 있는 협력 문화로 바꾸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수업이 혁신이 되어야 혁신학교 완성되는 걸거다. 그런데 아직 우리학교는 그건 힘들다."

"두발, 복장 등 규정 다 스스로 정해서 만들게 했다. 물론 자기들이 만든 거라고 다 잘 지키는 건 아니다.
그런데 다 그래가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어렵고 힘들게 가는 길을 가야 교육 바뀐다고 믿는다."
"우리학교는 수요일은 봉사활동의 날이다. 다양한 기관과 MOU 체결해서 전 학생을 봉사 보내고 있다."
"학생들은 혁신학교에서 무슨 징계를 주냐고 하고  주민들은 혁신학교라더니 깡패학교라고 하고
 교사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언론에서 혁신학교 교사 엉망이라고 나오고....
 그래도 어제 **일보에서 취재나왔을 때, 또 엉망인 모습만 취재해갈까봐 걱정했는데
 기자가 학생들에게 학교 자랑 좀 해보라고 하니까 학교 잘 안 나오던 아이도 말을 열심히 하더라.
 아이들이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강연 후에 가슴을 치게 했던 한 선생님의 질문.
"말씀 들어보니, 그 아이들은 어쨌든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아이들은 아니고,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 아이들에게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을 주고 자기 의견 내세울 수 있는 걸 가르치는 게 과연 그 아이들한테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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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인권 교육센터 들' 연수에서의 메모들

1. 일본 푸른잔디회(아오이시바)의 행동강령

1. 우리들은 우리들이 뇌성마비자라는 것을 자각한다.
2. 우리들은 강렬한 자기주장을 행한다.
3. 우리들은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4. 우리들은 문제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5. 우리들은 비장애인 문명을 부정한다. 
  
 첫째,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란 단순히 자신이 뇌성마비라는 인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른잔디회’의 기관지 <발걸음>에는 ‘우리 뇌성마비자는 이 사회에 원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취급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부정당하는 존재로서의 자각, 자신의 신체성이 사회체제를 부정하고 있다는 자각인 것이다.

 둘째, 강렬한 자기주장이란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자기주장과 자기결정’을 의미한다. ‘푸른잔디회’의 대표적 이론가인 요코다는 “우리 뇌성마비자는 날 때부터 계속 완전히 대행(代行) 당해왔고, 생활하는 것 혹은 식사하는 것 등 아주 작은 일조차 그 자신이 살아간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간다”라며, “때문에 대행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의지를 강렬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의 투쟁방식에 있어 중요한 기조는 비참한 현실을 비참한대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셋째, 사랑과 정의에 대한 부정은, 동정과 시혜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증장애인을 대상화시키는 이데올로기와 감정 모두를 부정하는 섬뜩한 비판이다.

 넷째, 문제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강령은 일반적으로 ‘푸른잔디회’가 고립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부분이다. 잘못된 것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비장애인 중심의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그들의 현실적 대안이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다섯째, 비장애인 문명의 부정은 비장애인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존재를 감안하지 않고 설계된 지금의 사회가 애초에 잘못 만들어진 사회라는 인식이다.


2. 청소년 보호주의
- 보호의 반대말은? 공격? 방임? 자립!
-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여성의 다른 이름이다
Untitled (We don't need another hero)
Barbara Kruger


3. 최규석, <불행한 소년>





4. 기타
- 군대는 인간 자격 심사의 장이다.
- '양성평등'이념으로 혜택받는 것은 알파걸, 즉 남성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여성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기껏해야 2등 남성이다. 박근혜/전여옥/나경원 등을 비난하는 언어들이 '성'을 매개한다는 것이 그를 말해준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 등교시간 늦추기에 대한 지식채널 영상 : <나에게 잠을 허하라> / 다큐 <10대 성장 보고서>
- 성폭력 사건 지원에 대한 좋은 책 <성폭력 사건 지원 나침반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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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열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열 사람이 같은 한 권의 책을 읽고 문답, 대화, 토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교육이다.


사이트

서울교육독서토론마당 http://cafe.daum.net/playtalklovemadang
원탁토론아카데미 http://www.wontak21.org/
부산 하계우 선생님 http://cafe.daum.net/hahahia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연수원 http://www.civicedu.go.kr/
세종리더십개발원 http://www.sleadership.com/


영화

그레이트디베이터스
12인의 성난 사람들
<정의란 무엇인가> 강의 영상 
<토론의 달인> KBS 영상 : 민사고 학생들이 출전한 의회식 토론

연수 메모

1강.
구인광고로 모임 시작하기
버츄카드로 자기 소개하기
브레인 라이팅 :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각자 다섯 개씩 카드에 적고 - 모둠에서 발표하고 - 모둠에서 이야기해서 전체 발표

2강. 원탁토론 /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논제 :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포괄적 논제, 혹은 선택형 주제 (이 책을 읽고 가장 본받을 만한 인물)
조별로 활동을 시킨 후 마무리하는 데 좋은 방법으로 쓸 수있다. (모둠별로 좋았던 것 발표하고 서로 이야기)
학급회의, 상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학생들을 타임키퍼, 사회자 역할을 한꺼번에 시킨다(?)
적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적느라 안 듣는 경우가 있다.
토론자가 중간에 입장을 바꾸는 것 허용한다.
발언할 사람이 없을 때는 전 회차의 마지막 토론자가 지명한다.
학급에서 진행할 때는
사회자가 왼쪽 끝으로, 토론자들을 반원을 그리게. 타임키퍼는 방청석 한 가운데. 방청은 한 줄로.
자주 박수쳐서 응원해주기. 
모둠 토론을 한 후, 대표자가 나와 공개토론하기 / 모둠이 돌아가며 다같이 나오기 모두 가능.
공개토론할 때 방청석 토론 순서 넣기.

3강 . 참여형토론 / <강의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 / <고민하는 힘>

4강. CEDA토론 / <냉전의 추억>
CEDA토론 좌석 배치는 긍정이 왼쪽, 부정이 오른쪽.
(논제에 긍정하는 쪽이 현실 개혁을 지지하므로)
CEDA토론 훈련할 때는 한사람이 입론하고 다른 사람이 공동 질문하기 연습.
찬,반을 제비뽑기 : 다른 입장을 심도있게 알게 되면 상대편 논지를 깊이있게 비판할 수 있게 된다는 장점.

5강. 협상토론
<일용할 양식> <봄봄> 협상토론하기
협상토론을 통해 텍스트 이해 심화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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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로 읽은 책, 숙제로 쓴 글

개인의 탄생

근대 사회가 도래했다. 공동체 단위의 생활의 무너지고 개인의 삶이 전면에 떠오른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던 사회에서 개인에게 모든 판단이 맡겨지는 사회로 변모한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이 되고, 개인의 선택의 영역이 점차 넓어진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니까. 그런데, 선택의 자유가 골치아프다 여기는 젊은이들은 ‘왜 사랑이 변하느냐’, ‘왜 종교를 믿어도 구원 받지 못하느냐’, ‘청춘이 아름답기는 개뿔’, ‘그저 돈이 최고다’라고 외치며 ‘고민하기’를 중단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단지 머리를 ‘굴리’는 데에만 능수능란해진다. 이들은 공동체적인 가치를 배격하며 철저히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기를 중단하였으므로 더 이상 개인다운 개인은 아니다.

 

숙고의 권리와 의무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현대인의 고단한 삶을 나타낸 말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이고, 양자 혹은 다자 사이에서 숙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것도 모두 개인이 믿기로 선택하기 나름이다. 돈을 최고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도, 돈을 숭배하는 것은 천박한 물질주의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자유다.

현대인에게는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 숙고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숙고할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지쳐 이 자유를 돈이나 종교, 혹은 권력에 반납하곤 한다.

저자는 현대인이 자신의 삶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는 이 자유를 반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숙고할 수 있는 권리를 끝까지 자신의 것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숙고하는 자세는, 현대인이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한 의무이다.



고민의 방향은 나를 넘어선 관계를 보는 것

저자가 고민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계속해서 함께 강조하는 것은 ‘관계’다. 자아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도 자아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종교의 의미도 사실은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관계들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대한 문제라고 역설한다. 일을 하는 의미 또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랑 또한 관계를 맺어가는 여러 가지 색깔의 방식이라고 한다.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그의 삶에 대한 질문의 방식이라고 말하자고 한다.

현대인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면서 놓치고 있는 ‘가치’의 문제를 저자는 ‘관계’라는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으로 읽혔다. 나의 욕망과 욕망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현대인들. 그렇지만 나 자신이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생각이 방향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개인이 아닌, 성숙하고 열린, 인간다운 ‘고민’을 하는 인간들의 숲. 저자가 꿈꾸는 것은 그런 사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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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37 자아라는 것은 자존심이기도 하고 에고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기를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타자 또한 비슷한 자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겉으로는 참고 견디고 진짜 자기는 감추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워 완전히 자기 속에 파묻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질주하는 자기를 멈춰 세우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받지도 못해 악을 쓰며 비명을 지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비대해지는 자아를 멈추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정신병리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카를 야스퍼스가 한 말입니다.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를 사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의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 .... 그 이유를 궁극적으로 말하면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49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말은 그 과정에서 '국가 내에 무수한 벼락부자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대에서 사업을 일으켜 입신출세를 이룬 이른바 신흥 부르주아의 출현이 그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극도의 헝그리 정신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넌더리가 나는 배금주의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치관이 기세 좋게 세계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52 시대를 밑바닥부터 만든 세대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이 국가가 발전했어'라는 만족스러운 감정이 있습니다. 사회에 여러 가지 모순이 발생해도 스스로 그 사회 건설의 당사자라는 점에서 큰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진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충실한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순만 눈에 들어와 그것을 만든 세대에 대해 불만을 가집니다.

55 막스 베버는 이 점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런 문화 발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마지막 사람들 letzte Menschen'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이들은 인간성이 과거에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이미 올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할 것이다.'"

65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 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는 같지 않습니다.

85 <산시로> 속에 매우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시로가 열차에 투신자살해 몸이 잘린 젊은 여성의 시체를 보는 장면입니다. ... 나중에 나쓰메 소세키가 "청춘이란 밝은 것이 아니고 한 꺼풀만 벗기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혹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22 나 스스로 '나는 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면 결국 '타자로부터의 배려를 원하기 때문에'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지위나 명예는 필요없다고 말하면 거짓이 될 터이고 돈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큰 것은 타자로부터의 배려입니다. 그것을 통해 사회 속에 있는 자기를 재확인할 수 있고,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감과도 관계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합니다.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136 사랑은 계속 모습이 변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둘 사이에 물음이 있고 서로 그 물음에 대해 반응할 의지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160 과거에 '노인'이 지니고 있던 힘은 사회의 폭주를 막아 주는 이른바 '안전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세대가 좀 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사회의 안전판 역할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보다 '분별 없는' 노인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누군가 나에게 요즘 시대 '노인의 힘'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교란하는 힘'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 노인의 '교란하는 힘'은 생산성이나 효율성, 젊음과 유용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까지의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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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찬양함    

베르톨트 브레히트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 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여라!
당신들이 현명하여 너무 믿을만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었다.

역사를 읽고 무적의 군대가
혼비백산 도주하는 것을 보아라.
곳곳에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되고
출범할 때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던
무적함대가 돌아올 때는
몇 척 안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인가 사람이 올라갈 수 없었던 산봉우리 위에 한 사나이가 올라섰고
끝이 없다고 믿었던 바다의 끝에
한 척의 배가 도달했다.

확고 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
구할 길 없어 포기한 환자에 대하여
오 과감해라, 의사의 치료는 !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 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

오, 얼마나 힘들여 하나의 교리는 쟁취되었던가 !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
이것은 꼭 이러한 것이지 대충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웠던가 !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교리를 지식의 비망록에 써 넣었다.

아마 오랫동안 그것은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많은 세대가
그것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것을 영원한 지혜로 알고
전문가들은 그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에 불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경험이
그 교리에 의혹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뒷날 신중하게 어떤 사람이 지식의 비망록에서
그것을 지워버린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명령을 받으면서, 수염을 기른 의사들에게
자기의 유용성 여부를 검사 받으면서, 황금빛 훈장을 단
눈부신 인사들에게 검열을 받으면서, 하느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을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엄숙한 목사들의 경고를 받으면서,
참을성 없는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일한다.
자기가 살집을 짓는 남자도 땀을 뚝뚝 흐르면서 고된 일을 한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화능력은 놀라웁고, 그들의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참을성은
한계가 없다. 논쟁을 할 때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을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 깊은 사람들이 만난다.
이 생각 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
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
이 일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들의 활동은 우유부단함을 본질로 한다.
그들이 애용하는 말은, 아직도 결단을 내릴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당신들이 의심을 찬양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은 찬양하지 말아라 !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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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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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카테고리 없음 2010. 7. 24. 15:03

신뢰 信賴 trust

신뢰는 안심하고 어떤 것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모든 일이 순리에 따라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설사 어려운 일이 발생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선물을 발견하고 교훈을 얻게 됩니다.

신뢰의 미덕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 모든 일에는 무언가 좋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서도 무언가 배울 것을 찾아보세요
- 신뢰의 미덕을 통해 걱정을 몰아내도록 해 보세요
-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사람들을 믿으세요
- 잔소리를 하거나 걱정을 늘어 놓거나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다짐해 보세요
- 나는 사람들을 신뢰합니다
- 나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나는 두려움이나 걱정을 털어 버립니다
- 나의 마음은 평온합니다
-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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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수업을 잘 하는 법을 배우려고 연수를 갔는데
느닷없이 자기 소개를 하기 위해 카드를 하나 뽑으란다.
이름하여 '버츄카드' - 여러 가지 미덕들이 있는 카드다.
속으로, '나 이런거 싫어하는데' 하면서 뽑는다.

'신뢰'가 나왔다.
신뢰?
죽 읽어보는데, 깜짝 놀랐다.
누가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려고 맞춘 카드같다.

누군가를 정말로, 진심으로, 마음의 의심이 하나도 없이는, 신뢰해 본 적 없는 것 같다.
내가 그를 신뢰하지 않으니 그도 나에게 신뢰로운 사람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것은 토론 수업을 하려고 하는 나에게도 적용된다.
학생들을 믿지 않으니 저희들끼리 토론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다.
내버려두어도 잘 돌아갈 것이라고 믿지 않으니 토론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려고 하니까 열린 마음으로 듣고 말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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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1. 몸의 상태다.
2. 최초의 판단이다.
3. '생존'과 연관된 감각과 판단이다. (좋다 : 살 것 같다 / 나쁘다 : 못 살겠다)
4. 인지되지 못한다."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는 태어날 때 이미 숙성한 상태인 반면
인지 능력을 관장하는 해마체는 만 3세에 와서야 숙성된다.
인간에게 남는 최초의 기억은 만 3세 이전의 감정적 기억들이고 이것이 인간을 결정한다."

"이해받고 공감받는 경험을 해 본 아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된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자존감이 높아져야 관용적이 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한 당신이 나의 **가 되어주어 나는 **로서 참 행복해요"라고 자주 말해보자."

- 어제 교직원 연수, 감신대 안석모 교수님의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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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판단이 그 사람의 입장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입장에 따라 뒷받침 논거들이 만들어지고는 한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논리로만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생존'이 오고 가는 경험을 한 보수적 노인네들을 '논리'로만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흔히들 이렇게까지만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논리로만은 안 되고 그들을 '감동'시켜야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감동이 아닌 억지스러움만 남을 수 있다.

감동이 만들어지는 경로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하나는 상처받은 경험에서 만들어 낸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결론을 역전시킬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는데 막상 정글과 같은 사회를 만나고 받았던 심리적 충격을 보상하는 경험,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절망하고 포기하며 세운 심리적 방어벽을 깨뜨리는 경험,
이런 경험들이 감동을 만들고 사람을 바꾼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맞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뀐다는 말이 맞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덕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경험이 만들어낸 심리적 습관들이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습관은 말 그대로 '습관'이어서,
이 습관과 성격이 결국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 하더라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하는 판단이 사실은 '(상처로부터 비롯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은,
인지하기 어려운 '감정'을 '단지 감정'으로 인지하게 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렵다.

이러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상처의 경험을 역전시키는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경험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지만,
'공감과 이해'의 여유를 가진 누군가가 주변에서 '의지를 가지고' 돌보아주는 것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쟤는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하는,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싸가지 없게 들리는 말을
학생들은 쉽게 내뱉는다.
그리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교사들도 많다.

그러나 그 '벌'은, 실은, 잘못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계도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쟤의 심한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당한 사람의 심리적 상처를 보상하는 과정에서 요구되고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심리적 상처의 보상은, 벌과 분리된, 심리적 상처 치유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테면 '사형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최근 자주 언급되고 있는
어린이 성추행범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의 생존본능과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는 센세이셔널한 이슈다.
일단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전문가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치유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는 전국민이다.
전국민이 입은 이 심리적 상처(생존의 위기감)는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해야 한다.
어린이 성추행범이 등장했던 사회적 맥락을 책임지고 검토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사형'은 피해자들의 심리적 상처를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해소하는 방법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많은 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벌들이 다른 학생들을 위한 전시 효과를 노리거나,
때로는 학생으로부터 '교사가' 받은 심리적 상처를 보상해주기 위해 진행된다는 점은
반드시, 열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잘못은 잘못대로 계도받되,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학생이 있다면,
그 상처받은 학생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다.
이 학생이 자신의 상처를 '남이 벌받는 꼴'을 보며 보상받는다면
'내가 아픈 만큼 남도 아파야 한다'라는 잘못된 결론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학급이 있다면,
그 학급의 담임이 학급을 토닥여 주고 잘못의 과정에 대해 성찰해 주어야 한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 스스로 '나도 상처받는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상처를 삭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괜히 '교권'을 들먹이며 '학생 인권과 교권'이 대립되는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학생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권력 집단들의 왜곡된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이다.

잘못한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변화하는 때는 언제일까?

벌을 받으며, 종종 학생이 변화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종종 '**하면 ##받으니 **하지 말아야겠군'하는 동물적 학습에 불과하다.
이건 '**'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아니다.
그 학생은 아마도 뒤에서 침을 뱉으며 학교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고 교사들을 욕할 것이다.

그런데 또 벌을 받으며,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 벌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벌을 주는 교사나 부모와의 '우연한 소통의 순간'에 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조용한 성찰의 번뜩이는 순간에 있다.

그렇다면 벌의 내용은 학생, 교사, 부모의 '소통', 그리고 조용한 '반성'에 집중되어야지
다른 행정적이고 전시적인 절차에 집중된다면 우스운 일이다.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며
'그 잘못 때문에 너희들이 속상했구나'라고 말해주고 그 감정은 감정대로 해소하도록 도와주어야
학생들이 이기적이고 어린애같은 보상게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과정 없이,
"그래, 걔는 이런 잘못을 해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했어. 그렇지?"라고만 말한다면
아이들은 아마도, 훗날, 제 앞가림은 잘하지만 남의 불행 앞에서는 둔감한, 싸이코패스들이 될 것이다.
'남자 친구의 배신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여자 친구가 배신해서 강간범'이 되고
'부모가 상처주었으니 나도 부모를 학대'하고
등등등.

그런데 학교는, 이 과정을 모두 다 성찰하여 학생들과 교사들을 배려하기에는 너무나 근대적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결국은,
근대적인 학교가
살인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자살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강간하는 아이들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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