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사회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거나
헤드스타트 운동이라는 민망한 이름으로 공짜 과외 사업을 시작할 때
베네수엘라는
마을마다 오케스트라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아이들도 장애인도 다 큰 청년들도 자기 악기와 자기 오케스트라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고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는, 악기가 부족하자 가짜 종이악기를 쥐어주고 오케스트라 놀이를 시작하게 했다.

그 여유와 상상력이 부럽다.

며칠 전 교사연수에서 만난 한 초등쌤 왈
요즘 인천에서 초등학생 자살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10대 및 아동 성폭력 사건만 신나게 선정적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얘기다.
학교에서 언론에 나가지 않게 손을 쓰고 있어서 그렇지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노무 답답한 나라에서는
교육을 바꾼다고 하면서 상상하는 것이라고는
어떻게 더 영어 발음을 네이티브처럼 잘 하게 만들까
어떻게하면 만 명을 먹여살릴 한 명을 길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들 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영수 잘하는 애들을 만드는 건
아이들의 자살을 막고 끔찍한 범죄를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보다
참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
우리 나라를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나라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다들 '부모'가 아니라 '학부모'라서 그런지
영수 과외비가 많이 드는 것에 대해서는 "이 나라 교육이 문제야"라고 하면서도
자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는 "요즘 애들은 나약해"라고 하곤 하는데
이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교육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만이 아닌 좀 더 넓은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국영수를 평등하게 가르쳐서, 돈 없는 애들도 대학 잘 가게 만들면, 세상에 좀 기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점점 구닥다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는 좀,
대체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교육 철학을 놓고 끝장토론을 벌이고
그 가치관에 따라 투표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부모'가 아닌 '학부모'들이 투표를 해서인지
아마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사교육비를 줄여주겠다는
전혀 현실불가능한 정책들만 쏟아져 나올것이다.
(사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사교육비 절감은 무슨 짓을 해도 불가능한 얘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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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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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이 비싼 음식이나 장난감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모도 결핍되어 있다. 부모가 생계로 바쁘거나, 혹은 생계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아이들을 버려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다. 특히 어머니는 더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아직 미성숙한 상태의 아이에게, 부모의 부재는 생존이 위태롭다고 느낄 만한 일일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버려두는 매 순간은 아이의 삶에 깊이 상처를 남긴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은 시장에 장사를 나간 어머니를 혼자서 기다리던 때의 깊은 절망감을 노래한 시다. 해는 벌써 졌고, 금이 간 창 너머에서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는데, 아이는 혼자 방에 남아서 엎드려 울고 있다. 조그만 기척 소리에도 혹시 어머니인가 하고 돌아보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이때의 아이의 간절한 마음과 반복되는 절망감이 ‘안 오시네’, ‘안 들리네’와 같은 되풀이되는 문장들로 절절하게 나타나있다. 아무리 도리질을 하려고 해도, 아이에게는 ‘영영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무서운 생각이 점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혼자 남겨진 아이로서의 서러움이 극대화되는 부분은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라는 부분이다. 아마도 방 안에는 배고프면 먹으라고 이불 밑에 묻어 두고 간, 그렇지만 이미 식어진 ‘찬밥’이 남아 있었을 테다. ‘찬밥취급’이라는 관용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볼 때, 화자의 혼자 남겨진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과 버려졌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서러운 마음을 ‘찬밥처럼’이라는 말처럼 적절하게 나타내기는 쉽지 않다.

   연을 달리하며 화자는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된다. 그렇지만 이 어른에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때의 절망감과 서러움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 기억은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춥고 외롭고 쓸쓸한 부분, 즉 ‘윗목’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의 윗목’은 하나씩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유년 시절의 아이에게 부모와의 관계는 세계의 전부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억은 생애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누구든지 부모님에 관련된 서운하고 쓸쓸한 기억을 하나쯤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이름붙일 적당한 말을 찾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 나에게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년의 윗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혹시 아직도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을지 모를 아이를 끌어안아 주며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쓰다듬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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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로 꾸역꾸역 쓰는 글들
자꾸만 누군가를 닮아가는 문장들
깔때기처럼 비슷해지는 결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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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카테고리 없음 2010. 8. 8. 16:52

   우리학교가 ㅈㅇㄱ로 바뀌면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아이들의 성적도 가정 배경도 아닌, '학부모의 교육열'이다.

   학기 초, 막상 학생들이 입학하고 나니, ㅈㅇㄱ 전환을 찬성했던 어떤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학생들이 성적이 훌륭하지도 않았고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이 예전보다 적지도 않았다. 물론 예년보다 평균적인 경제수준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경제적 환경이 나아졌다는 의미도 결국은 가정의 교육열 정도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 두 문제를 연결하는 긴밀한 고리는 바로 '전업주부'인 것 같다.

   작년까지 내가 담임으로서 해야 하는 일의 중요한 부분은 학생들의 출결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학생들의 10~20%는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아이들이었고 나는 학년 초에 만나는 학부모들에게 지각시키지 말고 제 시간에 신경 써서 보내주십사, 간곡히 부탁을 해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맞벌이로 바쁜 부모들이었고 부모가 둘 다 돈벌이 때문에 밤늦게까지, 혹은 밤을 새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년 초에 있는 학부모 총회에 참석하기도 어려워 3분의 1 정도의 학부모만 겨우 시간을 내서 참석했었다.

   새로 맞이한 학생들의 경우 일단 부모들의 학력이 다르고 부모들의 교육열이 다르다. 배워서 얻은 사회적 권력의 맛을 잘 알고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어머니들은 대부분 전업주부다.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아이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는 일로 십여 년을 보내온 분들이다. 맞벌이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 일의 질이 다르다. 명예로운 일들이다.

   지각하고 결석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아이들은 글쓰기는 못해도 영어는 잘 한다. 시험 성적이 나온 후 아이들을 앉혀 놓고 상담을 하다보면 ‘성적표 엄마 보여드렸니?’라는 문장에도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이 많다. ‘엄마에게 죄송하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부모의 교육열로 인한 성적에 대한 압박감이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트위터에 어떤 분이 ‘한국의 여성문제는 독특하다’며 여성의 교육기회는 매우 평등하지만 사회에 진출하는 비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인데, 이것은 아마도 ‘대치동 아줌마’로 대표되는, 가정에서 자녀교육에 매진해야 하는 교육 현상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사회 참여가 어려워서 가정에 있다 보니 교육열이 뜨거워진 것’이라고 할 수도, ‘한국의 남다른 교육열로 여성이 사회 참여를 못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도 없다.

   한국은 교육도 일도 ‘잘’ 하려면 어느 한 쪽에 투신해야 하는 사회다. 일도 대충하면 짤리고 교육도 대충하면 자녀가 출세하기 힘들다. 사회에서는 어떤 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제대로 확실히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역할 분담이 필수다. 한 사람이 일에 매진하려면 한 사람은 집에서 빨래해서 다리미질 해놓고 밥 해놓아야 한다. 일단 역할을 분담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일은 남자가 교육은 여자가 담당하게 된다. 남자가 출세할 수 있는 정도가 훨씬 높고, 여자가 어머니들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이 다를 것이다.

   이렇게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전문직 여성이 되라고 가르친다. 월급쟁이가 되어 봤자 직장에서 하는 일이라는 게 별게 아니고, 또 그래봤자 또 자기처럼 결국은 자녀교육에 매진하게 될까봐 두려운 것일까? 우리 반 아이들의 꿈은 죄다 약사 의사 교사 변호사다.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에서 대우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가끔은 내 마음 속과는 조금 다른 색깔로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는 ‘여성과 남성은 같다동등하다’는 이야기보다도 ‘배워서 남 주자’는 이야기가 훨씬 더 급진적이다.

   결국 나는 그냥 이렇게 꽉 짜여져 돌아가는 재생산의 톱니바퀴의 하나의 부속품일 뿐이다. 가끔 바퀴 하나씩 고장나게 해 보려고 이러쿵저러쿵 딴 소리들을 아이들 머릿속에 넣어 보지만, 좋은 학교를 나온 부모를 둔 내가 좋은 학교를 나온 선생들을 만나 좋은 학교를 졸업하여 좋은 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있듯이, 뭐가 그렇게 많이 바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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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일획을 긋는 도박(賭博)이자 도반(道伴)이었을 것이다


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04&pID=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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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 꽃과 잎의 믿음
눈과 비의 훼방
그리고 담이라는 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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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열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열 사람이 같은 한 권의 책을 읽고 문답, 대화, 토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교육이다.


사이트

서울교육독서토론마당 http://cafe.daum.net/playtalklovemadang
원탁토론아카데미 http://www.wontak21.org/
부산 하계우 선생님 http://cafe.daum.net/hahahia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연수원 http://www.civicedu.go.kr/
세종리더십개발원 http://www.sleadership.com/


영화

그레이트디베이터스
12인의 성난 사람들
<정의란 무엇인가> 강의 영상 
<토론의 달인> KBS 영상 : 민사고 학생들이 출전한 의회식 토론

연수 메모

1강.
구인광고로 모임 시작하기
버츄카드로 자기 소개하기
브레인 라이팅 :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각자 다섯 개씩 카드에 적고 - 모둠에서 발표하고 - 모둠에서 이야기해서 전체 발표

2강. 원탁토론 /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논제 :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포괄적 논제, 혹은 선택형 주제 (이 책을 읽고 가장 본받을 만한 인물)
조별로 활동을 시킨 후 마무리하는 데 좋은 방법으로 쓸 수있다. (모둠별로 좋았던 것 발표하고 서로 이야기)
학급회의, 상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학생들을 타임키퍼, 사회자 역할을 한꺼번에 시킨다(?)
적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적느라 안 듣는 경우가 있다.
토론자가 중간에 입장을 바꾸는 것 허용한다.
발언할 사람이 없을 때는 전 회차의 마지막 토론자가 지명한다.
학급에서 진행할 때는
사회자가 왼쪽 끝으로, 토론자들을 반원을 그리게. 타임키퍼는 방청석 한 가운데. 방청은 한 줄로.
자주 박수쳐서 응원해주기. 
모둠 토론을 한 후, 대표자가 나와 공개토론하기 / 모둠이 돌아가며 다같이 나오기 모두 가능.
공개토론할 때 방청석 토론 순서 넣기.

3강 . 참여형토론 / <강의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 / <고민하는 힘>

4강. CEDA토론 / <냉전의 추억>
CEDA토론 좌석 배치는 긍정이 왼쪽, 부정이 오른쪽.
(논제에 긍정하는 쪽이 현실 개혁을 지지하므로)
CEDA토론 훈련할 때는 한사람이 입론하고 다른 사람이 공동 질문하기 연습.
찬,반을 제비뽑기 : 다른 입장을 심도있게 알게 되면 상대편 논지를 깊이있게 비판할 수 있게 된다는 장점.

5강. 협상토론
<일용할 양식> <봄봄> 협상토론하기
협상토론을 통해 텍스트 이해 심화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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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로 읽은 책, 숙제로 쓴 글

개인의 탄생

근대 사회가 도래했다. 공동체 단위의 생활의 무너지고 개인의 삶이 전면에 떠오른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던 사회에서 개인에게 모든 판단이 맡겨지는 사회로 변모한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이 되고, 개인의 선택의 영역이 점차 넓어진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니까. 그런데, 선택의 자유가 골치아프다 여기는 젊은이들은 ‘왜 사랑이 변하느냐’, ‘왜 종교를 믿어도 구원 받지 못하느냐’, ‘청춘이 아름답기는 개뿔’, ‘그저 돈이 최고다’라고 외치며 ‘고민하기’를 중단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단지 머리를 ‘굴리’는 데에만 능수능란해진다. 이들은 공동체적인 가치를 배격하며 철저히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기를 중단하였으므로 더 이상 개인다운 개인은 아니다.

 

숙고의 권리와 의무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현대인의 고단한 삶을 나타낸 말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이고, 양자 혹은 다자 사이에서 숙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것도 모두 개인이 믿기로 선택하기 나름이다. 돈을 최고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도, 돈을 숭배하는 것은 천박한 물질주의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자유다.

현대인에게는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 숙고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숙고할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지쳐 이 자유를 돈이나 종교, 혹은 권력에 반납하곤 한다.

저자는 현대인이 자신의 삶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는 이 자유를 반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숙고할 수 있는 권리를 끝까지 자신의 것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숙고하는 자세는, 현대인이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한 의무이다.



고민의 방향은 나를 넘어선 관계를 보는 것

저자가 고민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계속해서 함께 강조하는 것은 ‘관계’다. 자아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도 자아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종교의 의미도 사실은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관계들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대한 문제라고 역설한다. 일을 하는 의미 또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랑 또한 관계를 맺어가는 여러 가지 색깔의 방식이라고 한다.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그의 삶에 대한 질문의 방식이라고 말하자고 한다.

현대인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면서 놓치고 있는 ‘가치’의 문제를 저자는 ‘관계’라는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으로 읽혔다. 나의 욕망과 욕망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현대인들. 그렇지만 나 자신이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생각이 방향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개인이 아닌, 성숙하고 열린, 인간다운 ‘고민’을 하는 인간들의 숲. 저자가 꿈꾸는 것은 그런 사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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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37 자아라는 것은 자존심이기도 하고 에고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기를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타자 또한 비슷한 자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겉으로는 참고 견디고 진짜 자기는 감추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워 완전히 자기 속에 파묻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질주하는 자기를 멈춰 세우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받지도 못해 악을 쓰며 비명을 지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비대해지는 자아를 멈추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정신병리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카를 야스퍼스가 한 말입니다.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를 사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의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 .... 그 이유를 궁극적으로 말하면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49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말은 그 과정에서 '국가 내에 무수한 벼락부자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대에서 사업을 일으켜 입신출세를 이룬 이른바 신흥 부르주아의 출현이 그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극도의 헝그리 정신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넌더리가 나는 배금주의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치관이 기세 좋게 세계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52 시대를 밑바닥부터 만든 세대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이 국가가 발전했어'라는 만족스러운 감정이 있습니다. 사회에 여러 가지 모순이 발생해도 스스로 그 사회 건설의 당사자라는 점에서 큰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진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충실한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순만 눈에 들어와 그것을 만든 세대에 대해 불만을 가집니다.

55 막스 베버는 이 점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런 문화 발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마지막 사람들 letzte Menschen'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이들은 인간성이 과거에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이미 올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할 것이다.'"

65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 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는 같지 않습니다.

85 <산시로> 속에 매우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시로가 열차에 투신자살해 몸이 잘린 젊은 여성의 시체를 보는 장면입니다. ... 나중에 나쓰메 소세키가 "청춘이란 밝은 것이 아니고 한 꺼풀만 벗기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혹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22 나 스스로 '나는 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면 결국 '타자로부터의 배려를 원하기 때문에'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지위나 명예는 필요없다고 말하면 거짓이 될 터이고 돈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큰 것은 타자로부터의 배려입니다. 그것을 통해 사회 속에 있는 자기를 재확인할 수 있고,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감과도 관계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합니다.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136 사랑은 계속 모습이 변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둘 사이에 물음이 있고 서로 그 물음에 대해 반응할 의지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160 과거에 '노인'이 지니고 있던 힘은 사회의 폭주를 막아 주는 이른바 '안전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세대가 좀 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사회의 안전판 역할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보다 '분별 없는' 노인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누군가 나에게 요즘 시대 '노인의 힘'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교란하는 힘'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 노인의 '교란하는 힘'은 생산성이나 효율성, 젊음과 유용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까지의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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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찬양함    

베르톨트 브레히트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 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여라!
당신들이 현명하여 너무 믿을만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었다.

역사를 읽고 무적의 군대가
혼비백산 도주하는 것을 보아라.
곳곳에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되고
출범할 때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던
무적함대가 돌아올 때는
몇 척 안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인가 사람이 올라갈 수 없었던 산봉우리 위에 한 사나이가 올라섰고
끝이 없다고 믿었던 바다의 끝에
한 척의 배가 도달했다.

확고 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
구할 길 없어 포기한 환자에 대하여
오 과감해라, 의사의 치료는 !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 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

오, 얼마나 힘들여 하나의 교리는 쟁취되었던가 !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
이것은 꼭 이러한 것이지 대충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웠던가 !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교리를 지식의 비망록에 써 넣었다.

아마 오랫동안 그것은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많은 세대가
그것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것을 영원한 지혜로 알고
전문가들은 그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에 불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경험이
그 교리에 의혹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뒷날 신중하게 어떤 사람이 지식의 비망록에서
그것을 지워버린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명령을 받으면서, 수염을 기른 의사들에게
자기의 유용성 여부를 검사 받으면서, 황금빛 훈장을 단
눈부신 인사들에게 검열을 받으면서, 하느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을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엄숙한 목사들의 경고를 받으면서,
참을성 없는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일한다.
자기가 살집을 짓는 남자도 땀을 뚝뚝 흐르면서 고된 일을 한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화능력은 놀라웁고, 그들의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참을성은
한계가 없다. 논쟁을 할 때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을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 깊은 사람들이 만난다.
이 생각 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
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
이 일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들의 활동은 우유부단함을 본질로 한다.
그들이 애용하는 말은, 아직도 결단을 내릴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당신들이 의심을 찬양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은 찬양하지 말아라 !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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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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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다

홍세화는 <생각의 좌표>에서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보고 듣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동물이라면야 합리적인 동물이라 하겠지만 정작 실상은 그렇기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신념을 공고하게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 그렇기에 "생각은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라는, 코브씨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생각은 무게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유,무형의 것들 중에서 가장 영구적이라고 할 만하다.


생각의 씨앗을 심다

눈에 보이는 병균이 아닌, '생각'을 뜯어 고치고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심는 일, '인셉션'을 하기 위해 코브씨 일행은 '환자'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기로 한다. '생각'을 뜯어 고치기 위해서는 그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겪은 경험을 조작할 필요가 있는 것. 감독은 경험으로 인해 각인된 기억이 인간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그것이 사람의 생각을 조종한다,는 일련의 과정을 강하게 신봉하고 있는 것 같다. 생각을 훔쳐내기 위해서는 꿈만 꾸면 되지만 인셉션을 위해서는 꿈 속의 꿈 속의 꿈,을 설계할 정도로 생각을 바꾸는 일은 어렵다. 또한 꿈 속의 꿈에서 이미 인셉션 하려는 자들을 공격하는 자들이 도사리고 있을 정도로, 사람은 생각을 바꾸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러니, 저 심연의 무의식을 조종하는 일이란,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인가 보다.


문제해결방법으로서의 죄책감

흥미로웠던 것은 인셉션을 하러 가기로 한 코브씨가 남의 무의식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에 새겨진 죄책감이더라는 부분. 상담 이론에서도, 상담을 배우는 것은 자신의 상처들부터 먼저 직면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나를 상담하는 선생님이 종종, 나를 만나며 자신의 상처를 또 만나는 걸 지켜보게 된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던 코브씨. 그가 아내와의 일을 어려움 끝에 결국은 스스로 해결해내는 부분을 보면서, 죄책감도 아직은 어린 자아의 어른스럽지 못한 자기연민의 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브씨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자기를 학대하며 살아가는 방식은, 물론 불행하고 괴로운 일이지만 경험한 문제의 본질은 외면하는, 어떻게보면 간단하고 쉬운 방식이다.  어려운 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 : 경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그리고 그로 인한 나의 상처와 직면하기,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한 선을 긋기, 결별해야 할 것을 구별해 내기, 그리고, 결별해야 할 것과 정말로 결별하기. 이것이 더 어려운 과정일 것이다. 


놀란 감독의 다른 작품 <메멘토>에서의 남편은 실제로 자신이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해놓고는 남이 아내를 죽였다며 살인자를 찾으러 다녔다. 코브씨는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생각의 씨앗을 심어놓았던 일 때문에 아내가 자살을 선택했다며 아내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다크나이트에서 우리 마음 속의 시커먼 악의 세계를 보았던 감독이, 점점, 마음의 심연으로 깊이 깊이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왠지, 다음 영화는 더 어둡고 쓸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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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카테고리 없음 2010. 7. 24. 15:03

신뢰 信賴 trust

신뢰는 안심하고 어떤 것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모든 일이 순리에 따라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설사 어려운 일이 발생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선물을 발견하고 교훈을 얻게 됩니다.

신뢰의 미덕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 모든 일에는 무언가 좋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서도 무언가 배울 것을 찾아보세요
- 신뢰의 미덕을 통해 걱정을 몰아내도록 해 보세요
-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사람들을 믿으세요
- 잔소리를 하거나 걱정을 늘어 놓거나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다짐해 보세요
- 나는 사람들을 신뢰합니다
- 나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나는 두려움이나 걱정을 털어 버립니다
- 나의 마음은 평온합니다
-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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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수업을 잘 하는 법을 배우려고 연수를 갔는데
느닷없이 자기 소개를 하기 위해 카드를 하나 뽑으란다.
이름하여 '버츄카드' - 여러 가지 미덕들이 있는 카드다.
속으로, '나 이런거 싫어하는데' 하면서 뽑는다.

'신뢰'가 나왔다.
신뢰?
죽 읽어보는데, 깜짝 놀랐다.
누가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려고 맞춘 카드같다.

누군가를 정말로, 진심으로, 마음의 의심이 하나도 없이는, 신뢰해 본 적 없는 것 같다.
내가 그를 신뢰하지 않으니 그도 나에게 신뢰로운 사람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것은 토론 수업을 하려고 하는 나에게도 적용된다.
학생들을 믿지 않으니 저희들끼리 토론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다.
내버려두어도 잘 돌아갈 것이라고 믿지 않으니 토론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려고 하니까 열린 마음으로 듣고 말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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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도 끝나고 학기도 끝나고 방학이 왔는데
내 책상에는 기말 수행평가로 걷은 학생들 노트가 아직도 산더미다.
아까워서 돌려주지를 못하고 있다.

1학년들은 매 수업시간이 시작되면 한 사람씩 나와서 자신이 골라온 시를 낭송하고 감상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다.
학생들은 발표자가 나누어준 시를 노트에 붙이고 남은 빈 칸에 자신의 감상을 적는다.
학기 말이 되면 학생들마다 서른 대여섯개의 시와 시 감상이 빼곡히 찬 노트가 걷힌다.
노트는 학생들이 붙인 시와 눌러쓴 감상글로 울룩불룩, 나달나달해져 있다.

학기 초에 이 수행평가를 설명하면서 언니들이 작년에 썼던 노트를 보여주면 아이들은 기가 질린다.
빼곡하게 노트를 채운 감상글을 자신들은 절대 못 쓰겠다며 도리질을 한다.
쓰면 다 읽어는 보냐고 물어보고, 내가 '난 니네 글 읽는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하면 반신반의한다.
그리고 점수를 잘 받겠다고 경쟁적으로 무슨 이야기든 써나가기 시작한다.
개중에는 열심히 쓰고 싶지 않아하는 아이들도 있다.

중간고사 끝나고 노트를 한번 걷는다.
정말 성실히 과제를 하느라 땀흘린 것이 보이는 학생도 있고
이 기회에 글 솜씨를 뽐내는 학생도 있고
스트레스 푸는 용도로 감상 공간을 활용하는 학생도 있고
잘 하고는 싶은데 잘 안 돼서 이 얘기 저 얘기 중구난방 쓰다가 그림을 그리는 학생도 있고
또 아예 시를 붙이는 일도 제대로 안 하는 학생도 있다.
선생 욕 부모 욕으로 가득한 글을 쓰는 학생도 있다.
솔직히 한줄한줄 모두 읽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읽노라고 읽는다. 
그리고,
어떤 학생이든 두세 문장으로 손수 글을 써서 피드백을 해 준다.
비난하지 않고. 쉽게 평가하지 않고.

중간고사 이후에는 글쓰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자기는 조금 써서 선생님이 글을 짧게 써준 것 같다며 쓰는 데 열을 내는 학생도 있다.
이런 얘길 쓰면 선생님이 나를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재밌게 읽었다고 하니 고맙다고 하는 학생도 있다.
틈틈이 쓰라는 얘기였는데, 자습시간에 일을 삼고 노트를 쓰는 학생도 있다.

기말고사에 노트를 걷으면 글의 질과 양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다.
성의없게 썼던 학생들이 성의있게 쓰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염세주의로 가득한 글을 썼던 학생들은 더 신나서 세상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번엔 그림 안 그리려고 했는데 또 그림 그려서 미안하다고 하기도 한다.
지난 번에 썼던 피드백에 답장을 써놓은 학생들도 있다.
못 읽고 지나갔다가 학생이 상처받으면 어쩌나 싶은 고백을 써놓은 학생들도 있다.

내가 한 것은 단지 그 학생에게 두세줄의 글을 써 준 것밖에 없는데
아이들은 교사 혹은 어른의 이런 작은 성의에도 크게 반응해준다.
기말고사에는 그만큼의 답장을 해주지 못한다.
성적처리가 바빠서이다.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대답은 한두자리의 숫자다.
고맙고, 또 그만큼 더 미안하다.
그래서 돌려주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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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의 풋풋한 사랑이야기


1.
엄마는 미팅을 해서 잘 생기고 멋있는 남자 A를 만났다. 그런데 정작 연락이 오기 시작한 것은 별로 잘 생기지 않은 촌스런 쪽 B이었다. 어느날 A에게서 연락이 오더니 놀러가자고 했다. 엄마는 들떠서 꽃단장을 하고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 그런데 정작 나타난 것은 B뿐이었다. 엄마는 왜 A는 안 오고 네가 왔냐고 버럭 화를 내고는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2.
아빠는 엄마를 소개로 만났다. 아빠는 예쁜 엄마가 좋았다. 그저 예뻐 보였던 엄마에게 "잉그릿드 버그만을 닮았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코가 낮은 편이다. 나중에 아빠가 나에게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보여 주며 "저렇게 예쁜 여자가 실제로 세상에 있었단다"고 말했던 걸 보면 아빠에게 "잉그릿드 버그만"이란 지상 최고의 미녀였던 모양이다.


3.
샌님 집안에서 자란 엄마는 호탕한 성격에 술도 잘 마시는 아빠가 멋있어 보였다. 둘은 매일 같이 만나다가 두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고 나서야 키스했다는데 정말일까)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호탕해서 멋지던 아빠가 친정의 얌전한 오빠들과 달라 순 건달 같아 보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마셔대는 아빠 때문에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짐을 싸들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사나흘 쯤 지나고 나니 아빠가 그리웠다. 그래서 제발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엄마는 "나는 이 사람 없이는 못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당시 엄마가 쓰던 가계부를 보면 군데군데 생활에 지친 엄마의 흔적이 보인다. 어느날은 이렇게 메모되어 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날".

비루한 삶 속에서 잠깐의 빛나는 순간들에 속으며 그렇게 사람은 살아가는 것인가보다.



우리 엄마는 귀여운 구석이 너무 많다.
앞으로 몇 가지 더 연재할 예정.
더 늦기 전에 기록해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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