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슨웹 인터뷰 워크샵에 실었던 글


인터뷰에 관한 잡담

두리번
 
인터뷰는 묘한 대화다. 질문은 내가 그에게 던지지만 그의 대답은 독자들을 향한다. 그는 나에게 말하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말한다. 말하는 사람은 인터뷰이지만 그의 말을 요리할 사람은 나다. 질문과 글 작성의 칼날을 쥔 나는 인터뷰이의 대답을 유도하고, 정리하고,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는 권한을 가진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그의 속사정에 대해 다 알고 있는 매니저처럼, 또 때로는 천연덕스럽게 문외한의 행세를 하며 질문을 던진다. 둘의 대화는 때로는 내밀한 국면을 거치지만 대부분은 마치 이 대화를 듣는 관객이 있는 양, 보란 듯이 진행된다. 그래서 인터뷰 장면의 대화는 종종 토론, 혹은 연설이기도 하다. 
 
이렇게 토론 혹은 연설로 변질되곤 하는 ‘인터뷰’라는 묘한 대화를, 나는 꽤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다. 고백건대 실은 나 자신이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으나 그 통로를 찾지 못했던 많은 말들이, 인터뷰이의 입을 빌어 퍼슨웹의 지면을 채워갔다. 나는 인터뷰이 뒤에 숨어 인터뷰이의 등을 쿡쿡 찔러 무언가를 말하게 한 후 회심에 찬 미소로 그것을 인터뷰이의 이름으로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인터뷰 글에는 보이지 않는 별표들, 형광색의 밑줄들이 있다. ‘여기를 읽으라구 여기를!’하는 보이지 않는 외침이 글의 행간에 담겼다. 
 
또 한편으로 나는 내가 배움을 얻고 싶은 이들을 인터뷰이로 초청했다. 과거 대학시절 함께 활동했었으나 어느덧 직장 생활을 하면서 멀어진 이들을 만나 최근의 활동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무뎌져 가는 정치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계기로 삼았다. 혹은, 스쳐가는 짧은 만남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이들을 인터뷰이로 모셔 궁금한 것들을 물으며 본격적인 개인 과외의 자리로 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늘 인터뷰이의 말에 쉽게 동조하는 편이었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로서의 역할에는 게을렀다. 그러다 보니 나의 글은 그 배움의 기록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 게을렀던 것은 준비 과정에서 인터뷰이에게 반해버렸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를 인터뷰이로 골라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때부터 그를 만날 날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면, 그 중에 며칠 간, 인터뷰이에게 몰입하게 되는 기간이 있다. 그 기간에 나는 스토커가 된다. 인터뷰이의 삶을 구글링하기도 하고, 그의 블로그나 트위터를 탐독하기도 한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알아버리겠어!’라고 중얼거리는 - 욕망에 사로잡힌 스토커가 되어 그의 기사를 읽고, 그가 쓴 글을 읽고, 하다보면 어느덧 그의 삶에 반해버리는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마음 속에서 퐁퐁퐁 솟아 오를 때,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적어나갈 때 내 마음은, 가벼운 흥분 상태였다. 
 
결국은 인터뷰 자리에 날카로운 취재 기자의 마음보다는 ‘팬심’으로 가득 찬 부푼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가곤 했다. 이 부푼 마음은 인터뷰 대화의 녹음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 녹취를 하기 위해 녹음을 듣다 보면 민망해질 때가 많다. 그의 마음을 잘 구슬러 그가 조금씩 내밀한 속내를 보일 때라거나, 기대했던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올 때에 느꼈던 일종의 쾌감은 녹음 속에 반드시 드러난다. 과장된 웃음으로, 혹은 엉뚱한 추임새로.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인터뷰어를 요리하기 위해 과장되게 반응하고 동조하는 나를 볼 때, 깨닫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에 의아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인터뷰는 궁극의 팬질, 나와 인터뷰이와 독자와 편집장의 욕망들이 다투는 투쟁의 장, 나와 인터뷰이와 세상에 대한 공부 노트,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나의 마이크... 와 같은 다양한 옷을 입은 묘한 대화다. 
 
인터뷰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AND


고3 담임을 맡게 된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지레 겁먹었던 것들은 이런 것이었다.
1. 아마도 나는 온갖 눈치작전을 써가며 입시원서 써주는 일이 무척 싫을 것인데 이것을 해야 한다니 두렵다
2. 아마도 아이들은 언어영역 성적을 올릴 비법을 가르쳐주는 강의를 원할 텐데 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하니 두렵다
3. 아마도 학부모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텐데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을테니 두렵다
등등. 

2번과 3번은 그 예측한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1번은 조금 다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반에 명문대에 갈 학생이 거의 없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담임하고 있는 학생들 중 대다수는 전문대에 가야하는 상황이다. 아마도 반 이상? )
처음에는 내 자신이 걱정스러울 만큼 입시에 무감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이 아이들이 자기한테 맞는 대학에 꼭꼭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절박해진다. 

취업한 졸업생(대학에 진학했는데 아버지가 이런데 가느니 차라리 취업하라고 했다고)을 만난 후에는 더 그렇다.
말로는 '네 선택을 응원한다, 지지한다, 잘 지내라, 보기 좋다' 하며 등 두드려 보냈지만
실은, 이 먹물의 솔직한 마음은, 너무 일찍 사회생활을 접하고 늙어버린 아이가 보기에 안 되었다, 싶었다. 
그래도 대학을 가야지, 싶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학생들 인생에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크지 않다고 보는 게 맞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저 응원해주고, 함께 해주는 일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게 맞다.
고3 담임 처음 한다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할지 모르겠다고 징징거리니 이런 말을 해 준 선배 샘이 있었다.
"그냥 같이 가는 거지 뭐. 애들이 긴장하면 같이 긴장하고, 조바심도 같이 내고, 걱정도 같이 하고..."
 
그래서 그 마음 다잡는 의미로
스승의 날엔,
옛날에 부르던 노래 '한 걸음씩'의 가사를 적어서,
흐드러진 진달래꽃 앞에서 찍었던 반 단체사진 뒤에 붙여서,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들려 보냈다.
그냥, 한 걸음씩 같이 가자고 ;;;
아 이 촌스러운 감수성이여 ㅠㅠ

아무튼, 
아이들보다 앞서가지도 말고, 뒤쳐지지도 말고, 나란히 가는 감각을 기르려고 한다.


 
AND



5월 16일자 퍼슨웹 업데이트.
사진과 함께 곱게 편집된 기사는 여기로 -  http://www.personweb.com


평화의 언어로 병역거부를 말하다 - 임재성

임재성 씨는 병역거부자다. 입영 일이었던 2004년 12월 13일, “누군가는 먼저 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전쟁과 폭력으로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군대 대신 감옥행을 택했다. 그는 출소 후 ‘평화학’ 연구에 수 년 간 매진했고, 최근 평화운동의 관점에서 병역거부 운동을 돌아보는 저서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를 펴냈다. 

두리번 / @redpebl

과거 ‘집총 거부’는 특정 종교인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2001년 말, 불교 신자 오태양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 이후 자신의 소신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병역거부는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당시 군대 대신 감옥행을 선택하던 이들은 1년에 약 1600명. 그들이 ‘대체복무’라는 다른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오태양의 선언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고, 병역거부자들의 의미를 알려내는 활동, 대체복무제를 마련하자는 서명 운동에 열심이었다. 주변의 남학생들은 군 복무가 다가오는 나이였고, 이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스스로 병역을 거부하겠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임재성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친구들이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했다. 

대체복무제에 동의하는 서명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기득권자들의 병역 비리가 불거져 나오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병역거부’는 ‘병역기피’로 오인받기 일쑤였다. “이러다가 다들 대체복무제로 빠지면 어떡할 건데요?”라는, 병역 제도에 대한 불신과 우려만이 가득한 목소리 앞에서, 병역거부 운동의 본질적인 질문들은 일단 보류되었다. 병역기피의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우선 ‘만 3년에 합숙생활을 대체복무제도로 하면 된다.’며 소심한 대답을 하고, ‘당신도 군대에 가기 무섭지 않나요?’, ‘군대 안 가도 되는 세상이 더 좋지 않나요?’라는 질문은 목에 걸린 채로 꿀꺽, 삼켜야 했다. 

이렇게 병역거부 운동은 ‘감옥행을 멈춰 달라’, ‘대체복무제를 마련해달라’는 목소리를 높이며 병역을 거부한 이들의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소수자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임재성 씨는 이번 저서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에서, 당시의 상황을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의 긴장’이라 진단한다. 정작 말하고 싶었으나 삼켜야만 했던 말들 - 전쟁을 반대하고 군사주의를 비판하는, 즉 ‘평화의 언어’가 아직 말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책 보러 가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7457

책을 읽으며, 필자도 어느 새 조금 멀어져 잊고 지냈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느새 ‘역사’라고 이름붙일 만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온 병역거부 운동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나 싶어 조금은 두근거리기도 했다. 책의 저자를 직접 만나, 출소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 그간 진행했던 병역거부 운동, 평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군대, 안 가겠습니다. 

퍼 :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수감되기 전이었던 것 같아요. 출소한 건 언제였어요? 

임 : 2006년 5월 4일, 석가탄신일을 맞아서 가석방됐죠. 

퍼 : 오래 전이네요. 그럼 수감되었던 건? 

임 : 2005년 1월 28일에 구속됐죠. 원래 입영일은 2004년 12월 13일이었구요. 

퍼 : 그날, 입영을 하지 않았던 거군요. 재성 씨는, 대학 시절에 이미 예비 병역거부 선언*도 했었지요. 그때가 기억이 난다면 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 예비 병역거부 선언 관련 기사 <병역거부 ‘어깨동무’>(한겨레2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0071

임 : 네, 그랬죠. 당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고, 제가 속해있던 모임에서 병역거부 운동을 대중적으로 펼쳐나가자고 하면서, 예비 병역거부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받았던 것이 계기라면 계기이죠. 

퍼 : 그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임 : 병역거부 운동에 참여하면서 스스로의 군대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고, 병역거부에 대한 이성적, 감정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커져갔지요. 그렇지만 군대에 가지 않는 걸 선택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권유를 받았을 때도 ‘할까, 말까’ 하고 고민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행사에서 이미 병역거부를 하신 유호근 씨가 발언을 하시는 걸 듣게 됐어요. 

퍼 : 유호근 씨는 2002년에 병역거부 선언을 하신 분이죠? 

임 : 네. 그때가 2002년이었어요. 그날, 한 10분 동안,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분이 하는 말씀이 다 맞는 거예요. 틀린 말이 한 마디도 없어. 그래서 옆에 같이 앉아있던 후배에게 이야기했어요. “야, 나 병역거부 해야겠다. 저 사람이 하는 얘기에 대해서 내가 다 동의하는데 안 하는 건 이상하다.” 만약 내가 하지 않는다면,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조건들 때문이겠다고 생각했죠. 

퍼 : 생각에 동의한다고 모두가 결심할 수 있는 쉬운 선택은 아니죠.

임 : 그렇죠. 병역거부는 감옥행이고, 또 나머지 삶을 전과자로서 살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당시에 학생운동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걸 많이 봤었기 때문에, 감옥의 문턱을 낮게 느꼈던 거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이 고민했겠지요. 

퍼 : 예비 병역거부 이후로는 어땠나요?

임 :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이 터졌던 것도 저에게는 큰 영향을 줬죠. 내 눈앞에서 목도한 전쟁. 저는 2004년 4월 2일이 아직도 기억나는데요,

퍼 : 그날이 무슨 날이에요? 

임 :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이 통과되던 날이에요. 국회 앞 아스팔트에 아침부터 앉아있었죠. 결국 오후 4시쯤 파병안이 통과되었어요. 많이 울었는데. 그때, 저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서 사람들이 분신도 했었겠구나, 이런 감정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몸에 그런 일을 하기도 했겠구나.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었죠. 그때 봤죠. 전쟁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일어나서 이유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는 거구나, 라고. 그 이후로 스스로가 병역 거부하기를 잘했다, 병역 거부 운동을 알게 되어 고맙다고 생각했어요. 

퍼 : 입영일이 점점 가까워지면서는 어땠나요?

임 : 부모님이 가장 마음에 걸렸죠. 부모님은 지금도 병역거부라는 말만 들어도 쓰러지려고 하세요. 혹시 또 잡혀가는 것은 아니냐는 걱정도 하시고요. 

퍼 :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렸어요? 

임 : 우연히 알게 되셨죠. 예비 병역거부를 선언했을 때, 제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었거든요. 그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가 학교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선거 포스터를 보고 너무 놀라신 거죠.

퍼 : 뭐라고 써 있었어요?

임 : 예비 병역거부 선언. 아버지는 이게 뭔 소린가 싶으시면서, 땅이 일어나서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으셨대요. 

퍼 : 학교에 직접 오지 않으셨으면 모르셨겠네요.

임 : 지금 생각해보면, 입영하는 날까지 비밀로 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어차피 부모님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건데, 미리 드릴 필요 없잖아요. 아버지는 계속 저에게 왜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서운해 하시는데, (고개를 절래절래) 미리 상의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잖아요.

퍼 :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임 : 설득을 한 게 아니라 제가 고집을 부리니까 포기를 하신 거죠. 제가 계속 고집을 부리니 아버지는 갔다 오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끝까지 포기 안 하셨구요.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세요. 두 분이 많이 다투셨죠.
 
퍼 : 어머니 마음이 더 아프셨을 것 같아요.

임 : 엄마는요, 병역거부라는 게 너무 무서운 이야기니까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하셨어요. 무서워하셔서, 제가 감옥에 있는데도 접견도 6개월 동안 못 오셨어요. 그런 데를 언제 와 보셨겠어요? 저희 어머니 아주 시골에서 자라신 분이거든요. 처음 접견 오시던 날은 접견실에 들어오지도 못하셨죠. 제가 죄수복 입고 앉아있으니까, 무서워서 도망가셨어요. 그런데 한번 오시고 나서는 마음이 조금 놓이셨는지, 매일 와서 음식 넣어주시고 편지 써서 넣어주시고. 제가 있는 게 확인이 되니까 마음이 편하셨나 봐요.

퍼 : 요즘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때요? 

임 : 아버지는 이런 얘길 하세요. 참 외로우셨대요. 차라리, 데모하다가 잡혀갔다는 건 친구한테 얘기라도 할 수가 있으셨을 거래요. 그런데 군대 안 가서 감옥에 갔다니, 이건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대요. 얼마 전에는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현빈이 해병대 갔다는 뉴스를 보면서 부끄러우셨다구요.

퍼 : 아, 가슴이 아프네요.

임 : 일종의 시소인거죠. 저쪽이 계속 도덕화되면 그 반대쪽이 더 비도덕화되는 거죠. 부정적으로 보이는 거고. 아빠가 죄지은 기분이 드실 수밖에요. 저 같은 사람들은 더 고립되는 거죠. 


병역거부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퍼 : 예비 병역거부 선언을 했던 친구들이 모두 병역거부를 했던 것은 아니죠?

임 : 진짜 고민은 그 다음부터 왔죠. 저와 함께 선언했던 친구들도 실제 입영 시기가 다가오면서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남들과 다른 생각을 오래 유지하거나 버티려면, 몸이 가까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대학 졸업 이후에 병역거부 운동 단체인 ‘전쟁 없는 세상’(http://www.withoutwar.org/)에서 활동을 했어요. 이렇게 계속 관련된 활동을 했던 것 때문에 생각을 유지할 수 있었죠. 실제로 예비선언을 했던 한 친구는, 어느 날부터 모임에 못 나오겠다고 했고, 결국은 군대에 갔고요. 

퍼 : 병역거부 이후에 전과가 있는 사람으로서 겪었던 불편함이 있어요?

임 :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제 경우에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그것을 전과로 인해 절대 이룰 수 없게 되었다면 더 힘들었을 거 같아요. 물론 그 고민 속에서도 병역거부를 했을 거 같지만요. 친구들 중에는 자기는 군대는 다녀왔지만 병역거부자를 이해하는 좋은 정치인이 되고 싶다, 병역거부를 하게 되면 정치인이 못 될 것 같다고 했던 친구도 있었어요. 

퍼 : 제 후배 중에도 교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병역거부를 못 한다는 사람이 있었죠.

임 : 그렇죠.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된 후에 다가온 입영 일에 병역거부를 하시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선생님도 계세요. 그분들은 또 대안학교라든지 하는 여러 방법을 통해 잘 살아 가시면서도 아이들을 떠난 상처를 늘 간직하고 살아가시거든요. 그런데 저에게는 이런 부분은 크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는 덜 어렵게 쉽게 결정할 수 있었을 거예요. 막상 감옥에 가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지만요.

퍼 : 막상 가보니 어땠어요?

임 : 하나의 장면이 늘 떠올라요. 감방 안의 문은요, 안에선 손잡이가 없어요. 그냥 평평하죠. 밖에서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문. 이 문이 닫히는 걸 보면, 답답하죠. 힘들어요.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점점 힘들더군요. 

퍼 :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으로서 다른 불편함은 없을까요?

임 : 저는, 병역거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아, 소수자로 살아가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좋지 않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 앞에서 느끼는 공포들이 있잖아요? 나한테 대학 어디 나왔는지 물어보면 어떡하지? 하고 느끼는. 그런 것처럼 저도, 군대에 대해 물어보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이 드는 거죠. ‘나 병역거부자예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사실 대부분이죠. 소수자라는 건. 그래서 소수자가 된다는 게 이런 마음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퍼 : 그 전에는 느낄 일이 없으셨군요.

임 : 그랬죠. 남성에, 이성애자에, 서울에 살고, 명문대를 다녔고. 주류였죠. 사실 지금도 그렇고요. 그런데 병역거부 하고 나선 달라졌어요. 

퍼 : 군대 얘기가 사회생활에서 빠지지 않죠.

임 : 그럼요, 한국 사회에서 남자에 대해서 물을 때 군대는 꼭 묻잖아요, 누군가를 처음 만나고 이야기 나누다가 군대 얘기가 나올 것 같으면, ‘안 물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나의 이야기가 저 사람한테 불편할 걸 충분히 느끼니까 스스로 위축되는 거예요. 그래서 긴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 ‘면제’라고 그래요. 실제로 면제가 된 것이기도 하고요.

퍼 : 그냥 면제라고 대답한 적 있어요?

임 : 많죠, 아주 많죠. 이를테면, 저는 예전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웹 디자인 일을 했거든요. 그럼, 고객들과 만나 밥을 먹을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임재성 씨는 군대 갔다 오셨죠?’라고 물으면, 그렇게 한 번 만나는 사람한테 설명하기 불편하니까요. 

퍼 : 제가 대학 다니던 당시, 학생운동하던 사람이 병역거부를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들도 있었던 것 기억하고 있어요. 재성 씨도 학생운동을 하면서 폭력적인 시위 현장에서 앞장서 본 적 있죠? 

임 : 그럼요. ‘사수대 조장’도 해 보고 그랬죠. 

퍼 : 그때의 기억이 어떤지 궁금해요. 

임 : 음,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 연구한 기록들을 보면, 전투 상황에서 전쟁의 대의명분에 대해 숙고하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제가 사수대 경험에서 느낀 것도, 그런 거예요. 전경들과 딱 맞닥뜨리면, 데모의 대의명분? 그런 거, 금방 사라져요. 쟤들도 나보다 어리거나 끌려온 애들인데… 하는 미안한 마음도 없어져요. 격렬하게 충돌하고, 맞고 때리고. 몇 번 그러다보면. 무조건, 때려야 되고 자빠뜨려야 되고. 그랬던 경험들이 마음에 무겁게 남는 것 같아요. 

퍼 : 전투 상황에서는 원초적인 본능만 남는군요. 

임 : 그렇죠. 그래서 이런 생각 많이 해요. 전쟁에 동원된다는 건, 진짜 ‘도구’가 되는 거구나. 명분이 있어 싸우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는 ‘내 옆 사람이 죽고 나면 나도 죽는다.’와 같은 원초적이고 미시적인 공포와 내 눈앞에 있는 저 집단에게 느끼는 살의만 남는다고, 연구의 기록들이 말해주고 있어요. 

퍼 : 폭력적으로 데모하던 사람은 평화를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임 : 그랬죠. 2002년에 병역거부를 하셨던 제 선배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데모하러 나가면 가장 폭력적으로 싸우던 놈이 무슨 병역거부냐’고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셨었죠. 

퍼 : 병역거부자 이미지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걸까요?

임 : 저희 아버지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출소하던 날,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를 마중 나와 주신 분들이 여럿 계셨는데, 그 중에 병역거부를 준비하시던 김도형 씨라고, 불교 신자였던 분이 계셨거든요. 아버지가 그분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나중에 저에게 “야, 저 사람은 진짜 병역거부자 같구나.”고 하시더군요. 병역거부자의 아버지에게도 ‘병역거부자 이미지’가 따로 있나보다 싶어서 재미있었어요.

퍼 : 하하하, 아버지께서도 병역거부자 ‘다움’이 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임 : 병역거부자들은 총을 드는 것을 거부해서 감옥까지 가는 사람들이니까, 그에 부합하는 이미지들을 기대하세요. 

퍼 : 병역거부라는 개인의 선택에 대해 ‘그럴 만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하고 왈가왈부한다는 건,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임 : 우리가 소수자에게 원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소수자다운 얼굴, 적당히 불쌍하고 약한 이미지를 원하죠. 너무 말을 잘 해도 안 되던걸요.

퍼 :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임 : 그런데 우리 병역거부 운동하는 사람들은 이걸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설득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재밌고 행복하게 사는 거 같아요. 나처럼 살면 재밌다, 나처럼 살면 행복해진다고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원하지 않아요. 그러면 소수자답지 않다고 생각하죠. 그 딜레마가 있는 것 같더군요.


군대를, 왜 안 갔습니까?

퍼 : 책의 맨 앞부분에 “왜 병역거부를 했느냐?”는 질문을 받는 부분이 있어요.

임 : 네. 2006년 당시 국방부에서 대체복무제 연구위원회를 꾸렸을 때 병역거부자들을 데려다 놓고 했던 질문이었죠. 그런데 우리의 답변이 자신들이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라는 듯이 무척 불만스러워했었어요. 뭔가 정말 특별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은, 납득이 갈 만한 이유를 기대했었나 봐요. 그렇게 저희를 완벽히 타자화시킬 때에야 우리를 소수자로 인정할 수 있고, 그래야만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거겠죠.

퍼 : 그런 질문은 한두 번 받아본 것이 아닐 텐데요.

임 : 제가 수감되어 있을 때도 그랬어요. 방 바뀔 때마다, 사람들 새로 만날 때마다 같은 대화가 반복돼요. ‘왜 들어왔느냐’ - ‘병역거부해서요’ - ‘여호와의 증인이냐’ - ‘아니요… 저는 사실… ’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해 버릴까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이해받기 어렵구요.  

퍼 : 아예 써서 나눠줘 보지 그랬어요. 

임 : 그 생각도 했죠. 내가 가진 이야기 중에서 몇 가지 자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붙여서 남들이 조금 쉽게 납득될 만한 스토리를 만들어 볼까 싶기도 했어요, 반응이 좋은 걸로. 상식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납득이 되려면 충격이 필요하기는 하니까요.

퍼 : 당연한 것으로 굳어버린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렇겠죠. 

임 : 듣는 사람이 그걸 원하기도 하죠. 광주 출신의 병역거부자인 제 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래요. 광주 출신이라 병역거부를 한 거 아니냐고. 사실 그 친구 스스로는 광주라는 고향의 정체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데 말이죠. 

퍼 : 아.

임 : 그렇게 이해하고 싶은 거예요. 광주에서 국가의 폭력을 봐서 그렇다고요. 제주도 출신이면, 4·3 항쟁 이후의 상처들을 보고 자라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싶어 하고요. 뭔가 남다른 배경이 있을 때에야 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거죠. 사실 제 책의 6장에서 병역거부자들 한 명 한 명을 다룬 인터뷰를 배치하면서도, 그런 점을 고려했던 것도 있어요. 

퍼 : 특별한 상황에 놓였던 병역거부자들을 인터뷰하셨죠. 

임 : 네. 특별한 경험들. 1991년에 백골단으로 활동하다가 강경대 열사가 죽는 걸 보고 군복무를 거부하게 된 사람, 2008년 촛불집회의 무력 진압을 보고 거부한 사람, 동성애자로서 군 입대를 거부한 사람. 이런 분들은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공감을 얻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죠. 제가 제 책에서 이 이야기를 열심히 다룬 것도 어떻게 보면 한계라고 할 수 있어요. 

퍼 :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병역거부 이야기도 다루고 싶으셨던 거죠?

임 : 그렇죠. 그런데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병역거부를 한다는 건, 공감을 받기 더 어렵죠. 사실은 그 부분을 좀 파고들고 싶었던 거였어요. 

퍼 : 책이 나온 후에 그 공감을 얻는 데에 조금 성공한 것 같나요? 

임 : 병역거부자들은 자기 언어가 없어요. 모든 소수자들이 그렇듯이. 그런데 병역거부를 하신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자기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 같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자기 대변인 같았다나요? 또 병역거부자들의 주변인들이, 그 친구의 수감생활을 도우면서도 정작 자기 스스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기가 참 힘들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더군요. 

퍼 :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설득할 수 있겠네요.

임 : 이를테면 저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설명하기 굉장히 힘들거든요. 얼마 전에는 친구와 친구 부인을 만났는데, 사실 제 친구야, 저를 이해는 못해도 이미 받아들였지만, 친구 부인이 보면 제가 좀 이상해 보였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책이 나왔다고 친구들에게 한 권씩 줬더니, 그 친구 부인이 보고서는, “이제야 재성 씨를 이해할 수 있겠다”라고 했대요, 하하하.

퍼 : 병역거부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임 : 예, 병역거부자들이 이 책을 부모님들께 많이 갖다 줬대요. 병역거부에 대해서, 나와 가까울수록 설명하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요. 부모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 가장 어렵고요. 만약 이 책이 앞으로,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이들이 그들의 부모님께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드릴 수 있는 책이 된다면, 정말 기쁠 거 같아요. 

퍼 : 책을 낸 보람이 있으시겠어요. 

임 : 이 책의 편집자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일주일에 책이 이백 권이 넘게 나온대요. 1/200, 한 달로 치면 천 권 중의 하나인 건데, 그중에 의미 없는 책들이 더 많다. 그런데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책이 되지 않느냐고, 그럼 된 거라고요. 이 책이 뭐, 신정아 씨의 <4001>처럼 팔리겠어요? 제 책에 추천사를 써 주신 한홍구 선생님과도 이런 대화를 나눴어요. ‘선생님, 어떠세요?’ - ‘잘 읽혀.’ - ‘잘 나갈 것 같아요?’ - ‘에이, 잘 나가겠어?’ (웃음)

퍼 : 대중적으로 팔릴 만한 책은 아니라는 거군요. 

임 : 제가 책 부제에 이렇게 썼죠.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저는 지금까지 병역거부자들이 ‘말하지 못했던 것’을 담고 싶었던 건데, ‘말했다’고 생각했던 것도 여전히 말하지 못했던 것이더군요. 아쉬운 점도 많아요.

퍼 : 말은 해왔으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던 거네요.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퍼 : 비폭력이라는 말이 쉬우면서도 어려워요. 

임 : 레비나스라는 사람이 이런 얘길 했어요.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내가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이의 긴장이 비폭력이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너무 커요. ‘우리나라 침략 당하면 어떡할래?’라는 질문만 끊임없이 던져왔죠.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하죠. 그런데 자기가 죽일 수도 있잖아요. 이 둘 사이의 긴장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퍼 : 보호 본능이 더 큰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죠.

임 : 병역거부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만날 이렇게 물어봐요. “네 누이가 강간당하면 그래도 가만히 있을래?”라고. 그 질문에, 자신이 다른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주저함은 없지요. “네가 누구한테 성추행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니?”라고는 아무도 묻지 않잖아요. 내가 누구에게 폭력을 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해요. 저는, 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게 병역거부자들인 것 같아요.

퍼 : 민감한 사람들이네요.

임 : 병역거부자의 의미는, 한국 사회에 부재했던, 내가 누굴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비록 미약하지만 10년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었어요. 저는 책을 통해서 이런 그들을, ‘불쌍한 사람, 보호해 줘야 하는 사람, 구제해 줘야 되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만든 자로서, 어떻게 다른 사람인지를 보도록 하고 싶었어요.

퍼 : 책에서 ‘평화학의 방법론’이라는 이름으로 ‘공감’이라는 화두를 던지셨어요. 

임 : 병역거부자들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실제로 병역 제도 아래에서 군대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고민했던 시간들, 수감됐을 때의 경험들을 통해서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 공감이 흔히 이야기하는 공감이랑은 다른 거 같아요. 

퍼 : 다른 사람들이 병역거부자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조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임 : 마음을 정말 움직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국가와 민족은, 사실상 유사 종교니까요. 그렇게 보면 군대를 안 가겠다는 건 신성모독이잖아요. 사실 어떻게 보면 국가를 부인하는 거죠. 만약에 전체 민주주의에 요만큼의 특이한 소수자들이 있다면, 그걸 받아들이는 건 쉬울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에 공감하겠다? 거기에 공감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이건 어려운 일이죠. 

퍼 : 그렇지만 재성 씨는 그 질문을 하고 싶으신 거죠?

임 : 아주 근본적으로는 그 얘길 하고 싶은 거 맞아요. 병역거부자들의 마음을 보이고, “넌 어떻게 생각하니, 너의 결정은 뭐니?”라고 묻고 싶어요.

퍼 : 조금 추상적인 질문을. 국가란 무엇일까요?

임 : 대학원 다니면 많이 팔리는 책은 별로 안 보게 되는데, 책을 내고 나니 좀 살펴봐요. 벤치마킹? (웃음). 최근에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을 책방에서 슬쩍 살펴봤는데, 유시민이 가장 처음에 했던 국가에 대한 분석이 이거예요, ‘합법적 폭력의 독점체’. 

*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보러 가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4274 

퍼 : 정말 그렇군요. 국가의 폭력은 합법적이죠.

임 : 이게, 홉스가 했던 이야기랑도 연결되는데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상황에서 홉스는 전쟁을 멈추는 한 방식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사적인 폭력들을 국가가 독점하면 될 거라고 했어요. 16세기 내전상태의 영국에서 살았던 홉스가 ‘평화’를 만들기 위한 방식이었죠. 이건 사실 말은 맞죠, 사적 폭력은 줄어들죠.

퍼 : 국가가 치안의 역할을 하니까요.

임 : 그런데 그 결론으로, 점점 더 큰 대규모의 전쟁이 가능해지고 집단 학살이 등장했죠. 저는 지금의 국가의 모습은 폭력의 독점체라 보고, 그것이 가진 위험과 오류를 연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했던 행동 역시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폭력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것이고요. 

퍼 : 병역을 거부하는 일의 의미죠.

임 : 대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한 부류는, 지역 방위의 개념으로 확장시켜서 폭력의 단위를 국가에서 하나 더 올리자는 거예요. EU라는 프로젝트가 ‘지역 안보’ 시스템의 대표적인 실험이죠. 결국 크게 보면 칸트가 말한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세계 공화국 만들면 전쟁 없어진다는 거.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단위에서 폭력을 독점하게 하는 것이죠. 

퍼 : 세계 공화국을 만들면 적국이 없어지기는 하겠네요.

임 :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아나키스트들의 방식이죠. 군대 없는 세상, 국가 없는 세상. 소규모 공동체. 존 레논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글쎄요, 저는 둘 중에 뭐가 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어떤 주체에게 통제된 무력이든, 그것이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만 쓰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거예요. 압도적인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면. 궁극적으로 평화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봐요. 세계 공화국을 만들면 행복할까요? 전 그 엄청난 권력이 두렵기도 합니다.

 
일본의 평화 박물관

퍼 : 작년에는 교토에서 평화 연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임 : 일본의 평화박물관에 대한 연구를 했어요. 흔히 말하는 역사라는 건,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걸 위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국가는 스스로가 정당화시키지 못하는 기억들은 끊임없이 삭제하려는 시도들을 하죠. 그중에 가장 큰 게 전쟁이고요. 일본은, 가해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기억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포장하고, 혹은 고백하는지가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는 것이 평화박물관이에요.

퍼 : 평화박물관이 많은가요? 

임 : 일본은 평화박물관의 나라라고 하죠. 평화박물관은 전 세계에 한 백 개 정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중에 50개 이상이 일본에 있어요. 평화박물관을 통해서 전쟁의 기억을 전시하거나 기념하죠. 평화박물관 중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가장 대표적인데, 일본에서는 그 지역의 평화박물관에 가는 게 초중고 수학여행의 가장 중요한 코스예요.

퍼 : ‘히로시마, 나가사키’라면 자신들을 피해자로 기억하는 거 아닌가요?

임 : 그렇죠. 일본에서 ‘평화’라는 말은 가해자로서의 기억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에요. 평화박물관이니, 평화길 이런 말들이 곳곳에 범람해요. 그러나 그 평화는 일본만의 평화라고 할 수 있죠.

퍼 : 우리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네요. 

임 : 평화도 ‘어떤’ 평화냐가 중요한데, 피해자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의아한 일이죠. 그런데, 본인이 가해자라는 걸 인식하고 살아가는 건 참 힘든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잊고 정당화시키는 게 보통의 자연스러운 방식이에요. 원폭의 기억을 호출하든, 자신들이 특정한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몰랐다고 얘기하든. 

퍼 : 원폭의 기억을 호출한다는 건 어떤 건가요?

임 :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에 가면, 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만 있어요. 물론 최근 리모델링 하면서 역사적 맥락이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전체 규모에서 보면 일부에 불과하죠. 전쟁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원폭인데, 이를 탈 역사화시키고 탈 맥락화시켜서, 원폭만을 절대 악으로 만드는 거예요. “원폭 반대=평화”라는 메시지를 불편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동의할 수 있죠. 다 끌어안고 같이 울고, “원자폭탄을 실험하지 맙시다! 없앱시다!”라고. 

퍼 : 그러고 보니 저도 히로시마가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를 모르네요.

임 : 히로시마는 당시에 제2의 군사도시였어요. 1900년대 초반부터 엄청난 군사 시설이 발달했죠. 청일전쟁 때부터 군인들이 싸우기 위해 출발하는 항구가 히로시마였고요.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은 그런 상징성 때문에 여러 가지를 계산해서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던 거죠. 

퍼 : 그랬군요. 

임 : 제1의 군사도시는 황군 사령부인 동경이었는데, 동경에 원폭을 떨어뜨려서 우두머리가 죽으면, 협상을 못하잖아요. 아시아 각지에 주둔해 있던 일본 군인들이 빨치산이 되거나 게릴라가 되면 어떡해요? 한꺼번에 일사불란하게 무장해제하고 본국으로 들어가려면, 우두머리가 죽으면 안 되죠. 특히 군최고통수권자였던 일본 천황이 말이죠.

퍼 : 치밀했네요.

임 : 아주 치밀했어요, 교토에 왜 그 유적들이 다 남아있을 수 있는지 아세요? 원폭 후보지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전쟁 말기 미국이 계속 퍼부었던 공중 폭격을 안 했어요. 

퍼 : 왜요?

임 : 원폭을 떨어뜨렸을 때 얼마나 한 번에 없앨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놔둬 봤던 거예요. 미리 폭격을 해 버리면 그걸 알 수가 없잖아요. 

퍼 : 소름 끼치는군요.

임 : 반면 오사카나 동경에는 공습 사이렌의 기억이 있어요. 사이렌이 울리고 미군이 와서 폭격하고 가는. 그래서 동경은 유적이 많이 훼손됐죠. 그러다가, 교토에 원폭을 떨어뜨리면 반미 감정이 너무 커질 것 같았다나요? 교토도 일본의 천년 고도라는 상징성이 있잖아요. 전후 지배해야 하는데, 일본의 자존심이 너무 훼손될 테니까요. 

퍼 : 아. 

임 : 그래서 히로시마가 선택되었다고 해요. 마침 8월 6일 히로시마의 날씨가 좋았고. 비극이죠. 그런 치밀한 계산 하에, 히로시마는 ‘죽여도 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되었던 거죠. 

퍼 : 끔찍한 일이네요.

임 : 물론 히로시마의 원폭은 안타까운 일이고, 다신 일어나선 안 되지요. 명백한 전쟁범죄에요. 그런데 일본 역시 히로시마를 통해서 스스로 책임져야 할 전쟁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노력을 전후에 시작하죠. 

퍼 : 히로시마 박물관이 그 노력 중 하나이겠네요. 

임 : 히로시마 박물관에는 민간인의 기억, 피해를 당한 기억만 있어요. 일본 군인의 기억은 없죠. 원폭은 전쟁의 맥락에서 있었던 건데, 일본 군인은 사라지고 없고 히로시마 민간인에 대한 기억만 있는 거예요. 그렇게 탈 맥락화시키는 거죠. 



가해자의 자리, 가해자의 기억

퍼 : 조금 다른 평화박물관도 있다던데요.

임 :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잊지 말고 힘들게 살자고 이야기하는 박물관도 있어요. 일본 사회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놓고 오랜 논쟁 중이거든요.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도 있고, 야스쿠니처럼 전쟁을 정당화하는 방식도 있지만 스스로를 가해자의 자리에 놓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도 있죠.

퍼 : 그런 박물관을 소개해주세요.

임 :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에서 만든 평화 박물관의 경우에는 가해자의 기억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어요. 

퍼 : 어떤 기억인가요?

임 : 이 대학은 당시 아주 우익적인 대학이었어요. 천황이 교토에 있었을 때는 천황 깃발 들고 천황을 지키겠다고 사수대를 조직하고 그랬던 대학인데, 전쟁이 나고 대학생들이 처음에는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다가 학도병들이 나가기 시작하니까 ‘우리가 보내겠다.’고 비장하게 결의했죠. 그 대학 학생들은 중국으로 파병이 되었고, 그 지역이 난징대학살이 있었던 곳과 밀접한 곳이었죠.

퍼 : 그 대학생들이 학살에 참여했었다는 걸 기록하고 있는 건가요?

임 : 그 사람들이 학살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는 거지만, 자신들이 어디로 갔었는지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거죠. 절대악을 향해서 평화를 외치면서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아요. 리츠메이칸은 그 후엔 ‘우리 학생들은 절대 전쟁터로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해요. 거기서 시작하고 있어요. 그 가해자로서의 불편한 자리를 외면하지 않는 거죠.

퍼 : 다른 곳은 어떤가요?

임 : 피스오사카 박물관도 유명하죠. 미국인들이 어떻게 오사카에 공습을 해왔고 어떻게 불타고 죽었는지도 기록하고 있지만, 그 당시 오사카가 어떤 공간이었는지도 말하죠. 오사카에는 군사 시설이 많았는데, 이것을 삭제하지 않고 함께 보여줘요. 

퍼 : 전쟁의 맥락을 함께 보여주는군요.

임 : 그렇죠. 그리고 전쟁을 일컫는 말도 달라요. 앞선 리츠메이칸 평화박물관이나 피스오사카 박물관에서는 ‘15년 전쟁’이라고 전쟁을 일컫고 있어요. 보통 주류 일본사회의 전쟁기억은 태평양 전쟁, 즉 1941년 진주만 폭격부터 시작하는 미국과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거든요. 명칭이 기억을 결정하지요.

퍼 : ‘15년 전쟁’이라면?

임 : ‘15년 전쟁’이라는 명칭은 1931년 만주침략부터 시작하는, 아시아에서 자신들이 했던 일들까지 담고자 하는 거죠.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식민지의 역사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문제 있는 명칭이라 할 수 있지만, 그나마 이 정도의 명칭도 일본에서는 “좌파”적인 명칭이에요. 이런 평화박물관들에는 일본 군인들에 대한 기억이 있죠. 일본 군인들이 중국에서 뭘 했는지, 조선에서 뭘 했는지. 

퍼 : 가해자의 기억을 간직하려는 거군요.

임 : 민간인들에 대한 기억 역시 자국민의 피해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이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총동원령이 어떻게 내려지고 어떻게 동원되었는지, 국방 애국 부인회같은 단체들이 얼마나 열심히 남자들을 다 찾아내서 군대에 내보냈는지 등등, 이런 기억들이 있죠.

퍼 : 이런 흐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임 : 이전부터 일본 시민사회가 전쟁기억을 형성하기 위한 전시운동을 벌였어요. 그리고 90년대에 와서 냉전체제가 마무리되면서부터, 이런 박물관들이 91년, 92년쯤 만들어져요. 

퍼 : 다양한 목소리가 가능해졌나보네요. 

임 : 이때부터 아시아의 ‘타자들’이 입을 떼고 말을 해요. 그 전까지,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도 난징 대학살도 다 조직된 거라고 해왔거든요. 그런데 위안부 피해자들이 진실을 고백하기 시작하고, 강제징용 사과하라는 요구의 목소리들이 시작되는 거죠. 냉전시대에는 오로지 '아군과 적군'의 구도 속에서 침묵을 강요했다면, 그때부턴 다른 목소리들이 움직이는 거죠. 보통, 그때부터 일본의 진짜 전후가 시작되었다고 봐요.

퍼 : 한국에도 평화박물관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죠?

임 : 베트남전 진상규명운동에서 진화한 평화박물관 건립준비위원회가 있어요. 저도 회원인데요. 그러나 이 단체는 아직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평화운동단체의 성격이 강해요. 제주에 4·3 평화박물관이 있고, 거창의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는 시설도 있고요. 거창에 가면 군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비석이 있어요. 유례가 없는 모습인데요, 평화를 기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지요. 

퍼 : 가해자임을 고백하는 모습이네요.

임 : 그렇죠. 우리나라에선 아직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야기예요. 독일에는 베를린 한복판에 유럽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추모비가 있는데요, 지하의 관람시설 중 하나를 들어가면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대부분 1944년 1945년에 다 죽죠. 제가 영어는 잘 못하지만 그 말소리가 계속해서 ‘저먼 아미(German Army)가 어떻게 했고, 저머니(Germany)가 어떻게 했고’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걸 들으면서, 독일인이 이걸 견딜 수 있을까 싶더라구요. 

퍼 : 우리라면. 

임 : 그렇죠. 생각해봐요, 만약 우리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요? ‘한국군대가 죽였고 한국인이 학살했고’... 아마 못 견딜 거예요. 상시적으로 안보에 위협을 느껴서인지, 우리는 아직 국가 폭력에 대해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퍼 : 국가 폭력에 대한 거리두기?

임 : 누가 묻던데, 연평도 포격 이후에 해병대를 더 많이 가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전 당연한 심리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런 상황으로 오히려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도 늘어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거봐라, 결국 결론이 이거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안 되는 게 문제죠. 국론이 분열되면 안 된다, 일치단결해야 한다. 전쟁 앞에서는 언제나 이 말이 강조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퍼 :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군요.

임 : 일본이 전쟁 기억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해 온 것과 달리 한국사회엔 아예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일본 사회도 사회운동이 많이 무너졌고, 상당히 우경화된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평화운동과 관련해서는 일본이 한국사회에 비해 많은 시사점을 가지고 있죠. 일본에서는 헌법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사회운동이잖아요.

퍼 : 평화헌법 수호를 말하는 거죠?

임 : 일본에서 가장 큰 데모는 5월 3일이랑 11월 3일이에요. 이게 헌법 제정일과 헌법 시행일이에요. 가장 중심에는 헌법 9조가 있지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전쟁을 영구히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육·해·공군을 보유하지 않는다.”

퍼 : 그 헌법을 삭제하려는 시도들이 있는 거죠? 

임 : “일본도 이제 ‘보통 국가’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일본 자위대가 세계 군비 지출 5위권인 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9조를 안 바꾸고 지키고 있는 건 일본 시민 사회의 힘이라고 봐요. 전후 일본이 전쟁과 거리를 유지해본 것 역시 헌법 9조의 힘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학교에서도 왜 헌법 9조가 있는지 다 가르치게 되어 있어요.

퍼 : 병역거부도 국가 폭력에 대한 거리두기의 일종이죠.

임 : 독일에서 병역거부하는 사람들은 홀로코스트,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군인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소견서에 많이 쓰는데,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 국가 폭력에 대한 성찰과 통제가 가능할 수 있다고 봐요.


평화를 연구하다

퍼 : 아까부터 말씀하신, ‘자신을 가해자의 위치에 놓는 것’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이것은, 너무나 불편하고 어렵지 않나요? 책의 마지막에도 쓰셨듯이, 병역거부 운동이 소위 ‘배운 사람들’, 이런 담론을 접한 사람들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임 : 맞아요, 정말 그래요. 국가폭력이니 뭐니 하는 말들이 어려운 얘기죠. 한편으로는 평화라는 것이 중산층의 언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지요. 

퍼 : 가진 사람은 지금이 편안하죠.

임 : 그렇죠. 이를테면 이번에 손학규가 분당 선거에서 ‘평화냐 전쟁이냐’는 슬로건을 내걸었거든요? 그게 아주 분당에 적절했죠. 가진 사람은, 전쟁을 원하지 않아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죠. 비극이에요. 그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을 수밖에 없는 게 전쟁인데 말이죠. 저도 수감되어 있으면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전쟁을 원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경험이 있어요. 

퍼 : 한번 싹 바뀌는 게 낫겠다는 마음인 건가요?

임 : 수감시절, 남북관계가 안 좋아졌을 때가 있는데, 다들 신문 보면서 ‘전쟁이나 확 나라’고,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퍼 : 아. 

임 : 일본의 최근 청년실업자들이 우파가 되는 이유도, 지금의 계급 사회에서 자기가 좋은 자리로 갈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런 거거든요. 급격한 사회변동이 필요한 거죠. 나치가 600만 명 유대인을 죽였는데, 딱 그때 독일 실업자가 500만 명이에요. 실업자의 숫자와 학살당한 유태인의 숫자가 비슷하다는 게 의미심장하죠. 그렇게 경제 불황이 극심해졌을 때 파시즘이 대두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고요.

퍼 : 영화 “더 리더”가 생각나네요. 문맹인 여성이 실직자가 되었을 때 유태인 수용소에 취직해서 학살 임무를 다 수행하다가 몇 십 년 후 전범 재판을 받죠. 

임 : 네, 맞아요.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국가와 거리를 두면서 지식인이 택할 수 있는 길이 제가 말하는 길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이게 지식인 담론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못 하겠어요.

퍼 :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네요. 

임 : 저는 병역거부자로서 평화를 연구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최근에는 글을 써서, 발표를 하고, 투고도 하는 일을 많이 했죠. 그렇게 하니 숨통이 좀 트였어요. 사람이 공부만 하다보면, 가끔은 이게 무슨 한량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이 책 읽는다고 세상이 뭐가 달라지나 싶고. 

퍼 : 외부로의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임 : 저는 바깥에 얼굴을 보일 일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는 편이에요. 병역거부를 했던 다른 분들은 인터뷰하자고 하면, 거의 다 싫다고 하세요. 같은 얘기 반복하는 것이 힘든 일이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다 꺼내 보이고 평가받는 것이 어찌 보면 비루한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개인의 모든 정체성이 병역거부로 환원되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인지 병역거부자 중에 병역거부 운동 계속 하는 사람도 많지 않네요.

퍼 : 또 자신이 병역거부자로서 지키는 것이 있다면? 

임 : 저에게 일종의 준거점인 것 같아요. 어쨌든 저는 지금 명문대 대학원에 다니는, 제도권에 있어요. 대학원에 다닌다는 게 다른 사회 진출과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현실과의 타협을 고민하게 되는 일이 생겨요. 그때마다 병역거부를 했다는 것이,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거죠.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이런 고민을 하나, 옳은 것을 하자. 병역거부까지 했는데.’ 라고요. 

퍼 : 스스로를 ‘평화 연구자’라고 소개하시던데요. 명함에도 그렇게 써 있고요.

임 : ‘평화 연구자’라는 말이, 욕심나는 직함이에요.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사실 한국에선 ‘평화’라는 말이 최근에야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어요. 이승만 시절에는 ‘평화통일’을 주장한 조봉암이 사형도 당했지요. 운동권들은 또 운동권들대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타협하는 거라 생각했고. 평화운동도 그래서 1990년대 후반에서야 한국 사회에서 등장할 수 있었지요. 그래도 최근에는 평화 관련 담론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퍼 : 네.

임 : 여전히 사회적으로 주된 평화의 이미지는 ‘노사 평화’의 평화, 불법 폭력 집회에 반대되는 ‘평화 집회’ 같은 것이에요. 그런데, 영국의 브래드포드 대학이라고 퀘이커가 만든, 평화학으로 유명한 대학이 있어요. 거기에 1975년 아담 컬(Adam Curle)이란 교수가 취임하면서 남긴 말이 있어요. “내가 하는 평화라는 말은, 현존하는 불평등이나 착취에 대해서 눈감는 평화가 아니다.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거나 유지하려는 평화가 아니다.”

퍼 : 평화는 질서가 아니다.

임 : 그래서 당신 평화 연구가 구체적으로 뭐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징병제, 병역거부, 미군기지, 평택 투쟁’ 이런 거 연구한다고 대답해요. 그러면 ‘이건 아닌데’하는 표정들을 지으세요. 한나라당도 평화를 이야기하죠. 이렇게 ‘평화’라는 말이 오염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편성 때문에 내가 갖고 싶은, 이쪽으로 끌어오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퍼 : 여기 명함 뒷면에 쓴 말(“그것은 일어났고, 그렇기에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다”)은 뭐예요? 

임 : 프리모 레비라고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한 말이에요. 그가 쓴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라는 책에 있는 문구인데요, 전 레비의 책 중에서 이 책을 가장 좋아하는데, 여기에는 폭력의 맨 얼굴을 담담하게 담은 그의 고민이 가장 잘 들어있거든요. 여기서 ‘익사한 자’는 유태인 수용소 안에서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다 죽은 유태인들이고 ‘구조된 자’는 살기 위해서 수용소 안에서 나치에게 협력했던 유태인을 상징해요.

* 프리모 레비(1919-1987) : 유대계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후 아우슈비츠의 경험과 기억을 저서로 남겼다. 1987년 자택에서 자살하였다. 대표작으로 <주기율표>, <이것이 인간인가> 등이 있다. 

* 프리모 레비,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보러 가기
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67972186X 

퍼 : 나치에게 협력했던 유태인이요?

임 : 레비는 나치를 악마로, 유대인을 피해자로서 보는 도식적 구도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그가 처음에 책을 낼 때 반응이 좋지 않았죠.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었던 폭력에게 “괴물이다!” 하고 외친 후 얼굴을 돌린 게 아니라 계속 응시를 한 거예요. 그리고 말하는 거예요. “절대로 나치만 가지고 수용소가 유지되었던 것이 아니다. 여기, 협력한 유태인들 - 그 안에서 기꺼이 부품이 되어서 다른 유태인들 죽이는 데 협력한  - 이 있었다, 그게 홀로코스트다.”

퍼 : 으스스한 진실이군요.

임 : 저는 폭력을 연구하면서, ‘폭력이니 나쁘다, 없애자’가 아니라 실제로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고 싶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접근해서 실제 폭력을 지양해 나갈 수 있다고 믿고요. 이런 방식이 보기에 따라서는 불편하죠. 나쁜 걸 무조건 없애자고 하지 않으니까요. 레비가 저에게 이런 통찰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해요. 레비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이자 증언자죠.

퍼 : 평화를 연구하기 위해 폭력을 응시하는 일이 필요하군요.

임 :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나치 시대의 예외적인 이야기라고, 더 이상 이런 시대는 오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죠. 레비는 그걸 인지했던 거죠. 우리가 국가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도, 베트남이나 이라크를 언급하면서 무심코, 그건 예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그렇지 않거든요. 언제든지 또 다시 그런 방향으로 탈주할 수 있고, 그걸 막는 힘은, 이런 인식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끊임없는 응시의 과정에 평화로 가는 길이 있을 것 같아요. 

퍼 : 그 길을 가시는 모습,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5월 15일은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이다. 올해 5월 15일은, 병역거부자들의 활동 모임인 ‘전쟁 없는 세상’이 우리나라에 생겨난 지 8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생소했던 이름이 알려진 지 이제 햇수로 10년 째, 아주 조금이지만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2004년에는 병역거부자에 대한 최초의 무죄 판결이 있었고, 2007년에는 드디어 국방부에서 ‘종교적인 사유 등으로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군대 대신 다른 방법으로 병역을 이행할 수 있도록 대체복무를 허용키로 했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 발표는 결국 백지화되었지만, 대체복무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널리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인 ‘병역거부’가 사회 운동으로 조금씩 정착이 되어 가고 그 목소리의 풍부함을 더 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길을 선택하고 온갖 장애물을 헤치며 걸어온 병역거부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임재성 씨와의 인터뷰를 하는 내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세상 이곳저곳에서의 의미 없는 총격들과 죽음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라고 노래한 권정생 시인이 자꾸만 떠올랐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AND


한 선생님이 우리반 수업을 마치고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이가 이상해요."
"아, 그 아이요? 그 친구 장기결석으로 아슬아슬하게 학교 다니는 아이예요. 올해는 지각도 결석도 안 해서 그나마 다행인 아이예요."
"아니 그래도 요즘 좀 이상해요. 최근에 갑자기 더 불안해졌어요."
"어떻게요?"
"수업 시간에 안절부절못하고, 계속 강박적으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기에 가서 주의를 줬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목에 상처도 있어요. 자해한 거 아닌가 싶어요."
"..... 만나볼게요." 




"**야, 요즘 좀 어때? 무슨 일 있는 것 같아."
"......"
"힘들지? 요즘 엄마는 집에 계셔?"
"오늘 또 출장가셨어요. 며칠 있다가 오세요."
"그렇구나 또 바빠지셨구나."
"엄마랑 이야기하다가 싸웠어요. 엄마가 저한테 자꾸 이래가지구 되겠냐구......"
"그랬구나."
"그런 마음으로 그러신 거 아니라는 건 아는데, 그래두 속상해요. 저는 제가 제빵사하면 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알아보고는 있는데, 엄마는 자꾸 다그치시구....."
"목은 왜 그래?"
"밤에 이어폰 꽂고 자다가 줄이 목에 잘못 감겨서 ...."
"큰일 날 뻔했네."
"목사님이 우리는 다 태어난 목적이 있다고 가르쳐주셨는데요. 저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잘못 태어난 것 같아요, 흑흑."
"........"


나는,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거 뻥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어떻게든 대답을 꾸며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해버렸다. 

"노래도 있잖아. 우리 학교에서 만날 부르잖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뭐 대단한 목적이 있어서 태어나는 건 아닐거야.
그냥 사는 건 모두에게 너무 힘드니까, 다 어떻게든 힘겹게 살아내니까,
그렇게 서로 의지하면서 사랑하면서 살으려고, 그러려고 태어난거야.
지금 니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그런 것처럼." 

**이는 훌쩍거리고 끄덕거리며 집에 갔다. 
엄마가 집에 안 계시면 학교에 안 오기를 밥먹듯 하던 아이였다.
하루는 학교에 오더니 그 다음날은 학교에 안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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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메모

카테고리 없음 2011. 5. 15. 11:13


'성공한 삶' = '행복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성공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가고 출세해야 한다'도 아니고,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도 아닌,
소박한 삶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을 보여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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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한 투정 같지만 요즘 학교가 너무 가기 싫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며, 머리를 감으며, 집을 나서며, 전철을 타며, 또 전철을 내리는 순간까지, 
'아파서 못 간다고 전화할까' 하고 백번 천번 생각한다. 

학교 생활이 많이 답답하다. 
말이 통하는 사람 한두 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늘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기분이다.
나를 아껴주고 예뻐해주는 선생님들도 많지만 이분들은 나에 대해 반도 모를 것이다.

종종, 자기만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그 사람들의 가치관이 너무나 역겹기도 하다.
내가 아직 어려서 뭘 잘 몰라서 이런다고 생각하며 가르치려 들거나
아니면 내가 어렵사리 감행한 작고 소심한 저항의 몸짓들을 우스개로 삼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기독교 학교이다보니 더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너무나 너무나 옳기만 하고, 이와 다른 사람들은 그저 안타깝다는 태도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태도인지를, 정말 몸서리쳐질 정도로 알게 됐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는 그들과 공존하기를 이렇게 힘겨워하는 나 자신에 의문이 든다.
대체 나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걸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이해받는 것에 이렇게 어려움을 느끼고 힘겨워한다면
다른 어디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내가, 왜, 이렇게 나와 다른 것이 더 많은 커뮤니티에서 자꾸만 살게 되는 걸까? 

이런 회의가 가득한 밤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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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을 시작하며 꼭 해보고 싶던 일이 있었다. 
우리반 교실 창가에 토마토를 키워 익으면 반 아이들과 따 먹는 일.
작년 연수에 가서 그렇게 하시는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꼭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특히 강제 야자가 실시되면서, 학생들이 교실에 갇혀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런 거라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막상 학년이 바뀌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입시로 마음이 바쁜 3학년들이 관심을 가져줄까?
나부터도 한번도 식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데 괜히 키우다 다 죽으면 어떡하지?
반에 식물을 키우면 벌레가 생기는 건 아닐까? 그럼 애들이 싫어할텐데...
화분하고 씨는 산다고 하더라도, 흙은 어디서 나지? 퍼오나? 어디서? 어떻게? 무거울 텐데? 너무 요란스럽지 않을까? 
게다가 우리 반으로 북향 교실이 당첨. 북향에서도 식물이 자라나? 형광등 불빛만으로도 광합성이 되나? 

걱정을 하다가 시골에서 화초 키우기에 전념하고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트위터에도 올렸었던 그 대화는 이렇게 진행됐다.
"엄마, 나 올해 애들하고 토마토 키워서 먹으려고 했는데 북향 교실이 걸렸어. 어떡하지?"
"북향에선 안 자라."
"아무 것도 안 자라?"
"안 자라. 상추 같은 거나 좀 자랄까."
"상추 뜯어먹는 건 이상하잖아.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냥 사서 멕여 뭘 키운다구"
"..."

이번에는, 학교 텃밭에서 매년 학생들과 호박을 키워온 지 오래되신, 선배 선생님을 찾아갔다. 
같은 국어과 선생님이시고, 국어과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시고, 고풍스런 예절교육으로 유명하신... 분이시다.
"선생님, 제가 올해 학급에서 뭘 좀 키워보려고 하는데요."
"하하하하하, 우 선생, 그렇지, 그거야말로 아주 좋~은 인성 교육이지! 그만한 교육이 없다구!"
"그런데 저희 반이 북향 교실인데 뭐가 좀 자랄까요?"
"허어, 북향이라."
"예."
"햇빛이 들어야, 이 식물이 자랄 수가 있는데,"
"예."
"조금이라도 들어야 자랄 수가 있는데... (고개를 절래절래) 북향이면 힘들어요." 
만약에 선생님이 우리 반 수업을 하신다면 우리 반 아이들이 같이 호박을 키울 수 있을 텐데 아쉽다고 했더니,
그럼 나중에 견학을 올 기회를 주시겠다고, 그때 데리고 나와서 보라고 하신다.

3월이 시작되고 학기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역시나 그 선생님이 수업을 들어가시는 반에서는, 
어느날은 학생들 모두 종이컵을 가지고 구멍을 뚫고 (처음에 종이컵에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운다)
조금 후엔 싹이 난 종이컵들이 쪼르르 반 창가에 줄을 선다. 
나는 부러운데, 그 반 아이들은 입술이 부루퉁하다. 

그러더니 지난 주 월요일엔가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조금 전에 우리반 회장 불러서 호박씨 심는 법 알려주고, 우리 반도 키우기 시작하게 지도하셨다고, 그렇게 알으라고 하신다.
나는 속으로, 우리반 애들이 싫어할텐데... 어쩌지... 하면서도 "정말요? 고맙습니다." 하고는 걱정을 했다.
아니나다를까 종례를 들어갔더니 반 애들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싫다고 난리.
"아니야~ 내가 매년 보는데 해 보면 진짜 재밌어."
"뭐가 재밌어요! 으아늘ㅇ마ㅓㅗㅈㄷ가ㅓ"
"나중에 호박이 이따 만해져! 완전 신기해!"
하면서 달래봤는데도 왜 해야 되냐고 난리다. 
나보고, 안 하게 좀 말해달라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담임까지 한통속인걸 알고는 실망한 눈치. 
게다가 이노무 담임이 맨날 별거 아닌 걸 가지구 '완전 재밌어 완전 신기해' 하는 걸, 아이들은 이미 다 알아차려버렸다.

다음날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저 종이컵들을 건네주신다.
싹이 어떻게 텄는지, 요건 떡잎이고 요건 본잎이고, 설명해주시다가 
"선생님, 물은 어떻게 주나요? 그냥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놔두고 그러나요?"
"아, 비 맞히면 좋오치. 그런데 이 호박은, 물을 그렇게 많이 안 먹어요. 삼일에 한번 정도 주라구. 그런데 수도물을 그냥 틀면 흙이 패이니까, 요렇게, 손을 위에 올려서 손가락 사이로 물이 떨어지도록,"
"아, 이렇게요?"
"그렇지. 마치 비가 오듯이 말이야."
"예 고맙습니다. 저희 반 아이들에게 가져가서 이렇게 크는 거라고 보여줘야겠네요." 

이걸 보여주면 반 아이들이 좀 신기해 할 것 같아서 마침 수업이 있길래 들고 올라갔다. 
"선생님 그게 뭐예요?" 
"어, 호박이야."
"선생님이 키웠어요?"
"아니, *** 선생님이 선물로 주셨어. 인제 느네도 씨 심으면 이렇게 싹이 나는거야. 이렇게 떡잎이 두개 있으니까?"
"쌍떡잎식물" 
"그렇지. 요 사이에 작은 잎이 본잎이래. 그리구 얘는 아직 씨가 안 떨어졌대. 요 씨앗으로 흙을 밀고 올라온거야."
"우와 신기하다."
"그치, 이쁘지. 인제 이게 커가지구, 꽃도 피고, 호박도 자라고 그래."
"호박 자라면 누가 가져요?"
"니네가 가지지. 같이 호박죽도 끓여먹구."
그러고는 고백을 했다. 사실은 내가 하고 싶어서 *** 샘 하시는 걸 부러워했더니 이렇게 됐다고. 
3학년 생활 너무 각박할 것 같아서 교실에 이런 것 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나는 잘 못하겠어서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렇게  됐다고. 

그러고는 그날 수업 다 끝난 후 자습시간에 흙을 퍼담으러 나갔다. 
나도 잘 못하지만 애들 종이컵에 흙을 다 퍼담아 줬다.
허리를 굽히고 고생하는 걸 보더니 반 애들이 나더러 후회되지 않느냔다. 허허허 웃어줬다.
다 마치고 교실로 갔는데 교실에 애들이 없다. 
애들 다 어디갔냐고 물으니 컵에 씨앗을 심고 화장실에서 물 주느라 안 온단다.
"아니 물 주러 갔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걸려? 얼른들 오라고 해."
"쌤 지금 물 주는 줄 엄청 길어요. 애들 다 컵 위에 손바닥 펴고 물 준다고 요러고(빗물 떨어지듯이) 있어요."
"아유 그냥 대충 주지!"
"안 돼요 싹 나려면 정성이 중요하댔어요." 
하더니 교실로 온 애들은
각자 자기 컵에 이름 이쁘게 쓴다고 경쟁이 붙었다.
누군가 하트 스티커를 붙인 걸 보더니 자기도 붙인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나,
씨앗에 천사라고 이름을 붙이면 싹이 더 잘 난다고 하지를 않나......
"야! 호박씨 남았는데 하나씩 더 심을 사람!"  하고 회장이 외치자 
서로들 하나씩 더 얻겠다고 난리가 났다. 
'모든 생명은 암흑속에 잉태된다'고 주워듣고서는 사물함 깊숙이 컵을 넣는데
그 손길에 정성이 가득. 씨앗을 틔우겠다는 염원이 가득.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둔 차에, 이런 이벤트가 생기니,
아이들이 '물을 준 화분처럼' 웃었다.
나도 한달 반만에 모처럼 활짝 아이들과 웃었다. 
이래야 우리반이지, 싶은 날이, 올해 처음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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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방사능 비가 내린다는데 나라에서는 아무도 대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방송에서 일기예보를 통해 조심하라고 하는게 전부다.
어제 '페스트'를 설명하는 김화영 교수 강연에 갔었는데, 김화영 교수 왈 지금이 페스트 상황과 똑같다고.

페스트가 도시에서 발생했는데도 이를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다가 늦장대응하는 정부,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권력자들, 등등. 

아래는 지난 3월에 '들' 소식지 '소란'에 기고한 원고인데 오늘 다시 생각나서 가져왔다.
견디고 살지 말자 제발. 위험을 감수하고 사는 거, 이젠 관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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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만한 세상?


두리번


작년부터 우리 학교는 아무런 보수 없이 퇴근 시간을 한 시간 늦췄다. 거기에 저녁식사 이후에 실시하는 보충 수업도 또 하나 얹혀졌다. 이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면 저녁 일곱 시 반이다. 학교를 나서면서 ‘오늘도 열 두 시간 가까이 일을 했구나.’라는 걸 깨닫는다. 학생들은 아직도 야간 자율학습을 하러 남아야 한다. 어느 날은, 점심시간 종이 치자 아이들이 말했다. “아직도 집에 가려면 열 시간이나 남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아직도 환히 불을 밝힌 빌딩들이 밤을 밝히고 서 있다. 저 사람들도 아마 하루 열두 시간, 아니 열네 시간 열다섯 시간 노동을 해 온 지 몇 년 째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살아도 안 죽는다. 견딜 만하다. 보충수업은 수당도 쎄다. 그렇지만 일을 시키는 사람들이 “이렇게 시켜도 아무도 안 죽어. 다 견딜 만해.”라고 생각하고 일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견딜 만하잖아?’ 라는 말들이 세상을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았나 싶어져서다.


하루에 열 시간, 열두 시간 마트에서 꼬박 선 채로 비정규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는 집에 와서도 가사 노동에 시달린다. 그래도 안 죽는다. 견딜 만하니까 그렇게 사는 거다. 대학에 못 가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공포를 주입받으며 살아가는 학생들은, 자진해서 밤 열 시, 열두 시까지의 자율학습을 스스로에게 강제한다. 그래도 다들 웃으며 살아간다. 견딜 만한가 보다.


전쟁과 극심한 빈곤을 겪은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고통을 호소하기란 쉽지 않다. 웬만한 시련은 ‘나 어렸을 땐 말이야’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이야기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래도 안 죽어’라는 말 앞에선 다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버티자는 비장한 분위기가 된다. 인생이 원래 다 어려움 참아가면서 사는 거라고, 어른의 말씀에 고개 끄덕거리다 보면 내가 투덜이 스머프처럼 굴었나 싶어 반성하는 마음도 생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뭐 죽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도 같다. 그래, 죽지만 않으면 다 괜찮다.


그런데, 정말 안 죽나?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죽었다는데도, 더 많은 사람들은 멀쩡하다는 이유로 위험한 노동 환경에 사람들을 계속해서 노출시키고 있다. 끝없는 절망만을 주입받는 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슬픈 선택을 하는 학생들은 이제 중고생을 넘어 초등학생까지 확대된 지 오래다. 2010년이 지나도 전태일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래도,여전히 다수는 견디면서 살아가니까 괜찮나?


한때는 아픔과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다른 이의 아픔과 고통을 잘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가 상처를 겪어 본 사람이라는 사실이 싫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많은 것들을 견뎌 온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도 견딜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꾸만 느끼게 되면서부터다. 이제는, ‘견딜 만한’ 것들을 조금씩 줄여 나가보는 것도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견뎌 왔다는 생각이 문제를 개선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


아차, 그런데 나도 조금 아까, 몸이 아파서 조퇴한다는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좀 견뎌보면 안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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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에 처음 부임했을 때다. 
담임을 맡는 것이 처음이라 선배 선생님들의 조언이라면 무조건 따를 때였다.
한 선배 선생님이 나에게, 아이들의 핸드폰은 아침에 걷어놓는게 좋다고 충고했었다.
나는, 아 그렇군요, 하고는 박스를 하나 만들어서 매일 아침 아이들의 폰을 걷어오기로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이 일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핸드폰을 쓰는 게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이 방식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은 둘째치고라도
고가의 소지품을 관리하다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부담.....도 셋째치고라도
일단은 걷어지는 핸드폰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가는데, 내놓으라고 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 첫 주는 박스가 묵직했는데, 3월 마지막주 쯤엔 한 서너개밖에 걷히지 않았고, 아이들은 안 가져왔다며 내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회가 끝나고 핸드폰 걷는 박스를 받아들었는데 박스가 또 가뿐했다. 
대체 얼마나 안 냈길래 이렇게 상자가 가볍나,하고 발끈하는 마음으로 '너네들 진짜!' 하면서 박스를 봤는데
박스 안에는 핸드폰 그림, 핸드폰 사진이 가득했다. 

아이들이야 그냥 장난으로 한 일이겠지만
나는 이 장난이 마치 정치적 의사표현인 것처럼 여겨져
가슴이 다 뭉클하고 눈물이 다 핑 돌면서 그동안 내가 미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턴 핸드폰박스는 사라졌다.

매해 만우절마다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는데 아이들 반응은 그저 그렇다.
그치만 나는 늘 너무 자랑스러운, 내 첫 담임 아이들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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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이렇게 후두두두둑 피어났다 후두두두둑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이 좋다. 
지심도는 동백꽃 군락지가 있다는 작고 예쁜 섬이었다.
마음이 갑자게 맞은 친구와 갑자기 다녀왔는데, 이런 여행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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