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처연한 생존 방식도 사람들의 무관심과 망각을 이길 수는 없었다."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 알겠지? 얼른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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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자여 그대는 가장 위대하고 슬기와 힘으로 가장 이름이 나 있는 나라인 아테나이의 시민이면서도, 그래 재물에 대해서는 되도록 많았으면 하고 관심을 쏟으면서도 그리고 세평과 명예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면서, 지혜와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온전해지게끔 영혼에 관해서 마음을 쓰거나 생각해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 <호모 에티쿠스>를 읽던 중.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인용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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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인명 사전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그러니까, 이광수는, 천재고 아니고를 떠나서, 기회주의자야 기회주의자. 그래서 나쁜 거야."
"기회주의자...... 아 정말 예전에는 듣기에 무서운 말이었는데, 이젠 그 말에 대한 감각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요즘 애들은 기회주의자라는 말이 나쁜 말인 줄도 모를걸요?"
"그치. 아마 '기회를 잘 이용하는 사람'인 줄 알 걸?"
"하하하, 기회를 잘 이용하는 사람, 맞아, 아마 그런 건 줄 알 거야. 능력있는 사람."
"이런 시대이니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거지."


선덕여왕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아, 근데 선덕여왕은, 너무 사람 많이 죽어서 보기 힘들어요."
"맞아, 죽어도 꼭 목을 베고 피를 뿜으면서 죽데?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비극과 폭력을 레저로 즐기는 시대예요. 아내의 유혹 같은 게 성공하는 것도 다 그런 거지."
"게임도 다 그렇고......."
"이런 시대이니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거죠."



도덕감각, 공감능력, 따뜻한 감수성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요즘에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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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을 이타심으로 한정하여 이해한 사람은 스미스의 스승 허치슨이었다. 스미스는 스승의 생각을 비판하고, 이타심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도덕감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도덕감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동감(sympathy·공감) 능력’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쁨·슬픔·욕구·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경우 즐거움을 느끼고 그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 경우엔 불쾌함을 느낀다.

스미스는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적정성’이라고 말한다. 이타심이라고 해서 꼭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팽개치고 남을 돕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이라고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 행위도 그것이 적정한 수준이라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상상력이야말로 공감 능력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그 적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스미스는 여기서 ‘제3의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간 행위의 경험적 축적 위에서 그런 관찰자를 상정할 수 있으며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그런 관찰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관찰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도덕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스미스가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스미스는 공감의 원리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조화와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늘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질서 있게 운행하듯이, 인간의 이기심도 질서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의 이런 규명 위에서 <국부론>의 논의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기심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 사회적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따름이다.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였다. 노동과 자본이 분화되지 않고, 자본가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던 시대였다. 스미스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와 질서는 소박한 단순상품생산 시대의 목가적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이론을 노동과 자본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스미스의 ‘자유방임’ 논리를 자신들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더구나 스미스의 ‘자유방임’ 주장은 그 시대의 상업자본가들의 독점과 특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할 경우에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애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모든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철학자’가 스미스였던 것이다.


기사등록 : 2009-11-06 오후 09:01:02 기사수정 : 2009-11-06 오후 09: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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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선택 / 윌리엄 스타이런



·  아우슈비츠는 이제 너무나 많이 인용되어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었는지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우슈비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제까지 아우슈비츠에 대해 나온 설명 중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은 단정 짓는 문장이 아니라 되물음이었다.

질문 : "아우슈비츠에서, 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대답 : "인간은 어디 있었는가"


· 그러나 나는 아우슈비츠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집단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악'에 더 몸서리쳐졌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음까지 궤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겐 아무런 해답이 없어요. 당신에겐 있나요?" 그러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때로는 인생이 끔찍한 덫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인간 존재라는 끔찍한 수수께끼


· 그리고 '밀양'을 떠올리게 하는 이 문장

차가운 모래 아래서 나는 죽음을 꿈꾸었으나
새벽녘에 깨어나 보니
밝은 샛별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날은 심판의 날이 아니었다. 아침일 뿐이었다. 아름답고 빛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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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도리스 레싱)

질문들.

메리는 모세와 사랑에 빠졌던 것인가? 그들 사이에 오고간 모호한 감정의 실체는 무엇인가?
메리는 모세를 동경하고 선망하고 모세가 만들어낸 권위에 굴복했다면,
그렇다면 모세는 왜 메리를 사랑했는가? 모세가 메리의 떠남을 '배신'이라고 일컬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과 정신분열과 살인이라는 사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래서 결국,
무엇이 메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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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 고두현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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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진보가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 진보는 역동적 변화다. 둘째, 진보는 다양성이다. 셋째, 진보는 젊음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는 '평등=획일=하향평준화'라는 공식에 갇혀 있다.
그러나 나는 평등한 사회가 더 다양해질 수 있음을, 경쟁으로 달려가는 사회가 오히려 더 획일적임을 보았다.
이제는 저 공식을 깨고 다양성을 보장하는 평등한 사회를,
개인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의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평등한 사회' 말고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새로운 사회의 이름으로는 무엇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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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역경을 극복하고 오늘을 만든, 우리 시대의 성공 모델입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도시락도 가져가기 어려운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도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성공 신화는 계속 쓰여져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꿈을 성취할 수 있는 '약속의 땅, 희망의 땅'으로 계속해서 뻗어가야 합니다. "
- 정운찬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제발, 신화의 땅은 이제 그만.
  신화의 땅에서 신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모든 사람들이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바라는 나라는,
  아마 '신화의 땅'이라고 불리지는 않을 것이다.

  노력하는 사람들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속의 땅 말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도 기본권은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나라, 제발 이젠 그런 나라 만들자.

  문제는 신화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에요, 선생님.
  신화를 누군가가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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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팀 작업 중에 호주제로 인한 사회 변화를 다룬 신문 기사를 두고 입씨름이 있었다.

호주제로 인한 사회 변화 중
- 딸만 있던 집안이 딸의 성씨를 아이에게 물려주어 대를 이을 수 있게 된다.
- 실직한 아버지도 가장의 부담에서 벗어나 떳떳해질 수 있다.
는 예화 두 가지가, 호주제로 인한 변화로 다루어질 만하지는 못한 것 같아서
문제제기를 했고 이에 대한 짧은 논쟁이 있었다.

타당한 신문기사라는 주장에 맞서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워낙 이런 상황에서 조리있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 이성을 잃지 않고 대화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 선생님도 걱정된다'는 말에
그만 '하!'하는 소리가 나와버렸다.

허허허허.

아무튼 이러구러 하다가 다시 쓴 예화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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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갓난 아기가 호주라니? 모자(母子) 가정의 가장은 아기?

- 구시대적 삼종지도(三從之道)에서 벗어나

삼 년 전 남편과 사별한 이 씨는 갓 태어난 아기가 가정의 호주로 등록되는 기막힌 호주제 앞에서 망연자실했었다. 호주제에는 여자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구시대적 윤리가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기가 살아가는 가족인데 법적으로는 갓난 아기가 호주로 등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뿐더러 제도적으로도 이 씨를 실질적인 가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당함이 있었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부모와 자녀는 모두 개인 호적을 갖게 되므로 이 씨와 같은 모자 가정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법의 모순이 해결되고 현실을 반영하는 호적 제도가 자리잡게 된다.


#3. 부모님 모시는 딸, 법적으로는 가족이 아니다?

- 함께 살면서도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출가외인(出嫁外人), 이제는 옛말

아래로 남동생 둘을 둔 맏딸 심 씨는 치매를 앓는 친정 아버지를 모시고 오 년 동안 살았지만 법적으로는 아버지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혼을 하면 여자는 친정의 호적에서 시댁이나 남편의 호적으로 옮겨지는 호주제 때문이었다.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니 국가의 지원도 받기 어려웠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연금의 상속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반면 법적으로 심 씨의 가족에는 함께 살고 있지도 않은 시부모님과 시동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호주제 폐지 이후에는 이와 같이 비현실적인 법적 가족 개념은 사라진다. 함께 살고 부양하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면 심 씨도 아버지를 모시는 실질적인 부양자로, 그리고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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