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생활지도부 | 3 ARTICLE FOUND

  1. 2010.11.30 선생님 징계 먹으러 안 가요?
  2. 2010.06.26 공감과 이해, 잘못과 벌
  3. 2010.06.14 발레와 교복 치마



#1. 원래 이렇게 하는 거다

교사 첫 해의 일이다. 
시커먼 남자애들이 가득한, 시큼한 땀냄새 풀풀 나는 남고 교실에서 
작고 미숙한 내가 떼떼거리며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때였다. 

어느날 수업 종이 치고 수업을 들어갔는데 몇 녀석이 자리에 없었다.
이 녀석들은 왜 없어? 라고 또 떼떼거리고 있는데
후다닥 들어온 녀석들. 
나보다 키가 훌쩍 크고 시커먼 놈들을, 뒤에 서 있으라고 하고서는 
그래 왜 늦었느냐,고 물었더니 
매점에 빵 사먹으려고 갔는데 줄이 너무 길었고 그래서 기다리다가 결국은 빵도 못 먹고 왔다나 뭐 그런 얘기였다.

솔직히 뭐 큰 잘못을 한 건 아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너무 고개를 푹 숙이고 열중쉬어 정자세를 취하고 서서 이야기하는 게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금세 꼬리를 내리며
근데 너네 왜 그래~ 이게 뭐 그리 큰 잘못은 아니잖아~ 라고 했더니만
한 녀석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씩 웃더니
원래 이렇게 하는 건데? 하는 거다. 

나는 실소했다. 
그러고는 또, 한바탕,
'원래'라느니 '그냥'이라느니 하는 건 없다는 둥 하는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던 것 같다.



#2. 선생님 징계 먹으러 안 가요? 

한 달 전쯤인가 옆 반의 한 아이가 가출을 했다. 
내가 수업하면서 만나던 아이였고, 몇 가지 이유로 눈여겨 보던 친구였다. 

며칠 동안 행방이 묘연해서 부모와 담임의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일요일 저녁 쯤에 갑자기 나에게 연락이 왔다, 재워달라고.
(내가 작년에도 다른 가출학생을 재워 준 적이 있다고 들었다고 한다;;; 귀신 같은 것들)

그래서 일단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고 
밥을 먹이고 부모와 통화를 하고 담임과 통화를 하고 
아이에게는 
집에는 천천히 가더라도 일단 내일부터는 우리집에서 지내면서 학교는 다니자,
너 어차피 가출했으니 징계받아야 하는데 이게 길어지면 너만 불리하다, 
내일 나랑 같이 손잡고 생활지도부에서 이제 사이좋게 지내면서 며칠만 지내면 금방 끝난다, 
뭐 이렇게 말을 하고 - 나는 이야기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
아침에 학교를 데리고 왔다. 

보통 이런 경우에 학생을 바로 생활지도부로 인계해서 징계 절차를 밟았어야 했는데
나도 이제 3년차가 되니 긴장이 빠져서 ;; 깜빡 그 절차를 잊었고,
잠시 아이를 교실로 올려보낸 사이에 이 친구가 없어져버렸다. 
마음이 아직 학교에서 생활을 다시 시작할 마음이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담임은 담임대로 또 발을 동동 구르며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우리 반에서 조회를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오는데 
그 때 계단을 올라오는 이 아이를 마주쳤다.
바로 생활지도부로 이 아이를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내가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됐는지,
어, 너 어제 어떻게 된 거야! 라고 하고는
또 "교실에 잠깐 들어가 있어"라고 말을 해버리고 돌아서 버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이가 나를 불러세웠다.

어, 선생님, 징계 먹으러 안 가요? 

나는, 바보 같이,
아, 맞다 참, 우리 그거 하러 가야되지, 하면서 
다시 아이 손을 잡고 생활지도부로 왔다.

그리고 아이는, 갑자기 거짓말처럼 돌변하여,
그때부터는 온순하게 모든 절차를 따르고
집에도 돌아가고
꼬박꼬박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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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는 걸 12년 동안 충실히 배워온 학생과
그런 '원래'의 공식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원래'라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교사가 만날 때,
그리고 그냥 '정신없는' 교사가 만날 때, 
이런 실소할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궁금한 건, 이런 과정 중에 학생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지,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학생들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변화할까? 
이를테면 그 가출 학생은 
왜 그 전날은 도망쳤다가 다음 날은 제 발로 돌아와서 '징계먹으러 가자'고 내 손을 이끌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거짓말처럼 다시 일상을 살기 시작했을까?
흔히 비판하듯, 학교라는 권력이 두려워서 굴복한 것일까? 
-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가출 생활이 지겹고 힘들었기 때문이 더 클 것 같다. 
- 그렇다면 돌아온 이유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아이들이 답답하고 굴욕적인 징계 기간을 꿋꿋하게 지내도록 버티는 힘은 또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흔히 이 과정을 비판하는, 
'권력에의 굴종'을 학습하는 과정이라든지 하는 언어들도 
그리 정확하게 이 학생들의 변화를 짚어내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이 반성문에 주절거려 놓는 이야기들은 정말 놀랍도록 모범적인 반성문들이다.
그 글들을 모두 믿지는 않지만 또 모두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 이 짓 그만두자'라는 자기들 나름의 결심의 과정이 있을 것이고, 
그 이유는 백 가지 천 가지일 것이되
그 변화의 과정을 어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이들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천편일률적인 '반성문'을 써내리고 있는 것뿐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어른들이 마련해놓은 '반성' 혹은 '징계'와 같은 이름이 붙은 어떤 절차들이
학생들에게는, 어른들의 의도와는 다른, 그렇지만 그들 나름의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그것이 이들 나름의 어떤 '통과의례'의 절차로서 작용한다는 것이 흥미롭고, 
학생들은 그 절차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또한 비껴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가로지르면서,
자기들 나름의 성장 과정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보여 그 과정을 좀 선명하게 들여다 보고 싶다.
AND


"감정은
1. 몸의 상태다.
2. 최초의 판단이다.
3. '생존'과 연관된 감각과 판단이다. (좋다 : 살 것 같다 / 나쁘다 : 못 살겠다)
4. 인지되지 못한다."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는 태어날 때 이미 숙성한 상태인 반면
인지 능력을 관장하는 해마체는 만 3세에 와서야 숙성된다.
인간에게 남는 최초의 기억은 만 3세 이전의 감정적 기억들이고 이것이 인간을 결정한다."

"이해받고 공감받는 경험을 해 본 아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된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자존감이 높아져야 관용적이 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한 당신이 나의 **가 되어주어 나는 **로서 참 행복해요"라고 자주 말해보자."

- 어제 교직원 연수, 감신대 안석모 교수님의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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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판단이 그 사람의 입장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입장에 따라 뒷받침 논거들이 만들어지고는 한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논리로만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생존'이 오고 가는 경험을 한 보수적 노인네들을 '논리'로만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흔히들 이렇게까지만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논리로만은 안 되고 그들을 '감동'시켜야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감동이 아닌 억지스러움만 남을 수 있다.

감동이 만들어지는 경로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하나는 상처받은 경험에서 만들어 낸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결론을 역전시킬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는데 막상 정글과 같은 사회를 만나고 받았던 심리적 충격을 보상하는 경험,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절망하고 포기하며 세운 심리적 방어벽을 깨뜨리는 경험,
이런 경험들이 감동을 만들고 사람을 바꾼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맞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뀐다는 말이 맞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덕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경험이 만들어낸 심리적 습관들이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습관은 말 그대로 '습관'이어서,
이 습관과 성격이 결국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 하더라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하는 판단이 사실은 '(상처로부터 비롯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은,
인지하기 어려운 '감정'을 '단지 감정'으로 인지하게 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렵다.

이러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상처의 경험을 역전시키는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경험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지만,
'공감과 이해'의 여유를 가진 누군가가 주변에서 '의지를 가지고' 돌보아주는 것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쟤는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하는,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싸가지 없게 들리는 말을
학생들은 쉽게 내뱉는다.
그리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교사들도 많다.

그러나 그 '벌'은, 실은, 잘못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계도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쟤의 심한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당한 사람의 심리적 상처를 보상하는 과정에서 요구되고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심리적 상처의 보상은, 벌과 분리된, 심리적 상처 치유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테면 '사형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최근 자주 언급되고 있는
어린이 성추행범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의 생존본능과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는 센세이셔널한 이슈다.
일단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전문가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치유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는 전국민이다.
전국민이 입은 이 심리적 상처(생존의 위기감)는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해야 한다.
어린이 성추행범이 등장했던 사회적 맥락을 책임지고 검토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사형'은 피해자들의 심리적 상처를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해소하는 방법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많은 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벌들이 다른 학생들을 위한 전시 효과를 노리거나,
때로는 학생으로부터 '교사가' 받은 심리적 상처를 보상해주기 위해 진행된다는 점은
반드시, 열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잘못은 잘못대로 계도받되,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학생이 있다면,
그 상처받은 학생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다.
이 학생이 자신의 상처를 '남이 벌받는 꼴'을 보며 보상받는다면
'내가 아픈 만큼 남도 아파야 한다'라는 잘못된 결론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학급이 있다면,
그 학급의 담임이 학급을 토닥여 주고 잘못의 과정에 대해 성찰해 주어야 한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 스스로 '나도 상처받는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상처를 삭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괜히 '교권'을 들먹이며 '학생 인권과 교권'이 대립되는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학생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권력 집단들의 왜곡된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이다.

잘못한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변화하는 때는 언제일까?

벌을 받으며, 종종 학생이 변화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종종 '**하면 ##받으니 **하지 말아야겠군'하는 동물적 학습에 불과하다.
이건 '**'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아니다.
그 학생은 아마도 뒤에서 침을 뱉으며 학교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고 교사들을 욕할 것이다.

그런데 또 벌을 받으며,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 벌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벌을 주는 교사나 부모와의 '우연한 소통의 순간'에 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조용한 성찰의 번뜩이는 순간에 있다.

그렇다면 벌의 내용은 학생, 교사, 부모의 '소통', 그리고 조용한 '반성'에 집중되어야지
다른 행정적이고 전시적인 절차에 집중된다면 우스운 일이다.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며
'그 잘못 때문에 너희들이 속상했구나'라고 말해주고 그 감정은 감정대로 해소하도록 도와주어야
학생들이 이기적이고 어린애같은 보상게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과정 없이,
"그래, 걔는 이런 잘못을 해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했어. 그렇지?"라고만 말한다면
아이들은 아마도, 훗날, 제 앞가림은 잘하지만 남의 불행 앞에서는 둔감한, 싸이코패스들이 될 것이다.
'남자 친구의 배신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여자 친구가 배신해서 강간범'이 되고
'부모가 상처주었으니 나도 부모를 학대'하고
등등등.

그런데 학교는, 이 과정을 모두 다 성찰하여 학생들과 교사들을 배려하기에는 너무나 근대적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결국은,
근대적인 학교가
살인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자살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강간하는 아이들을 만든다.


AND



1년 넘게 재미붙여 오고 있는 발레.

처음엔 부르주아들의 레저인 것 같아서 꺼려졌는데
직접 가서 보니, 평화로운 음악 속에 평화롭게 팔과 다리를 죽죽 펴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첫눈에 반해버렸다.

처음 며칠은 몸치인 내가 싫어지기도 하고 뚱뚱한 내 모습이 전신 거울에 비춰지는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는데
온몸이 이완되는 시원한 느낌, 조금씩 향상되는 나의 동작들을 느끼며 점점,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즐거운 일은 발레!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이놈의 ㅈㅇㄱ 정책, 그리고 ㅇㅁㅂ과 ㄱㅈㅌ 때문에 작년만큼 열심히 가지는 못하지만
몸은 비록 연습실과 멀리 있어도 마음은, 오매불망 일편단심 오직 발레다.
오늘은 꼭 가야지, 마음먹고 옷을 챙겨 들고 나갔다가 그냥 돌아오는 날은 '마냥 섭섭'하다.

내 발레 역사 최대의 위기는
작년에 교복 치마를 두 번이나 빼앗으며 '생활지도부 교사'와 '교복 수선 학생'으로 만났던  ㄱㅅㅎ양을,
연습실에서 발레복을 입고 마주쳤던 순간. 
우리의 '교복 수선 학생'은 발레로 진로를 결정하기로 마음먹고 연습실에 다니기 시작하신 것.
나의 뚱뚱한 속살들이 여지없이 드러난 모습을, 동료 교사에게도 부끄러울 모습을,
내가 벌 주던 학생에게 보이게 되었던 그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는,
정말 진지하게 발레를 그만둘 것을 고민했지만,
뭐, 어때, 생각하며, 그냥, 다녔다.

나는, 분명 나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ㄱㅅㅎ 양이
'** 선생 뚱뚱하면서 꼴에 발레 다니더라'고 학교에 소문내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소문이 나 몰래 도는지 안 도는지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찌되었든 그런 소문은 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이렇게 내 발레 역사 최대의 위기도 넘어가는가 싶었다.

오늘은 운동이 다 끝나고 서로 다리를 '밀어주는'(사실은 찢어주는) 몸풀기 순서에서
서로 알아서 피해오던 이 ㄱㅅㅎ 양이 웬일인지 스스로 다가오더니 나의 다리를 밀게 되었는데,
아, 어찌나 봐주지도 않고 세게 미시는지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올 정도였지만,
비명을 지르는데도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그저 꾹꾹 눌러댈 뿐인 모습을 보며,
'너 나한테 당했던 거 복수하는거지!' 했는데도 '아니에요'라고 배시시 웃으며 계속 눌러대는 발을 느끼며,
난, 왠지 내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것 같은 이 상황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리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는 심정이 되어버렸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겠다.

아, 이걸로 학생 인권을 침해해 왔던 내 과거를 다 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이제 생활지도부 그만 하고 싶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