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 모임 <만나고 싶었습니다> 두번째 모임, 뜬금없이 서정적인 발제문 2009. 2.21

   

- 여학생 가르치기의 아쉬움

by 우선생

    방금 전 한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발제문이 써지지 않아 핑곗김에 보게 된, 여성판 <죽은 시인의 사회>라 불리는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 전통 있는 명문 여대에 교수로 신규 임용된 진보적 교수 줄리아 로버츠의 이야기다. 이 신참 교수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꿈으로 품고 살아가는 학생들의 가치관에 균열을 내고 보수적인 학교 당국에 맞서 새로운 커리큘럼을 제시하기도 하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하는데, 냉담하던 학생들이 결국에는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응원한다. 학생들이 그녀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마지막 가는 길을 자전거로 따르며 배웅하는 이 장면에서, 그만 눈물이 났다.

    여학생 가르치기의 ‘아쉬움’이라는 제목은 정확히 저 눈물의 근원지를 가리킨다. 나는 가지지 못했던 순간을 그녀가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남학생들이 아닌, 여학생들이기에 더 온전하고 충만했던 기쁨의 순간들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자료로 마련한 여성의 인권을 다룬 영상을 보며 학생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나 공감의 웃음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끌어내고자 하는 그들의 고민들이 글 속에 나타난 것을 읽었을 때, 저희들끼리의 대화 속에서 문득 그들이 성장해가는 것을 느낄 때, ‘나’이기에 털어놓는 것이라 여겨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문득문득 이 아이들이 ‘내가 받았던 것보다는 나은’ 교육을 받고 있는 것 아닐까, 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기대’라는 단어가 여학생들을 이야기하면서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들을 바라보며 동지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험난한 성장기는 나와 다르기를 바라고, 그녀들의 십 년 후의 모습은 보기 싫은 나의 친구 누구누구가 아니기를 바라고, 나아가 나 자신이 학생들을 ‘다른 여성’으로 만드는 데 조금은 일조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우리가 최소한 그녀들을 흔해빠진 여자들로 길러내고 있지는 않는 것이기를, 그래서 언젠가 그들이 우리를 찾아와 함께 여성으로서의 삶을 나누는 동지로 자라주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란다.

    그렇지만 ‘아쉬움’이라는 단어가 결국 등장하고 마는 이유는 저 기대와 바람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만들기에 우리 자신이 너무도 역부족임을, 곳곳에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여학생들을 정숙하고 ‘바람직한’ 여성으로 길러내기를 요구하고, 더불어 여교사란 그런 여성으로서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은근한 압력이 학교 내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동료들 또한 그 역할 모델로서의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곤 한다. 한편 학생들은 영화 속에서처럼 ‘스위트 홈’의 여주인으로서의 꿈(그 꿈이 커리어 우먼, 혹은 오피스 레이디의 꿈이라 해도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다)에 사로잡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더 힘든 경우는 삶의 모든 의욕을 상실한 학생들이다.) 남녀 공학에선 남학생들과의 관계(권력 관계든, 연애 관계든) 속에서 왜곡된 ‘여학생다움’이 횡행하고 있거나 그들의 목소리 자체가 묻혀있기 쉽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입시 교육의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또한 존재하고, 틈틈이 분위기 잡는답시고 ‘꼰대’같은 모습도 보여주어야 할 상황이 종종 찾아오곤 한다. 우리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현실의 교실 속에는, 교사와 학생의 배움과 나눔이 오가는 아름다운 기쁨과 충만의 순간보다는 유치하디 유치한 기 싸움, 협상, 배신, 거짓말, 삐짐과 같은 것들이 더 자주 있을지도 모른다. ‘여학생들은 자주 삐져서 피곤하다’는 말은 단지 편견에서 나온 말이지만은 않다. 그들은 확실히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그것은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더 많은 것을 교사로부터 기대하기 때문이다. 남고의 교무실 풍경과 여고의 교무실 풍경을 내 짧은 경험에서나마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몇몇 여학생들은 교사들과 끊임없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고, 그 관계가 본인들이 기대한 것과 다르게 진행될 때, 그들은 ‘삐짐’이라는 의사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학생들이 가르치기 피곤하다’는 말이 듣기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말을 여교사에게 들을 때 좀 더 섭섭한데, 그것은 그들이 내가 앞서 서술한 여학생에 대한 ‘기대’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인 것 같다. 삐지는 여학생들이란, 교사로부터 특별한 관계를 기대하는 학생들이고, 나 또한 그들과 특별한 관계 맺기를 바라는 교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바라는 관계와 내가 바라는 관계가 같지 않다는 데 있지, 그들이 특별한 관계를 바라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그 특별한 관계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우리의 여학생 교육은 한 마디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지금의 여학생 문화는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가 제시해야 할 새로운 여학생 주체의 모델은 무엇일까? 여교사 - 여학생 관계의 전범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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