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해지기 전의 초가을,
중간고사 중인 교실의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덕분에 시험 감독이 지겹지 않다.

더 쌀쌀해지기 전에 이 바람들을 만끽하고 싶어 조바심내고 있었는데,
며칠 전엔 어둠이 내리는 합정동 까페에서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맥주를 마셨고
오늘은 강화도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전어를 먹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갇혀 살아가면서도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라는 아리아를 교도소 하늘 위로 올려보내며,
바깥과 통하는 문을 잠그고 손깍지로 머리를 받친 채 눈 감고 다리를 쭉 펴고 노래를 듣던
팀 로빈스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의 80%는 이 장면 덕택이다.)

인생이 싱겁고 시시한 것 같아 조바심 나던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내 나름대로 거창하다 여길 만한 일을 해내야만 뿌듯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런 소소한 행복들에 세상을 다 가진 듯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런 연습을 할 때도 된 것 같다.

그리고
가을맞이 시 한 수,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유안진


겨울에는 불광동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시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도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 만 눈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께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여름날 산마루의 소낙비는 이슬비로 몸 바꾸고 

단풍든 산허리에 아지랑거리는 봄의 실루엣 

쌓이는 낙엽 밑에는 봄나물 꽃다지 노랑웃음도 쌓이지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춘천(春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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