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분회보에 실릴, 신입 조합원 인사글
창피해서 못 살겠다
“나 있지? 챙피한 게 너무 많아서 진짜 미치겠어. 난 소주보다 맥주를 마시고 싶은데 맥주 마시는 거 너무 챙피해. 나두, 나두 데이트 같은 거 하고 싶은데 그런 거 하면 너무 챙피해질 것 같애.”
그 때 난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아무리 술에 취해 하는 대사라지만 잘 이해가 안 갔다. 맥주 마시는 게 소주 마시는 것보다 왜 창피할까? 맥주보다 소주가 더 독한 술인데 여자가 독한 술 마시는 게 더 창피한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데이트는, 창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자랑 손잡고 걸으면 남들 앞에서 창피하기도 하고 그렇겠지, 하고.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 친구의 말에 다시 혜린이 흐느끼며 더듬더듬 대답한다.
“오늘, 기독교 회관 갔었어. 동일방직 애들이 단식 농성 하는 거 봤어.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난 쌀을 샀어. 걔들은 목숨 걸구 단식하구 있는데 난 돈을 내구 쌀을 샀다구!”
78년,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부모 형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뼈빠지게 일하던, 기껏해야 스물 서너 살이나 되었을 여성 노동자들. 그들이 민주노조를 만들고 단결했다는 이유로 사측은 그들에게 인분(人糞)을 뿌려대는 등의 험악한 짓을 서슴지 않았고, 여기에 반발한 노동자들은 열흘 남짓 단식 농성을 벌였다. 부잣집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곱게만 자라난 혜린은, 이들을 보며, 이들이 밥을 굶어가며 투쟁하는데 자신은 내일의 배를 채우기 위해 쌀을 사며, 그래, 참 창피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이젠 이런 창피함에 민감해져야겠다고.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의 삶은 눈감은 채로 내 앞길만 생각하는 그런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의미로 창피해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국민인 것이 창피한 것 투성이다. 대체 지금이 어느 땐가? 21세기가 된 지 10년이나 되었다. 독재 정권에 저항해서 학생들이 목숨을 잃어갔던 419가 지난 지는 50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몸을 불태운 지는 40년, 군부 독재 세력이 광주의 죄 없는 시민들을 빨갱이라며 총을 쏴댔던 지는 30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유신 시대의 세력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노동조합 활동을 원천봉쇄하고 있는데, 최근 출간된 이 기업을 비판하는 서적은 신문 광고도 실리지 못했다. 언론의 자유가 지켜져야 할 각 방송국들의 편성권을, 국가가 독점하려고 한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법을 제멋대로 이용해서 정권에 불리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려고 하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면 얼마나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보겠는가? 그리고 나라의 온 산과 강을 헤집으면서 ‘친환경’을 이야기하는 우리 대통령도, 천박하고 번지르르한 빌딩과 아파트를 세워대며 ‘명품 도시’를 이야기하는 우리 서울 시장도, 정말 창피해 죽겠다.
그리고 또 교사로서도 창피해서 못 살겠다. 성적의 결과에 따라 학생들에게 차별적인 교육 혜택이 가는 것도 학생들 앞에서 참 낯부끄러운 일인데, 점점 바뀌어 가고 있는 교육 제도를 보면 이젠 정말 노골적으로 학생들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교육 내용이 달라지도록 제도가 정비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고 화가 난다. **고에 가까운 곳에 사는 학생들이, 등록금 때문에 **고에 오기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고 창피해 죽겠다. 그 학생들이 왜 나는 그 학교에 갈 수 없느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특별전형으로 응시하면 공짜로도 올 수 있으니 그것에 도전해보면 된다고, 그러면 되니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대답해버리면 그만일까? 그걸 안내해 준다는 생각을 해도 나는 왠지 얼굴이 달아오른다. 미안해진다.
이렇게 자꾸 생각하다보니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건 내 자신이다. 중3 시절 생각했던 것은 잊고, 다른 이들의 삶은 눈 감은 채로 일단 내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살아왔던 것 같다. 교사로서 편안히 살기 위해 학생들의 입장은 눈감아 버리곤 했던 것 같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잘못이라고 이야기한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창피한 줄 모르고 살아온 지 참 오래되었다. 학생들 앞에서 본받을 만한 모습은 못 보여도, 최소한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할 텐데, 큰일이다. 그리고 저 자신이 가장 못난 줄도 모르고 이렇게 남들 앞에서 전교조 조합원입네 하며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글을 쓰게 되었으니, 이것도 참, 낯뜨거운 일이다. 정말,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