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자아존중감 | 3 ARTICLE 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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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6.26 공감과 이해, 잘못과 벌
  3. 2010.06.11 자아존중감과 나르시시즘

카테고리 없음 2010. 9. 16. 00:06


맛이 간 하드를 교환받으러 용산에 갔다가,
길을 좀 헤매다가 겨우 대리점을 찾아갔는데,
이미 시간이 지나서 접수도 받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는 아저씨의 불친절한 말에
그리고 이미 여러 번 이 하드 때문에 삽질하느라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너무 화가 나서 몇 걸음 걸어나와서 욕을 한 마디 하고
어쩔 줄을 모르겠어서 벤치에 앉았다.

1 찾아가는 과정에서 고생을 했기 때문에
2 그 곳을 안내해준 수리업체 아가씨가 교환 업무가 마감됐을지도 모른다는 걸 말을 안해줘서
3 하드에 써있던 전화번호에 전화했을 때 다섯시까지만 전화받는다고 하는 걸 들었는데도 갔던 내가 바보같아서
4 그치만 안 가볼수도 없었던 상황이 화가나서 (그들은 전화도 늘 잘 연결도 안 되었었고)
5 어딘가에 이 업체를 마구 까대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곳도 마땅히 없어서

이런 것들이 화의 이유였다.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하다가
몸에 힘이 들어간 부분에 공기를 불어넣는다고 생각하고 숨을 좀 쉬어봤다.

그랬더니 눈물이 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서는 막 생각이 이어졌다.
세상에는 정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투성이고
나는 외롭고
나는 너무 힘이 없고
세상은 어찌할 수 없는 폭력 투성이고
이럴 때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등등등.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지난번 용산 왔을 때 백화점에서 산 속옷을 교환할 수 있는지 백화점에 전화를 했다.
백화점은 완전 친절했다.
전화도 바로 받고
연결도 바로 되고
매장 언니는 완전 유쾌했다.
내가 기분이 저 따위였으므로 목소리가 곱게 나갔을리 없는데도,
완전 친절하게 다 찾아봐 준단다.

끊고 나서 생각해 본다.
백화점은 항상 저렇다.
저렇게 교육받겠지.
안 그러면 혼나겠지.
근데 아까 그 직원은 그렇게 불친절한 걸 보니
그런 욕을 먹을만한 인터넷 게시판도 없고 상사도 없나보다.
그 직원의 불친절함이 차라리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시 조금 내가 좋아졌다.
대리점에서 거절받고 돌아서서 욕을 했을 때는 내가 매우 싫었었다.

집에 와서는 한 시간 정도 걷기를 했다.
또 돌아와서 스트레칭도 했다.

내가 조금 더 좋아졌다.


AND


"감정은
1. 몸의 상태다.
2. 최초의 판단이다.
3. '생존'과 연관된 감각과 판단이다. (좋다 : 살 것 같다 / 나쁘다 : 못 살겠다)
4. 인지되지 못한다."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는 태어날 때 이미 숙성한 상태인 반면
인지 능력을 관장하는 해마체는 만 3세에 와서야 숙성된다.
인간에게 남는 최초의 기억은 만 3세 이전의 감정적 기억들이고 이것이 인간을 결정한다."

"이해받고 공감받는 경험을 해 본 아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된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자존감이 높아져야 관용적이 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한 당신이 나의 **가 되어주어 나는 **로서 참 행복해요"라고 자주 말해보자."

- 어제 교직원 연수, 감신대 안석모 교수님의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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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판단이 그 사람의 입장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입장에 따라 뒷받침 논거들이 만들어지고는 한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논리로만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생존'이 오고 가는 경험을 한 보수적 노인네들을 '논리'로만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흔히들 이렇게까지만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논리로만은 안 되고 그들을 '감동'시켜야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감동이 아닌 억지스러움만 남을 수 있다.

감동이 만들어지는 경로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하나는 상처받은 경험에서 만들어 낸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결론을 역전시킬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는데 막상 정글과 같은 사회를 만나고 받았던 심리적 충격을 보상하는 경험,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절망하고 포기하며 세운 심리적 방어벽을 깨뜨리는 경험,
이런 경험들이 감동을 만들고 사람을 바꾼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맞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뀐다는 말이 맞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덕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경험이 만들어낸 심리적 습관들이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습관은 말 그대로 '습관'이어서,
이 습관과 성격이 결국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 하더라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하는 판단이 사실은 '(상처로부터 비롯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은,
인지하기 어려운 '감정'을 '단지 감정'으로 인지하게 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렵다.

이러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상처의 경험을 역전시키는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경험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지만,
'공감과 이해'의 여유를 가진 누군가가 주변에서 '의지를 가지고' 돌보아주는 것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쟤는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하는,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싸가지 없게 들리는 말을
학생들은 쉽게 내뱉는다.
그리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교사들도 많다.

그러나 그 '벌'은, 실은, 잘못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계도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쟤의 심한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당한 사람의 심리적 상처를 보상하는 과정에서 요구되고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심리적 상처의 보상은, 벌과 분리된, 심리적 상처 치유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테면 '사형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최근 자주 언급되고 있는
어린이 성추행범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의 생존본능과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는 센세이셔널한 이슈다.
일단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전문가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치유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는 전국민이다.
전국민이 입은 이 심리적 상처(생존의 위기감)는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해야 한다.
어린이 성추행범이 등장했던 사회적 맥락을 책임지고 검토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사형'은 피해자들의 심리적 상처를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해소하는 방법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많은 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벌들이 다른 학생들을 위한 전시 효과를 노리거나,
때로는 학생으로부터 '교사가' 받은 심리적 상처를 보상해주기 위해 진행된다는 점은
반드시, 열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잘못은 잘못대로 계도받되,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학생이 있다면,
그 상처받은 학생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다.
이 학생이 자신의 상처를 '남이 벌받는 꼴'을 보며 보상받는다면
'내가 아픈 만큼 남도 아파야 한다'라는 잘못된 결론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학급이 있다면,
그 학급의 담임이 학급을 토닥여 주고 잘못의 과정에 대해 성찰해 주어야 한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 스스로 '나도 상처받는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상처를 삭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괜히 '교권'을 들먹이며 '학생 인권과 교권'이 대립되는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학생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권력 집단들의 왜곡된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이다.

잘못한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변화하는 때는 언제일까?

벌을 받으며, 종종 학생이 변화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종종 '**하면 ##받으니 **하지 말아야겠군'하는 동물적 학습에 불과하다.
이건 '**'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아니다.
그 학생은 아마도 뒤에서 침을 뱉으며 학교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고 교사들을 욕할 것이다.

그런데 또 벌을 받으며,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 벌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벌을 주는 교사나 부모와의 '우연한 소통의 순간'에 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조용한 성찰의 번뜩이는 순간에 있다.

그렇다면 벌의 내용은 학생, 교사, 부모의 '소통', 그리고 조용한 '반성'에 집중되어야지
다른 행정적이고 전시적인 절차에 집중된다면 우스운 일이다.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며
'그 잘못 때문에 너희들이 속상했구나'라고 말해주고 그 감정은 감정대로 해소하도록 도와주어야
학생들이 이기적이고 어린애같은 보상게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과정 없이,
"그래, 걔는 이런 잘못을 해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했어. 그렇지?"라고만 말한다면
아이들은 아마도, 훗날, 제 앞가림은 잘하지만 남의 불행 앞에서는 둔감한, 싸이코패스들이 될 것이다.
'남자 친구의 배신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여자 친구가 배신해서 강간범'이 되고
'부모가 상처주었으니 나도 부모를 학대'하고
등등등.

그런데 학교는, 이 과정을 모두 다 성찰하여 학생들과 교사들을 배려하기에는 너무나 근대적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결국은,
근대적인 학교가
살인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자살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강간하는 아이들을 만든다.


AND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들 한다. 보통 '자존감'을 설명하면서 쓰이는 말이다. 그리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정말 많이 돌아다니는 말인데, 나에게는 항상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의 실체를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나 자신을 애지중지 여기기는 하지만 자존감이 높아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왠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또 그런데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잘난 소리를 엄청나게 지껄이는, 그래서 자존감이 엄청 높고 자기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남에 대한 사랑은 할 줄 모르는 모습들을 많이 보면서, 저 사람들도 내가 바라는 모습과는 좀 다른데, 싶었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성숙한 자아존중감을 가진 사람)과 억지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자기 자신을 잘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진정 존중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자아를 남들 앞에서 훼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종종 거짓말을 하곤 한다.

자기 자신을 잘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이를 건강하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렇지만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을 위선/위악으로 포장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자기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한다.

자기 자신을 잘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는 일에 그저 투명하고, 자신있고, 자연스럽다. 주변에서 이를 보기에 불쾌해지지 않는다. 이를 칭찬받는 일에도 자연스럽고, 적절히 감사해하고 적절히 겸손해 한다.
그렇지만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장점이 자신의 전부다. 이것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이들의 최대 위기. 기를 써서 장점과 강점을 드러내는 데에 조급해 해서 이를 지켜보는 일이 불편해진다. 이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의 종이 되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들의 적이다. 인정받지 못하면 상처받거나, 이 일이 증오와 분노의 계기가 된다.

지난 날,
내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겨우) 나르시시스트(에 지나지 않는 이)들 여럿을 선망하고, 사랑해왔던 것을 
(그래서 결국은 매번 상처받았음을) 이제야 깨닫고 무릎을 치는 순간이다. 
한 마디로 번지수를 잘못 찾아갔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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