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 보기 좋게 편집된 버전은 여기로 고고 http://www.personweb.com/main/interview/250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 - 추혜인
의료 생활협동조합은 지역 주민들이 출자하여 조합을 만들고, 운영하는 대안적 의료 서비스이다. 주민들이 의료 기관의 운영 주체이므로 민주적 운영이 가능하고, 수익의 용도도 주민들이 직접 결정한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들을 위한 의료 생활협동조합을 꿈꾸는 ‘여성주의 의료 생활협동조합(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의사 추혜인 씨를 만났다.
두리번 / @redpebl
‘혼자서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 씩씩하게 생각하다가도, 그 마음이 흔들리고 문득 겁이 날 때는, 몸이 아플 때다. “늙어 혼자 지내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자식도 없이 서러워서 어쩌려고 그래?”하는 부모님의 걱정에 코웃음 치다가도, 가끔은 그 말이 뇌리에 깊이 박히기도 한다.
비혼(非婚) 상태의 여성들은 ‘노후 대비를 철저히 해 놓았느냐?’는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밥벌이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무엇보다도 독거 생활 중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질병’은 실로 두렵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그럼에도 병원과 의사, 나아가 현대 의학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현대 의료 행위는 ‘표준’에 의거하고 있다. 표준 체중, 표준 키, 표준 체지방, 표준 혈압, 표준 사이즈. 표준의 홍수 속에서 그것을 넘어서거나 혹은 미치지 못 하는 우리들은 늘 전전긍긍한다. 언젠가 읽었던 현대 의학에 관한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 의학이 표준으로 삼았던 기준은 대부분 서양의 성인 남성들이라고, 그렇기에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미달한 존재로 다루어지거나 대상화되거나 심지어 무시되었다는 사실.
의사 추혜인 씨가 여성들을 위한 의료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가웠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의료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필수 영역이라면 우리가 직접 뛰어 들어 그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의료 생협은 의료 서비스의 세계에서, 아니 적어도 나의 몸에 관한 한 내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주지 않을까? 기대감을 품고 추혜인 씨를 만났다.
병원의 주인은 주민이다.
퍼슨웹(이하 ‘퍼’) : 요즘 여성주의 의료 생협(준)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추혜인(이하 ‘추’) : 축제와 같이 특별한 지역 행사가 있을 때, 거리에서 하는 건강 검진을 한번씩 하고 있어요.
퍼 : 여성주의 의료 생협(준)의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femihealth)에 들어가 구경해보니, 아기자기한 소모임 활동들도 활발하던데요.
추 : 네. 여러 가지 소모임들도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산행, 걷기 같은 취미 모임도 있고, 텃밭 가꾸기, 밑반찬 만들기 모임도 있고요. 밑반찬 만들기 모임, 참 재미있어요. 혼자 사는 사람들은 반찬 만들어 먹기가 애매하잖아요. 아마 지금도 모여서 반찬 만드는 모임 하고 있을 걸요?
퍼 : 그렇군요, 아직은 준비 단계로 알고 있는데, 정식 조합이 되기 위한 절차는요?
추 : 의료 생협은 조합원들이 직접 출자하여 의료 기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그 수익을 조합원들의 뜻에 따라 쓰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협동조합을 설립하려면 법적으로 300명의 설립 동의인과 3000만원의 출자금이 있어야 하고요, 지금 저희 의료 생협(준)의 조합원은 백 명 정도. 그 중 의사들은 7-8분이 계시고, 의대생들도 있고요.
퍼 : 한창 준비 단계군요.
추 : 그렇죠, 조합이 병원을 세울 수 있는 규모가 되려면 조합원이 천 세대는 필요해요. 그래야 일정 규모의 운영이 가능해요.
퍼 : 소위 ‘가짜’ 의료 생협도 많다고 하던데요?
추 : 네, 놀라지 마세요, 지금 사실은 한국에 의료 생협 백여 개가 있어요. 그런데 이 중 상당수는 ‘가짜’죠. 현행 의료법 상, 의사가 아니면 의원을 개원할 수 없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의사는 아니지만 병원을 만들어서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이 병원을 세우는 법이 바로 의료 생협을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병원을 세운 다음 의사를 고용하고 병원에서 나는 수익으로 돈을 버는 거죠.
퍼 : 생협이라는 제도를 악용하는 거네요.
추 : 네, 그런 가짜 생협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브로커도 있어요. 법에서 지정한 서류들을 대신 준비해 주고, 설립 동의인도 가짜로 모집해 주고, 의사도 데려다 주는 거예요.
퍼 : 그럼 진짜 생활협동조합다운 의료 생협은 얼마나 있나요?
추 : 지금 열세 개가 이미 세워져 있고,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두 개 있어요. 서울엔 영등포와 노원에 있고, 마포구와 은평구*에서 준비 중이에요. 나머지는 안성, 안산, 인천, 수원, 용인, 시흥, 성남, 전주, 청주, 대전에 있고요.
* 여성주의 의료 생협(준) 한겨레 기사 보러 가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370681.html
퍼 : 주로 수도권이네요.
추 : 네, 많이 부족해요. 더 많이 생겨야지요.
퍼 : 은평구에서 의료 생협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추 : 병원은 집에서 가까워야 하잖아요. 지역의 기반이 필요하겠더군요. 그래서 조사를 해 보니, 은평구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균형 잡힌 인구 분포를 보이는데, 서울시에서 사망률이 굉장히 높은 편이에요.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의 비율도 높고, 암 사망률도 높고요.
퍼 : 기존 의료 서비스의 빈틈이 있는 거군요.
추 : 네. 주민들의 의료 욕구에 대해서 충족되는 부분이 많지 않은, 의료 생협이 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큰 지역이었어요. 이미 설립되어 있는 은평 두레 생협에서 의료 생협을 검토하고 있던 참이라 그분들과도 마침 뜻이 맞았죠.
퍼 : 다른 지역 의료 생협과 준비하고 계신 여성주의 의료 생협은 뭐가 다를까요?
추 :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여성주의적 의료 운동은, 의료인의 절대 권력을 부정하고, 의료 지식인에 독점된 의료 서비스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서 출발하거든요.
퍼 : 의료 서비스에서 정말 필요한 측면입니다.
추 : 그렇죠. 의료 생협 운동도 민중에 의해서, 그리고 민중을 위해서 의료 지식을 사용하자는 것이죠. 목표가 같아요. 우리가 여성주의 의료의 실천 양태들로 고민하던 걸 이미 여러 지역 의료 생협에서 많이 구현하고 있더군요. 다른 지역 의료 생협도 거의 여성분들이 중심이 되어 있어요. 이게 전반적인 흐름이죠.
퍼 : 그렇군요.
추 : 다만, 우리는 의원이 수익을 냈을 때 수익을 좀 다른 것에 쓸 수는 있을 거예요.
퍼 : 이를테면?
추 : 지역에 여성 건강 연구소를 만든다든가, 지역 여성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기획할 수 있겠죠.
일본 미나미 의료 생협
퍼 : 일본에서는 의료 생협 운동이 활발하다면서요?
추 : 예. 작년 10월에 일본의 의료 생협을 보러 갈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많은 걸 느꼈어요.
퍼 : 어떠셨어요?
추 : 한국 의료 생협 연대(http://www.medcoop.or.kr/ )라고 의료 생협을 지원하는 단체가 있어요. 여기서 일본 연수단을 파견해서, 일본에서도 의료 생협 운동의 교과서라 불리는, 나고야 시에 있는 미나미 구의 의료 생협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어요.
퍼 : 그곳에서는 주민들이 실제로 많은 혜택을 받나요?
추 : 네. 미나미 의료 생협은 규모가 큰 생협이죠. 미나미 구에서 가장 큰 병원을 의료 생협이 운영하고 있어요. 조합원이 6만 3천 세대나 되죠. 여기 소속돼서 일하는 의사만 70명이고, 직원은 천 명 가까이 돼요.
퍼 : 다른 병원과 비교했을 때, 그 병원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추 : 조합원이 병원의 주인이라는 점이 좋죠. 병원을 주민들이 운영하고, 주민들에게 그 수익이 돌아간다는 점. 그 병원이 만들어진 과정도 참 감동적이에요.
퍼 : 어떤 과정이기에?
추 : 5년 전에 원래 있던 낡은 병원을 고쳐 새로 짓자고 결정을 한 후에, 주민들이 병원 건설에 관련된 모든 것을 의논하는 기구, ‘천인회(千人會)’를 만들었대요.
퍼 : 천 명이 모이는 건가요?
추 : 모든 사람이 모여 모든 것을 의논하자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그런 이름을 붙인 거래요, 그런데 회의를 하면 보통 백 명 이상은 모였다고 해요.
퍼 : 대단한 관심입니다.
추 : 그렇죠. 병원이 세워지기까지 마흔다섯 번의 회의를 했대요. 병원의 디자인부터, 병원에서 일할 사람, 병원의 위치, 병원을 건설할 돈 마련의 방법까지 모두. 그래서 그런지 이 병원이 가서 보면 디자인 하나하나부터 주민을 위한 병원이라는 게 흘러나오더군요.
퍼 : 어떤 점이 그랬나요?
추 : 이 병원은 마을과 지하철 역 사이에 세워져 있어요. 마을에 가깝게 하기 위해서죠. 보통 병원 부지가 크면 사람들이 오고 갈 때 병원을 돌아서 지하철역으로 가야 하는데, 이 병원은 부지의 앞뒤를 뻥 뚫어 놓고 병원을 가로질러 갈 수 있게 부지 안쪽에 마을길을 내 놓았더군요. 그러니 병원에 오고 가는 게 편안한 거죠. 이게 다 조합원들 아이디어래요.
퍼 : 와, 대단. 병원을 가로질러 간다!
추 : 이 병원은 아프지 않아도 누구나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에요. 병원 안에 마을 도서관, 사랑방, 보육원, 뿐만 아니라 직원들을 위한 탁아시설이 있어요. 간호사들이 맡길 수 있는 야간 탁아도 되고요. 병원 안 큰 헬스센터는 누구나 등록할 수 있고, 운동 처방사가 환자 운동 처방도 해 주죠.
퍼 : 부럽네요.
추 : 병원 안에 있는 보육원에서, 아픈 아이들에 대한 특별한 보살핌이 가능해요. 아이가 조금 아프면 이곳에 맡기고 출근을 할 수 있는 거죠. 간호사들이 보다가 아이 상태가 나빠지면 의사들 진료를 받도록 연결해 준대요.
추 :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부인과가 조산소를 함께 운영한다는 점이었어요.
퍼 : 왜죠?
추 : 조합원들이 요구한 거라고 해요. ‘아기를 낳는 과정은 질병이 아니다.’, ‘조산원의 도움만으로 아기를 낳고 싶다,’고 요구해서 조산소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퍼 : ‘질병이 아니다.’ 그렇죠.
추 : 미나미 의료 생협의 경우 운영 주체들 중에 여성들이 많아요. 70대 할머니도 계신데 이분은 “일본 평화헌법을 사수하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세요. 매일 그 티셔츠를, 색깔과 두께, 길이만 달리하며 입으세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면서 취미로 미나미 구 근처에 있는 갯벌에 새를 보러 나가시는데, 그러려면 갯벌이 살아 있어야 하니까, 갯벌 살리기 운동도 하세요.
퍼 : 정말 멋진 분이네요.
추 : 맞아요. 그런 분들이 의료 생협에 계세요. 일본 의료 생협에는 상무이사라는 제도가 있는데, 월급은 받지 않으면서 똑같이 출퇴근을 하는 거래요. 이 제도 덕분에 주변의 주부나 퇴직한 분들이 상무이사를 하러 오셔서 지역 공동체에 정말 필요한 일들을 모색해 생협에서 일구어 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할머니와 같은 분들이 동네를 위해서 일을 하실 수 있는 거고, 실제로 동네가 정말 좋아지더군요.
의사를 신뢰하지 않는 사회
퍼 : 지금 서울대 병원에서 전공의(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계시죠? 병원에서 근무하시면서, ‘이래서 의료 생협 꼭 필요해.’라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추 : 많죠. 이를테면, 저는 입원하는 환자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만약 저분이 지역 사회에서 의료 생협을 만났다면, 가까운 곳에서 통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충분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아 답답하지요.
퍼 : 의료 생협이 일종의 주치의 역할을 하는 거죠.
추 : 네. 의료 생협이 생기면, 가까운 곳에 내 주치의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의료 생협은 주치의를 추구하거든요. 내 주치의가 가까운 곳에 있다면 좋을 것 같지 않나요?
퍼 : 제가 원하는 바죠.(웃음)
추 : 지금 제가 서울대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있으니 제가 하는 진료 행위에 대해서 사람들이 특별히 의심하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 서울대 병원을 벗어난 다른 곳이라면, 아마 ‘저 의사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진료를 보고 있다’는 의심을 많이 하실 거예요.
퍼 :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가 많이 깨어진 상태라는 말씀이시죠?
추 : 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의사를 신뢰하지 않잖아요.
퍼 : 그렇게 보면 의료 생협이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더 좋은 제도일 수 있겠네요.
추 : 그럴 겁니다.
퍼 :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준비하고 계시죠? 가정의학과는 어떤 곳인가요?
추 : 가정의학과 레지던트는, 모든 과의 실습을 다 거쳐요. 지역 사회 커뮤니티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흔하게 걸릴 수 있는 병들에 대해 배우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가정의학과 의사는 전문의이면서도 전문적인 분야가 있는 건 아니죠.
퍼 : 서울대 병원은 3차 진료기관인데, 굳이 이곳 가정의학과로 오는 사람들은 어떤 분들이에요?
추 : 다양하죠. 어떤 분들은, 몸이 정말로 불편한데, 다른 곳을 아무리 돌아도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해서 돌고 돌다가 가정의학과로 오세요. 또 어떤 분들은 단순히 서울대 병원 가까이에 사시니까 오시기도 하고요.
퍼 : 진료비가 비쌀 텐데요.
추 : 네, 그런데 여기에 오면 상담을 충분히 받을 수 있거든요. 오늘도, 네 시간 반 동안 열두 분을 만났어요. 다른 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퍼 : 가정의학과라서 가능한 건가요?
추 : 그렇죠. 저희는 다른 과와 달리 저희를 찾아오는 분의 건강 상태 전반을 체크하고 나이와 성별에 맞는 건강검진을 제때 받고 있나 챙겨요. 가령 55세 여성이 유방 촬영을 한 번도 안 했다면 받도록 하죠. 다른 과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죠.
퍼 :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검사들이 병원의 수익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문을 갖고 있기도 하죠.
추 : 음……, 병원에서 건강검진센터가 수익모델로서 기능하고 있는 건 사실이죠. 이를테면 서울대 병원은 최근 건강검진센터를 강남에 새로 열었어요. 잠실의 아산 병원, 일원의 삼성 의료원을 의식한 결정이죠. 서울대 병원 본원이 있는 혜화동이 지리적으로 강남과 떨어져 있으니, 건강검진센터를 강남에 열어서 그곳의 환자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성모 병원이, 다른 곳에서 나는 모든 수익을 다 강남성모병원에 투자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퍼 : 그랬군요.
추 : 병원 운영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런 걸 고려하죠. 그런데 아직은 외래에서 환자를 만나는 전공의들에게까지 그런 수익을 내기를 요구하지는 않아요. 단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꼼꼼히 진료하는 법을 잘 배우기를 원하죠. 우리는 단지 예방의학의 관점에서 챙기도록 정해져 있는 검사들을 때에 맞게 하도록 챙겨주는 거예요.
퍼 : 의대를 졸업한 분들이, 성별 때문에 원하는 전공을 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추 : 최소한 내과 계열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내과 계열에서는 여자 선생님들이 좀 더 꼼꼼히 환자를 본다고 평가받고 있고, 실제로 좀 더 실력 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래서 환자분들도, 선생님들도, 여자 레지던트를 뽑는 것에 대해서는 별 차별이 없어요. 그런데 여자 의사가 이 병원에서 교수가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서울대 병원에는 아직도 산부인과에 여자 의사가 없는 걸요.
퍼 : 환자들이 선생님을 대하는 건 어떤가요?
추 : 서울대 병원 같은 경우는 여자 의사가 워낙 많아져서, 이젠 여자 의사라고 이상하게 보는 눈은 없어요. 만약 여기가 작은 시골 병원이라면 여자 의사를 보며 이상하다 여길 수도 있겠죠. 큰 대학 병원의 고도화된 시스템 속에서는, 의사의 성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군요.
퍼 : 큰 병원에서는 의사 선생님들 개개인이 잘 드러나지 않나 봐요.
추 : 네, 맞아요. 그런데 응급실에서 이런 적은 있었어요. 응급실에서는 보통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수술복을 입고 일해요. 그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저를 의사인 줄 잘 알아보지 못 해요. 그래서 저를 종종 ‘아가씨, 언니’ 이렇게 부르세요. 같은 상황에서도 남자 의사들에게는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시곤 해요. 저를 앞에 두고 ‘의사 와보라’고 하는 상황도 있었어요.
퍼 : 간호사와의 관계는 어때요?
추 : 제가 의대생일 때는, 여자 선배들 중에 간호사와의 관계로 고민하는 언니들이 많았어요. 간호사들도 우리 사회에서 자라난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 의사의 지시는 당연한 권력 관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여자 의사의 지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던 때도 있었던 거죠. 그런 입장에 처한 여자 의사들은 ‘여자라서 무시당했다’는 생각에서 감정이 악화되고, 소통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퍼 : 요즘은요?
추 : 지금은 많이 달라졌더군요. 여자 의사가 점점 많아져서 서로 훈련이 많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최근의 젊은 의사 세대들은 간호사와 관계를 단지 하는 일의 성격과 그 역할이 다른 것이라고 받아들여요. 지시와 복종의 관계라기보다는 협동하는 관계, 일의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요즘도 간호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의사들도 많죠. 제가 좀, 특별히 관계가 좋은 편이에요, 하하.
여성주의 의료로 가는 길
퍼 : 공대생이었다가 여성들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재수를 해서 다시 의대에 입학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때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추 : 시민 단체로 자원 활동을 가는 계기가 있었어요. 한 학생운동 그룹에서 2학년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 각 단체 자원 활동을 연결했거든요. 평소 여성 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한국 성폭력 상담소로 자원 활동을 갔죠.
퍼 : 가보니 어땠나요?
추 : 96년도에 성폭력 방지를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난 직후라서 일은 마구 쏟아지는데 전국에 성폭력을 다루는 전문기관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전국에 성폭력 상담소라고는 달랑 하나였으니까요. 그때 상담소에 계신 분이 성폭력 사건 해결에서는 의료 지원이 절실한데, 너무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그 역할을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었죠.
퍼 : 의료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셨을까요?
추 : 그때만 해도 자세히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를테면 이런 일들이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응급실에서 강간 피해자를 환자로 받았었는데, 그 환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적이 있거든요. 환자가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이 가해자의 폭행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또 의학적으로 봤을 때, 몸에 나 있는 상처들이 어떻게 강간이라는 폭력을 시사하는지에 대해 말할 의사가 필요한 거죠.
퍼 : 그런 역할을, 의사들이 종종 하고 있나요?
추 : 잘 안 하지요. 그리고 재판정까지 가기가 굉장히 애매해요.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구요.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는 것 외에도, 의사가 필요한 일은 많아요. 성폭력과 같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릴 수 있죠.
퍼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요?
추 : 네. 교통사고나 지진과 같은 큰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 경우에, 급성 스트레스 반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랜 기간을 괴로워할 수 있어요. 잠도 못 자고,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고요. 그럴 때 정신과 의사들이 즉각적으로 개입을 해 주면, 큰 도움이 되죠.
퍼 : 그렇군요.
추 : 최근에는 ‘원스톱 센터’라고 부르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응급실이 따로 생겨서 제도적으로 보완이 되고는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해요. 꼭 의사뿐만 아니라, 그런 피해를 받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람을 얼마나 따뜻하고 친절하게 배려하느냐가 훗날에 남을 상처를 크게 줄여줄 수 있어요. 반대로 그렇지 못한 경우에 그 상처가 평생을 갈 수도 있구요.
퍼 : 의대 진학 이후 생활은 어떠셨나요?
추 : 당시 학생회장을 하던 선배가 학생회 여성위원회에서 뜻을 펼쳐보라고 제안하는 바람에 입학하자마자 그 일을 맡았죠. 그해 마침, 조교에 대한 성폭력 가해자로 악명 높은 화학과 신정휴 교수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이 났어요. 성폭력 피해자가 신 교수에게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어요. 그 판결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느라 무척 바빴죠.
퍼 : 의료 생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인가요?
추 : 최근에 일기를 뒤져보니, 2004년 8월 14일부터였더군요.
퍼 : 그때는 아직 의대생이었을 텐데,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추 : 여성주의를 실현하는 병원, 여성들의 권익을 실질적으로 신장시킬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쭉 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그것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계획도 감도 없었죠. 의사로서 환자를 만나는 일도 하고 싶지만,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의사도 함께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방법도 몰랐고요.
퍼 : 네.
추 : 그 즈음 건강세상 네트워크에서 일하고 계셨던 김창보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이 제 진로 계획에 대해 물으시길래, 여성주의적인 병원을 만들려고 한다고 했더니, 여성들의 의료 생협은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그때 ‘의료 생협’이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어요.
퍼 : 그때 처음 들으셨던 거군요.
추 : 예. 의료 생협은 조합원들이 직접 출자를 해서 운영하는 병원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모든 고민이 시원하게 해결된 기분이었어요. 여성주의적인 병원을 꼭 나 혼자서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여성주의자들의 그룹만 있다면, 그 사람들과 함께 사람과 자금을 모으고, 나는 거기 취직하면 되는 거였어요.
퍼 : 기쁘셨겠어요.
추 : 그럼요. 내가 혹 병원을 경영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병원이 여성주의적 의료를 실천하는 병원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거든요. 여성들이 출자해서, 여성들에 의해서, 여성들을 위해서 직접 경영하는 병원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그 형태가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퍼 : 그때부터 의료 생협을 함께 할 친구들을 모으셨나요?
추 : 예, 알음알음으로 알고 지내던 여성주의 의료인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서 생협을 준비하자는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 모임에서는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시는 ‘언니들’을 진료하는 일도 했었죠.
퍼 :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추 : 막달레나 공동체라는 성매매 여성 지원 단체에서 이분들에 대한 의료 지원 프로젝트를 국가에 신청해서 국비를 지원받아 운영한 사업이었고 우리는 자원봉사를 했죠. 간이 진료소에서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살피고, 병이 발견되면 정식 진료를 받는 의료 기관으로 연결해주는 시스템이었어요. ‘언니들’이 의료 기관에서 진료 받는 비용은 국비로 지원이 되었고요. 굉장했어요.
퍼 : 생협 준비는 잘 되었나요?
추 : 아니오. 조금 지지부진하다 2006년 언니 네트워크에서 비혼(非婚) 여성주의자 그룹*을 만나면서 힘을 받았죠. 비혼 여성들이 흔히 듣는 말이 ‘늙어서 아프면 누가 챙겨주나?’는 말이잖아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면서 살아가야 하죠. 그래서 그분들은 의료 생협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크시더군요.
* “비혼이 행복해야 사회가 행복하다” 기사 보러 가기
http://www.hani.co.kr/section-021003000/2008/03/021003000200803130701004.html
퍼 : 그 그룹에서 만난 친구 분이 지금 의료 생협을 준비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추 : 네, ‘어라’라는 친구죠. 지금 이 친구가 상근을 해요. 본래, 비혼 여성들을 위한 마이크로 크레딧을 세우고 싶어 했었던 친구였어요. 이 친구가 금융에 밝거든요. (웃음) 실제로 다른 지역 의료 생협에서 일도 많이 하셨어요. 모금 전문가로 유명하답니다.
감옥에서 배운 것들
퍼 : 대학 시절엔 학생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신 적도 있다고 들었어요.
추 : 아, 그랬죠. 하하하. 잊고 있었는데, 기억이 나네요.
퍼 : 어떻게 된 거예요?
추 : 99년 초에, 서울 지하철 노조에서 파업 투쟁을 벌였어요. 그때 지하철 노동자 분들이 서울대 노천극장에서 기거하셨고, 학생들은 파업 투쟁을 지키기 위해서 교문을 열심히 지켰죠. 제가 학생회 일을 하다 보니, 투쟁에 쓸 화염병 1000개와 쇠파이프 300개를 운반하는 트럭을 학교 안으로 들여오는 역할을 책임지고 맡게 됐어요. 그러다가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해서, 그 트럭에 탔던 저와 제 친구가 잡혀갔죠.
퍼 : 무서웠겠어요.
추 : 네, 무서웠어요. 그런데 안 무서운 척 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그때의 경험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 되었던 것 같네요.
퍼 : 어떤 점에서요?
추 : 구치소에서 지내면서, 제가 그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삶을 살아온,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성들을 만났던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지식인이 아닌 여성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당시에 ‘외국인’ 방에 수감되었었는데, 한 방을 쓰시던 조선족 아주머니들, 필리핀 아주머니들과 만난 경험에서 많이 배웠죠.
퍼 : 좀 더 이야기해 주세요.
추 : 당시에 제가 있던 층에 ‘공안’으로 분류된 수감자가 저까지 셋이 있었어요. 그 중 한 분은 황선 씨라고, 북한에 다녀오셨던 분이었고요. 또 다른 한 분은 당시 한총련 조직 관계로 들어온 분이었어요.
퍼 : 다 함께 같은 방에 있었나요?
추 : 아뇨, 공안수들은 떨어뜨려 놓게 되어 있어요. 서로 가장 멀리 있도록 끝과 끝에 배치하죠. 마침 제가 4월 말에 잡혀갔는데, 5월 1일이 메이데이잖아요. 노동절이라고 감옥 안에서도 집회를 하더라구요.
퍼 : 셋이서 집회를요?
추 : 네, 저는 처음이라 잘 모르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황선 씨가 시작을 하더군요.
퍼 :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았나요?
추 : 솔직히 말하자면, 모른 척하고 싶었어요. 이 일 때문에 제 재판이 불리하게 돌아갈까봐 걱정도 됐고요.
퍼 : 그러셨겠죠.
추 : 그런데, 황선 씨가 저를 호명하는 거예요. 공안수가 들어오면 방 배치를 바꾸기 때문에, 공안수가 들어온 걸 다 알게 되어 있어요. 이미 계획하고 있었는지, ‘며칠 전에 들어오신 몇 번 누구누구’라고 번호와 이름까지 부르면서 저더러 먼저 정치 발언을 하라고 황선 씨가 제안하는데, 저도 제 자존심이 있지,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었어요.
퍼 :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추 : 발언을 했지요. 준비도 없었던 상태라, 당시에 제 일과 관련되어 있었던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어요. 그 이야기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아무 감흥도 주지 못 했어요. 그런데 다른 한 분의 발언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퍼 : 어떤 내용이었나요?
추 : 그분은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갇혀 계신 여러분들도 다 들으라고,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사기나 절도 등으로 잡혀 오신 분이 많으실 터인데, 많이 잡아 봤자 그 금액이 1억 정도 아니냐. 그런데 몇 천 억씩 떼어먹고, 더 엄청난 비리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이런 사람들도 있다고요. 이런 비리를 척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요.
퍼 : 그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추 : 네. 수감된 다른 분들도 모두 술렁이며 박수를 치더군요. 저와 함께 있던 조선족 아주머니들도 세상에 그렇게 돈을 많이 떼먹었다니, 정말 나쁜 놈들이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그때 느꼈죠. 아,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는 건, 이렇게 하는 거구나.
퍼 : 그랬군요.
추 : 네, 발언이 각자 다 끝나자 다른 두 분은 ‘한총련 진군가’를 약속한 듯 부르더니 집회를 끝냈어요. 저는 당시에 한총련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싫고 당황스러웠죠. 그렇지만 같이 집회를 했는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다시 창살 앞으로 가 혼자서 ‘인터내셔널 가’를 불렀어요.
퍼 : 혼자서요?
추 : 네. 그런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같은 방에 계시던 중국에서 오신 아주머니들이 그 노래를 아시니까 중국어로 따라 부르셨던 거예요. 제창이 됐죠. 또, 인터내셔널 가는 워낙 노래가 아름다우니까, 노래를 듣고 나더니 다른 분들이 많이 박수도 쳐주셨어요.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들어와서 저는 아주머니들로부터 중국어로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는 법을 배웠지요.
퍼 : 정겹네요.
추 : 그렇지만 집회를 끝내고 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재판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까봐. 사실 검사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엔 ‘나는 그 트럭이 무슨 트럭인지 몰랐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거든요.
퍼 : 그러셨군요.
추 : 그런 상황에서 남들 앞에서 독한 운동권 학생인 걸 다 티를 냈으니, 겁이 덜컥 나더군요. 게다가 황선 씨는 이렇게 집회를 하니 참 좋다면서 또 하자고 하는 거예요. 저는 더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교도소장 면담을 신청했어요. 독방으로, 공안이 없는 층에 보내달라고요.
퍼 : 독방은 힘들다던데요.
추 : 아녜요, 있을 만해요.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그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다가, 재판이 잘 해결돼서, 나왔지요.
퍼 : 생각해보면, 참 어린 대학생들이었는데, 정말 큰일을 겪으신 것 같네요. 그 일로 자기 자신이 변화했다고 느낀 것이 있었나요?
추 : 같이 감방에 있던 언니들의 강인한 생존 방식. 그분들은 마치 로빈슨 크루소들 같아요. 그 안에서, 감방 살림에 필요하고 자기 몸을 단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제 손으로 다 만들어 내던 언니들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퍼 : 만약 제가 구속되고 구치소에 들어갔다면, 못 견뎠을 것 같아요.
추 : 막상 경험하면 또, 좀 달라요. 이를테면, 까치방이라는 곳이 있어요.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면 까치방이라 불리는, 법원 안에 있는 구금시설에 사람을 가두어 두는데, 구치소에서는 수갑을 안 차지만, 그 방에서는 수갑을 차고 있어야 해요.
퍼 : 그런 게 있군요.
추 : 공안수는 거기서 하루 종일 수갑을 차고 있다가 수사를 받아야 해요. 공안수는 일부러 더 오래 두거든요. 그러면 정말 너무너무 짜증이 나고 힘들어요. 그런데, 그 벽에는 무수한 시간동안 수많은 양심수들이 써 놓은, “국가보안법 철폐”, “민중민주” 이런 구호들이 사방팔방에, 정말 온 벽 가득히, 써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국가의 폭력에 대해 무서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분노하게 된답니다.
퍼 : 그 이후에 부모님이 학생운동에서 손 떼라고 하지 않았나요?
추 : 그랬죠. 저는 뗐다고 말했죠.
퍼 : 하하하하.
추 : 이젠 그렇게 안 살려고요. 실제로 무서운데, 안 무서운 척하면서 살지는 않으려고요. 무서운 거 그냥 티내면서 살려고요.
의료 생협이 주는 행복
퍼 : 지금 병원에서 생활하시는 것도 큰 불편은 없어 보이시는데, 굳이 협동조합의 의사가 되려고 마음먹으신 거잖아요? 이 선택에 대해서 걱정은 안 되세요?
추 : 병원 생활이 편안하기는 해요. 병원에서 시키는 일들도 다 할 만하고, 병원 사람들하고 있을 때 말도 더 잘 통하고요. 환자와 있었던 일, 보호자와 있었던 일, 모두 마음 편하게 털어 놓을 사람들도 많아요.
퍼 : 아무래도 그러시겠지요.
추 : 만약 제가 병원 바깥의 여성주의자들, 보건 의료 운동하시는 분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왔다면 저도 그냥 평범한 의사로 안주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외부의 관계들을 계속 맺어왔기 때문에, 지금 제가 하는 선택이 전혀 불편하거나 걱정되거나 낯설지 않아요.
퍼 : 동료들이 선생님의 선택을 잘 이해하나요?
추 : 제 주변에 의사의 신분적 지위에 대한 생각보다는 사명감이 크신 분들이 많은 편이에요. 의료 생협하겠다는 이야기도 잘 받아들여지는 편이고요. 가정의학과에는 한 해에 한두 명씩은 의료 생협을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과의 특성인 것 같네요.
퍼 : 의료 생협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추 :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시죠. 의사도 안 될까봐 걱정이 많으셨는데.
퍼 : 즐거워 보이세요.
추 : 네, 즐거워요. 생각해 보면 대학 시절에는, 반(反)성폭력 운동을 주로 했어요. 그런데 그 일은 참 사람을 지치게 했던 것 같아요. 재미없었던 건 아니에요. 참 재미있었는데, 계속 뭔가에 반대하는 운동들 - 저 사람의 가부장성에 반대하고 온 세상의 가정폭력에 반대하고 내 안의 마초성에 반대하는 그 모든 일들이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퍼 : 그렇죠.
추 : 요즘은 무언가에 대한 ‘안티’가 아닌 실제로 성과물을 만들어 나가는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이 느낌이 참 좋더군요. 왜 이 재미를 몰랐을까 싶네요.
퍼 : 네.
추 :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어요. 반대만 하는 운동을 계속할 때에는, 사람들을 계속 감시하게 돼요. 나쁜 짓하는 사람 어디 없나, 하고요. 그런데 의료 생협하면서부터는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네요. 같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하니까, 좋은 점, 공통점이 먼저 보여요.
퍼 : 내년 이맘때에 선생님은 어떤 모습이실까요?
추 : 2012년에는……, 전문의가 되어 있을 테니 의료 생협 의원에서 일을 하겠죠. 시간만 더 있으면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너무 많아요. 좀 더 훈련받고 싶거든요. 게다가 지역 사람들이랑 만나서 친목도 쌓아야 하고요, 가족력도 파악해야 하고요. 지역 사람들을 생각하다보면 또 의사로서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욕심이 나죠. 제가 부족하면 지역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 같아서요.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저는 너무너무 바빠요.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여성주의 의료 생협(준)의 상근자이자 모금 전문가로 유명한 ‘어라’님으로부터 조합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는 전화가 왔다. 나는 주저 없이 설립동의서를 팩스로 보내고 조합비를 입금하며 나의 주치의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여성주의 의료 생협의 시도를 보며, 삶의 장애물들을 부수기 힘들다면 장애물을 넘어갈 사다리를 함께 만들면 된다는 걸 배우게 된다. 작은 힘이지만 조금씩 모은다면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할 수 있다고 믿고 움직여 새로운 실험을 한 발짝씩 내딛고 있는 추혜인 씨를 보니 든든했다. 그리고 그 실험들 속에서 즐겁고 행복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함께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사이면서도 그들의 닫힌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를 시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재구성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준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경계를 확장하고, 외부와의 끈을 놓지 않는 일. 거기에 다른 삶의 힌트가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