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지 입학식 기념호에 실릴
공선옥의 '나는 죽지 않겠다' 서평
우물 밑에서 길어 올린 진짜배기 희망
- 공선옥의 『나는 죽지 않겠다』 서평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시절, 전국의 청소년과 학부모들을 강타한 책이 있었다. 바로 『7막 7장』이라는 책이다. 일찌감치 미국에 유학 가서 미국의 유명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에 입성한 한 청년이 쓴, 자신의 성공담을 담은 책인데, 해외 유학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그 때, 중학생 나이에 미국으로 홀로 건너가 그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많은 중고등학생들과 학부모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 청년은 게다가 무척 미남이기까지 해서, 그 때 말로는 ‘킹카’,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이 청년이 바로 그 ‘엄친아’였던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은 많은 청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7막 7장’을 꼽는 학생들도 많았고 또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꿈을 가지고 살아라’하고 비장한 말씀을 하시며 이 책을 건네주는 경우도 많았다. 해외 유학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데에도 이 책이 도화선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그리고 아마 이 책을 시작으로 요즘 매우 흔한 입시 성공 스토리를 담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작년에 우연한 계기로 만난 한 19살 여학생이 있다. 이 친구는 매우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 때문에 방황하다가 결국은 중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을 했다. 작년에 내가 이 친구를 만났을 당시 이 친구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딴 후였다.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검정고시를 봐서라도 졸업장을 받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젠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고 했다. 영어니, 수학이니 하는 과목들이 아직 중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매일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으로 가서 중학교 문제집을 풀며 대학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역할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이 ‘금나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금나나? 금나나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나는 집에 와서 검색을 해보았다. ‘의대생 미스코리아 엄친딸’, ‘100일 간의 독한 체중감량 후 미스코리아 진 입상’, ‘하버드 대학 우등 졸업’ 와 같은 말들이 검색 결과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이것을 보며 나는 마음이 무척 불편해졌다. 독한 노력 끝에 오는 빛나는 성공은 물론 달콤하고, 또한 가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금나나처럼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끊임없이 ‘7막 7장’의 주인공이나 ‘금나나’와 같은 ‘엄친아’, ‘엄친딸’들을 선망하며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야 할까?
오늘 소개할 책의 주인공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소설가 공선옥이 쓴 소설들을 묶은 ‘나는 죽지 않았다’는 ‘엄친아’, ‘엄친딸’과는 거리가 먼, ‘찌질이’ 청소년들의 이야기 여섯 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어떤 아이들이기에 다짜고짜 ‘찌질이’라고 규정할까?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연주하고 새로 사귀기 시작한 민수는 지난 번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이유가 선물을 사줄 돈이 없어서였다고 생각하고, 부잣집 아들인 것처럼 거짓행세를 한다. 사실 민수네 집은 길거리에서 짝퉁 바지를 파는 아버지와 고깃집에서 부엌일을 하시는 어머니가 누나의 대학 입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걱정하느라 먹구름이 끼어있는 와중인데, 이 철없는 고등학생 민수는 연주가 모직 코트 한 벌 없어 오들오들 떨며 겨울을 나는 것이 불쌍해서 연주 생일에 예쁜 코트를 사주어야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렇지만 결심을 하면 뭐하나? 돈이 없는데. 결국 민수는 편의점 알바 자리를 어렵게 얻어서, 어렵게 가불을 받아 목돈을 손에 쥐고 연주를 찾아가는데, 옷가게 쇼윈도 앞에서 저 빨간 반코트가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하며 옷을 사러 들어가는 민수에게 연주는 의젓하게 ‘네 마음이면 됐어’라며 사지 말라고 말린다. 그러자 ‘분한 마음이 엄습’한 민수가 소리친다. “야, 내가 니 옷 사주려고 편의점에서 가불 땡겨가지고 왔단 말야!” 부잣집 아들 행세를 하던 체면도 내팽개칠 정도로, 자신의 어려운 노력을 몰라주는 여자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이 앞섰던 거다. 여자친구를 사귀려면 그럴듯한 집안에서 태어나든지, 아니면 거짓말이라도 번지르르하게 잘 해야 할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민수의 모양이 꼭 요즘 학생들이 ‘못난 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찌질이’ 같다.
수능 보는 선배들을 응원하려고 전교생에게 걷은 돈 백만 원을 반장 대신 맡아 가지고 있다가 그만 이래저래 다 써버리고 만 ‘나’의 이야기도 있다. 고등학생이 백만 원을, 하루아침에 다 어디에다 썼을까? 유흥비가 아니다. 생활비에 쪼들리는 엄마에게 잠깐 꿔준다 생각하고 오십 만원을 가방에 넣어주고, 오빠가 좋아하는 군고구마 사다 주고, 엄마 생일인 걸 깜빡하고 있다가 선물과 케이크를 장만하고, 또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만 백만 원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친구도 정말 못났다. 참 바보 같다. 관리도 못할 큰 돈을 반장 대신 맡기로 한 것 하며, 남의 돈을 맡았으면 야무지게 가지고 있다가 돌려줄 것이지, 엄마가 운다고 그런 큰 돈을 엄마를 줘 버리면 그 뒷일은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건지, 참 바보 같다.
그렇지만 이런 못난 친구들이 자신이 빠져버린 구렁텅이와도 같은 깊은 우물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대목들이 인상 깊다. 연주와 헤어지고 떡볶이집으로 아르바이트를 옮긴 민수는 아줌마가 장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월급을 주지 않자 떼를 쓰다가 아줌마네 봉숭아 화분을 쓰러뜨리는데, 다음 날 봉숭아를 생각하며 다시 가게를 찾아간다. ‘내가 아줌마네 봉숭아를 다시 화분에 심으려는 이유는, 내가 황폐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아름다워서 힘센 봉숭아를 닮아 넘어져도 기를 쓰고 살아나리라’라고 중얼거리며. 엄마가 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태어난 승애는, 그렇게 자신을 낳은 엄마도 밉고 엄마와 자신을 두고 떠난 아빠도 밉고, 또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생긴 일 때문에 너무나 속상하지만, 바다를 헤엄치며 말한다. ‘바닷물은 따뜻했다. 나는 힘차게 바닷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가끔은 술을 먹고 울기도 하지만, 또 툭툭 일어나 씩씩하게 살아온 엄마처럼, 두려움 없이.’
이렇게 ‘찌질하고 못난’ 청소년들이 ‘두려움 없이 바닷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갈’ 수 있는 모습들이 아마도 이 소설집을 빛내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인생의 기나긴 길을 걸어가며 험한 골짝과 산등성이를 넘을 때마다 얻게 되는, 영혼의 ‘성장’에 그 비밀이 있을 것 같다. 부모님의 부부싸움 덕분에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도, 중학생이던 때는 이 일이 속상해서 삐질삐질 눈물이 났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생각해 보니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똑같이 미옥이를 생각하는데도 지금은 왜 눈물이 나지 않는 걸까, 내가 큰 것일까?’
입학을 앞둔 우리 신입생들에게, 그리고 3월을 맞이하여 저마다의 시작을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많은 성장의 문턱을 넘어야 할 내 자신에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희망은 ‘엄친아’와 ‘엄친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7막 7장’의 주인공 아저씨는 한국에 돌아와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아마 위에서 소개한 못난 청소년들은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에너지를 곳곳에서 발하며 더 재미나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같은 모양으로 성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리 아름다운 일도 아니다. 성공 신화를 선망하지 말고, 저마다가 살아가는 삶의 깊은 우물 속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길어 올리는 힘, 그 힘을 선망하고 기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