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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7 한 권의 책을 읽은 열다섯 사람



동아리 문집 앞에 실은 지도교사 인사말.

일 년 동안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때가 많았다.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봐주지 못하는 게 마음이 쓰이다가도
막상 모여 토론을 할 때면, 아이들이 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답답해서 더 화가 나고.

운영의 방향도 내 안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붉은 동아리'를 만들고 싶은 마음과, 
요즘 유행하는 '독서토론'이라는 걸로 애들을 좀 잘 키워서 학교에서 드러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아이들은 후자를 향해 모인 것 같은데 나는 그 모습이 싫고, 
싫으면서도 그 모습이 또 내 안에도 있고. 
그렇게 꼬인 마음으로 일 년을 보낸 것 같다.

이렇게 일 년을 보내고 어쨌든 모인 글들이 있고 해온 활동들이 있으니 문집을 만들기로 했는데,
앞부분에 실릴 지도교사 인사말을 쓰자니 쓰기가 싫었다.
동아리가 내 마음에 들지도 않았는데 자랑하는 글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쓰다보면 거짓말만 잔뜩하게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니 
나도 모르게 동아리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고
아이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생겨나고
내가 가야할 방향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냥, 천천히, 차곡차곡 가면 된다는 것.

글을 쓰는 일이, 새삼스럽게 놀랍다.




한 권의 책을 읽은 열다섯 사람


“한 사람이 열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열 사람이 같은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교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백 권을 훌쩍 넘나드는 권장도서 목록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입니다. 서점에 가보면 수능 시험과 대입 논술 고사에 유리하다는 청소년 도서 시리즈가 출판사별로 수십 권씩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숨이 가쁠 지경입니다. 문제집 풀기에도 모자란 공부 시간을 고려하면, 친구들과 토론할 시간에 다른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권의 책을 읽은 열다섯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모였습니다. 모여서 공부해야 할 만큼 특별히 어려운 책이었냐고요? 아닙니다. 그 중의 몇 사람은 책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특별히 뭘 잘 모르는 친구들이었냐고요? 아닙니다. 애초에 책을 읽은 목적 자체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들에 답하며 서로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친구의 질문을 징검다리 삼아, 우리는 책 속으로, 서로의 마음속으로, 그리고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토론’이라는 것이 화려한 말솜씨를 자랑하는 일로 비춰지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책을 읽고 무엇을 배웠는지, ‘겉으로 드러낼’ 줄 알아야 남들이 평가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말솜씨를 갈고 닦아, 하나를 알아도 열만큼 표현해 낼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토론은 하나를 아는 사람에게 열만큼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알도록, 속을 단단히 다져가는 과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초공사부터 새로 해야 합니다. 기둥 하나하나, 두드려 보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열다섯 사람이 모여서 했던 일은, 집을 짓기에 앞서 그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토론이 늘 재치가 넘치는 빛나는 시간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고등학생으로서의 하루하루가 힘겨워 책을 다 읽어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친구가 던진 질문 앞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이 이어지던 어색한 시간도 있었습니다. 내가 친구보다 부족한 것 같아 마음이 상했던 나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모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은 지적 호기심을 즐겁게 만족시키면서도 배움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일이지만 때로는 지루하고 답답하며, 심지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확인해야 하는 불쾌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위해 ‘****’라는 이름으로 모여 일 년을 함께 보낸 친구들에게 참 고맙습니다. 처음으로 동아리를 맡아 부족함이 많았던 지도교사를 믿어주고 도와준 2학년 친구들, 그리고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며 ‘독서토론’이라는 이름을 주저 없이 선택하고 쉽지 않은 길을 함께 걸어와 준 1학년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이 글들이 훗날 여러분에게, ‘내 청춘의 도서 목록’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 된다면, 하는 작은 소망 하나를 덧붙이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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