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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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이 비싼 음식이나 장난감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모도 결핍되어 있다. 부모가 생계로 바쁘거나, 혹은 생계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아이들을 버려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다. 특히 어머니는 더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아직 미성숙한 상태의 아이에게, 부모의 부재는 생존이 위태롭다고 느낄 만한 일일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버려두는 매 순간은 아이의 삶에 깊이 상처를 남긴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은 시장에 장사를 나간 어머니를 혼자서 기다리던 때의 깊은 절망감을 노래한 시다. 해는 벌써 졌고, 금이 간 창 너머에서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는데, 아이는 혼자 방에 남아서 엎드려 울고 있다. 조그만 기척 소리에도 혹시 어머니인가 하고 돌아보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이때의 아이의 간절한 마음과 반복되는 절망감이 ‘안 오시네’, ‘안 들리네’와 같은 되풀이되는 문장들로 절절하게 나타나있다. 아무리 도리질을 하려고 해도, 아이에게는 ‘영영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무서운 생각이 점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혼자 남겨진 아이로서의 서러움이 극대화되는 부분은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라는 부분이다. 아마도 방 안에는 배고프면 먹으라고 이불 밑에 묻어 두고 간, 그렇지만 이미 식어진 ‘찬밥’이 남아 있었을 테다. ‘찬밥취급’이라는 관용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볼 때, 화자의 혼자 남겨진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과 버려졌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서러운 마음을 ‘찬밥처럼’이라는 말처럼 적절하게 나타내기는 쉽지 않다.
연을 달리하며 화자는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된다. 그렇지만 이 어른에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때의 절망감과 서러움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 기억은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춥고 외롭고 쓸쓸한 부분, 즉 ‘윗목’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의 윗목’은 하나씩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유년 시절의 아이에게 부모와의 관계는 세계의 전부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억은 생애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누구든지 부모님에 관련된 서운하고 쓸쓸한 기억을 하나쯤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이름붙일 적당한 말을 찾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 나에게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년의 윗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혹시 아직도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을지 모를 아이를 끌어안아 주며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쓰다듬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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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로 꾸역꾸역 쓰는 글들
자꾸만 누군가를 닮아가는 문장들
깔때기처럼 비슷해지는 결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