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교권 | 2 ARTICLE FOUND

  1. 2010.06.26 공감과 이해, 잘못과 벌
  2. 2009.09.26 성폭력을 교권문제로 보면 대책이 없다


"감정은
1. 몸의 상태다.
2. 최초의 판단이다.
3. '생존'과 연관된 감각과 판단이다. (좋다 : 살 것 같다 / 나쁘다 : 못 살겠다)
4. 인지되지 못한다."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는 태어날 때 이미 숙성한 상태인 반면
인지 능력을 관장하는 해마체는 만 3세에 와서야 숙성된다.
인간에게 남는 최초의 기억은 만 3세 이전의 감정적 기억들이고 이것이 인간을 결정한다."

"이해받고 공감받는 경험을 해 본 아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된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자존감이 높아져야 관용적이 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한 당신이 나의 **가 되어주어 나는 **로서 참 행복해요"라고 자주 말해보자."

- 어제 교직원 연수, 감신대 안석모 교수님의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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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판단이 그 사람의 입장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입장에 따라 뒷받침 논거들이 만들어지고는 한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논리로만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생존'이 오고 가는 경험을 한 보수적 노인네들을 '논리'로만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흔히들 이렇게까지만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논리로만은 안 되고 그들을 '감동'시켜야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감동이 아닌 억지스러움만 남을 수 있다.

감동이 만들어지는 경로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하나는 상처받은 경험에서 만들어 낸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결론을 역전시킬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는데 막상 정글과 같은 사회를 만나고 받았던 심리적 충격을 보상하는 경험,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절망하고 포기하며 세운 심리적 방어벽을 깨뜨리는 경험,
이런 경험들이 감동을 만들고 사람을 바꾼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맞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뀐다는 말이 맞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덕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경험이 만들어낸 심리적 습관들이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습관은 말 그대로 '습관'이어서,
이 습관과 성격이 결국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 하더라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하는 판단이 사실은 '(상처로부터 비롯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은,
인지하기 어려운 '감정'을 '단지 감정'으로 인지하게 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렵다.

이러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상처의 경험을 역전시키는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경험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지만,
'공감과 이해'의 여유를 가진 누군가가 주변에서 '의지를 가지고' 돌보아주는 것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쟤는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하는,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싸가지 없게 들리는 말을
학생들은 쉽게 내뱉는다.
그리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교사들도 많다.

그러나 그 '벌'은, 실은, 잘못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계도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쟤의 심한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당한 사람의 심리적 상처를 보상하는 과정에서 요구되고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심리적 상처의 보상은, 벌과 분리된, 심리적 상처 치유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테면 '사형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최근 자주 언급되고 있는
어린이 성추행범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의 생존본능과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는 센세이셔널한 이슈다.
일단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전문가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치유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는 전국민이다.
전국민이 입은 이 심리적 상처(생존의 위기감)는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해야 한다.
어린이 성추행범이 등장했던 사회적 맥락을 책임지고 검토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사형'은 피해자들의 심리적 상처를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해소하는 방법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많은 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벌들이 다른 학생들을 위한 전시 효과를 노리거나,
때로는 학생으로부터 '교사가' 받은 심리적 상처를 보상해주기 위해 진행된다는 점은
반드시, 열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잘못은 잘못대로 계도받되,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학생이 있다면,
그 상처받은 학생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다.
이 학생이 자신의 상처를 '남이 벌받는 꼴'을 보며 보상받는다면
'내가 아픈 만큼 남도 아파야 한다'라는 잘못된 결론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학급이 있다면,
그 학급의 담임이 학급을 토닥여 주고 잘못의 과정에 대해 성찰해 주어야 한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 스스로 '나도 상처받는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상처를 삭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괜히 '교권'을 들먹이며 '학생 인권과 교권'이 대립되는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학생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권력 집단들의 왜곡된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이다.

잘못한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변화하는 때는 언제일까?

벌을 받으며, 종종 학생이 변화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종종 '**하면 ##받으니 **하지 말아야겠군'하는 동물적 학습에 불과하다.
이건 '**'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아니다.
그 학생은 아마도 뒤에서 침을 뱉으며 학교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고 교사들을 욕할 것이다.

그런데 또 벌을 받으며,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 벌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벌을 주는 교사나 부모와의 '우연한 소통의 순간'에 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조용한 성찰의 번뜩이는 순간에 있다.

그렇다면 벌의 내용은 학생, 교사, 부모의 '소통', 그리고 조용한 '반성'에 집중되어야지
다른 행정적이고 전시적인 절차에 집중된다면 우스운 일이다.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며
'그 잘못 때문에 너희들이 속상했구나'라고 말해주고 그 감정은 감정대로 해소하도록 도와주어야
학생들이 이기적이고 어린애같은 보상게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과정 없이,
"그래, 걔는 이런 잘못을 해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했어. 그렇지?"라고만 말한다면
아이들은 아마도, 훗날, 제 앞가림은 잘하지만 남의 불행 앞에서는 둔감한, 싸이코패스들이 될 것이다.
'남자 친구의 배신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여자 친구가 배신해서 강간범'이 되고
'부모가 상처주었으니 나도 부모를 학대'하고
등등등.

그런데 학교는, 이 과정을 모두 다 성찰하여 학생들과 교사들을 배려하기에는 너무나 근대적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결국은,
근대적인 학교가
살인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자살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강간하는 아이들을 만든다.


AND

성폭력을 ‘교권’문제로 보면 대책이없다

[좌담] 여교사 성추행 동영상이 남긴 것
 
여성주의 저널 일다 우완


<여러 남성이 한 여성을 둘러싸고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귀자’고 종용한다. 이를 피하려고 여성이 자리를 옮기자, 놀려대며 다시 에워싸고 팔을 잡는다. 그리고 이 상황을 카메라로 찍어 외부에 공개한다.>
 
이 런 일이 발생했다면, 누가 보아도 명백한 성추행이다. 그런데 이 일이 교실에서 남학생과 여교사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로, 성추행이나 성희롱이라는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워진다. 위 상황 속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남성-여성 간의 ‘성별 권력’ 관계를 우리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탓이다. 하지만 성별 권력관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사건의 본질이 은폐될 수밖에 없다.
 
사 회를 떠들썩하게 한 소위 “여교사 성희롱 동영상” 사건 이후 오가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교실 성폭력 예방하기 위한 방법’보다는 침해 당한 ‘교권’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때마침 추진 중인 ‘교내 휴대폰 사용금지 조례’ 제정움직임과 맞물려, 교권회복 목소리는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철 지난 논쟁인 ‘남교사 할당제’를 도입하자는 말도 나온다.
 
‘성별 권력권계’라는 본질 은폐해선 안돼
 
▲ 9월 19일,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과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 여성주의팀이 모여 '여교사 성추행 동영상' 사건을 둘러싼 논의와 대책에 대한 좌담을 진행했다.
19 일, 이번 교실 성추행 사건을 다시금 살펴보고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필자가 속해 있는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이하 교사모임)과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 여성주의팀(이하 청소년네트워크) 구성원들이 모여 대담을 진행했다.

 
우 리는 먼저 이번 사건이 ‘교권침해’사건으로 일반화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 공감했다. 교사모임의 정주연씨는 ‘교권’이 보장되던 1970~1980년대에도 “여교사에 대한 남학생들의 성희롱은 늘 있어 왔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잘못된 교실문화를 개선한답시고 학생들을 억압하거나 통제할 근거를 만들어 내는 건, “엉뚱하고 무책임한 대책”이라고 지적했다.
 
청소년네트워크 엠건씨도 “성희롱의 본질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어린애가 교사들한테 기어 올랐다는 것에만 집중된 언론의 태도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교 사모임의 조영선씨는 기존에 여교사들이 겪은 성희롱보다 이번 사건이 크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 공간에 유통시킨 것이 학교집단에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영선씨는 이 사건의 여파가 핸드폰 사용금지 조례 제정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또한 대담자들은 이번 사건이 ‘교권침해’라고 뭉뚱그려지면서, 정작 사건 당사자인 여교사 본인의 목소리는 사라져 버렸다는 점에 주목했다.
 
청소년네트워크 한낱씨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이 문제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막상 사건을 다루는 시선에서는 여성이 배제되는 일이 잦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젊은 여교사의 ‘위치’
 
사건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본인이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당당하게 나서서 이야기하기란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비정규직 여교사의 경우라면, 학교사회에서 자신의 피해를 발언하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교 사는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아니라, 다층적인 권력관계 망 속에 놓여 있는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권’이라는 말로 교사집단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기간제’로 일하고 있는 젊은 여교사인 만큼, 실제로 교직사회 안에서 이 교사의 정당한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교사모임에서는 전형적인 신규 여교사의 입장에 대해서 “아가씨 선생님”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학교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 처하게 되는 교무실의 현실은 배려와 우대, 그리고 무시와 하대가 묘하게 섞여 있는 분위기다.
 
일례로 남학생들이 있는 앞에서 “여자선생님은 약하시니까 너희들이 잘 도와드려!”라고 말하는 선배 남자교사의 ‘배려 아닌 배려’는, 학교에서 여교사의 위치를 더욱 의존적이고 나약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청 소년네트워크 활동가인 십대들도 입을 모아 ‘남자선생님들이 여자선생님들을 학생들 앞에서 귀엽지 않느냐고 칭찬한다’, ‘학교에서 남자선생님이 하는 역할과 여자선생님이 하는 역할이 따로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학교 내 가부장적 교사문화를 이야기했다.
 
성적 긴장감을 ‘가족적’이라고 포장하는 학교
 
학교운영이 가부장적 가족모델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남교사가 해야 할 역할과 여교사가 해야 할 역할을 나누어, 성별 분업구조로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한 예로 지적됐다.
 
또 한 남자교사들은 엄하게 혼내고 규율을 잡는 역할을 한다면, 여교사들은 학생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분위기도 엄연히 존재한다. ‘남교사 할당제’를 요구하는 쪽에서 ‘여교사는 엄마, 남교사는 아빠역할이니 모두 균형 있게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를 드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교 사모임의 조영선씨는 이러한 가부장적 가족모델에 기반한 학교문화가 ‘교권을 노동권으로서 당당히 인정받을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문화는 엄연히 존재하는 남학생과 여교사 사이, 남교사와 여학생 사이의 성별 권력관계, 그리고 성적 긴장감을 ‘가족적’이라고 포장하는 기반이 된다.
 
청소년네트워크의 공기씨와 엠건씨는 학교에서 담임교사와 ‘아빠와 딸’ 같은 사적인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교사가 자신의 일상생활에 대해 강한 규제를 행사하게 되어 당황했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 학교 내 교사 성추행 사건’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학교문화와 맞물려 있어, 다양한 논쟁의 지점을 던져주고 있다.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과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 여성주의팀에서는 이날 논의결과를 담은 입장을 공동 발표하기로 했다.
 
‘학교 내 성폭력’ 근본적 문제제기 필요해
 
사 실 남학생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여교사의 이야기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의 고정 레퍼토리 중 하나다. 최근 여교사와 남학생 사이 로맨스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몇 번 다루어졌다. 이번 ‘여교사 성희롱 동영상’ 사건은 어찌 보면 흔한 ‘여교사 수난시리즈’의 변주곡인지도 모른다.
 
이 번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려면 학교 내 성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교장, 교감, 부장교사들이 신규교사에게 행하는 직장 내 성희롱, 남교사에 의한 여학생 성추행 문제 등도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런 논의 없이 ‘교권을 강화’한다는 것은, 학교 안의 남성적인 훈육방식을 강화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해법은 학교문화의 가부장성을 타파하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좌담이 끝나고 청소년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한 청소년이 건넨 후기다. 스스로 ‘10대 여성주의자’라고 말하는 십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경청해보자.
 
< 이번 사건이 터지고 ‘문제는 교권의 추락’, ‘인성교육 강화해야’ 등으로 몰리는 반응을 보면서, 이것이 한 여성에게 가해진 성적 폭력이란 사실엔 대부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감히 ‘교사’에게 기어오른 학생이라는 점에서, 극심한 반감을 느끼고 있을 뿐.
 
좌 담 자리에서 ‘교권의 주어는 남교사’라는 말을 듣고 이야기 나누는 동안, 이런 흐름들이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더 명확해졌다. ‘여교사 성희롱 동영상’ 사건의 대책으로 교권 신장을 주장하는 담론은 ‘누구를 위한’ 목소리인가? 적어도 이것이 학생들을 위한 목소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당사자인 교사조차 배제시킨 채 이야기가 진행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듯, 심지어 여교사들을 위한 목소리도 아니다.
 
교 권을 사랑하는 분들께 끝으로 몇 마디! 교사들이 겪는 인권침해 때문이라도 교사의 권위가 서야 한다? 교사들의 고통이 말 안 듣는 못된 학생에게서 기인한다면, 학생들의 고통은 권위적인 교사들과 억압적인 학교와 사회로부터 기인한다는 걸 무시해선 안 된다. ‘교사들의 현실적 고통이 학생들과 대립한다고 해결될 수 있느냐?’ 물었을 때, 그러한 해법은 학생들을 때려서 내 고통을 없애는 전형적인 강자의 방식밖에 안 된다는 걸 꼭 기억하시길.> 





기사입력: 2009/09/23 [00:46]  최종편집: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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