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담임을 맡게 된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지레 겁먹었던 것들은 이런 것이었다.
1. 아마도 나는 온갖 눈치작전을 써가며 입시원서 써주는 일이 무척 싫을 것인데 이것을 해야 한다니 두렵다
2. 아마도 아이들은 언어영역 성적을 올릴 비법을 가르쳐주는 강의를 원할 텐데 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하니 두렵다
3. 아마도 학부모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텐데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을테니 두렵다
등등.
2번과 3번은 그 예측한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1번은 조금 다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반에 명문대에 갈 학생이 거의 없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담임하고 있는 학생들 중 대다수는 전문대에 가야하는 상황이다. 아마도 반 이상? )
처음에는 내 자신이 걱정스러울 만큼 입시에 무감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이 아이들이 자기한테 맞는 대학에 꼭꼭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절박해진다.
취업한 졸업생(대학에 진학했는데 아버지가 이런데 가느니 차라리 취업하라고 했다고)을 만난 후에는 더 그렇다.
말로는 '네 선택을 응원한다, 지지한다, 잘 지내라, 보기 좋다' 하며 등 두드려 보냈지만
실은, 이 먹물의 솔직한 마음은, 너무 일찍 사회생활을 접하고 늙어버린 아이가 보기에 안 되었다, 싶었다.
그래도 대학을 가야지, 싶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학생들 인생에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크지 않다고 보는 게 맞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저 응원해주고, 함께 해주는 일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게 맞다.
고3 담임 처음 한다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할지 모르겠다고 징징거리니 이런 말을 해 준 선배 샘이 있었다.
"그냥 같이 가는 거지 뭐. 애들이 긴장하면 같이 긴장하고, 조바심도 같이 내고, 걱정도 같이 하고..."
그래서 그 마음 다잡는 의미로
스승의 날엔,
옛날에 부르던 노래 '한 걸음씩'의 가사를 적어서,
흐드러진 진달래꽃 앞에서 찍었던 반 단체사진 뒤에 붙여서,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들려 보냈다.
그냥, 한 걸음씩 같이 가자고 ;;;
아 이 촌스러운 감수성이여 ㅠㅠ
아무튼,
아이들보다 앞서가지도 말고, 뒤쳐지지도 말고, 나란히 가는 감각을 기르려고 한다.
비록 고3 학생들을 처음으로 맡게 되었지만 이에 대해 걱정하기보다는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자'는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저는 학생들이 꿈과 목표를 찾는 일을 도와주는 일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부터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진로를 찾지 못해 방황했었기 때문에 꿈과 목표를 찾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이것을 찾기 위해 학생을 상담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을 안내하는 일을 열심히 할 것입니다.
또 저는 학생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담임으로서 저는 학생들을 질책하기보다는 장점을 찾아 격려하는 일에 더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질책과 꾸중보다는 칭찬과 격려가 사람을 움직이는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마음 깊이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학생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는지 안내해 주는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저 스스로가 외부의 힘을 빌지 않고 스스로의 계획과 실천에 따라 수험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노력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최근 바뀌고 있는 입시 제도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들에 대해서도 제가 3학년 담임 교사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들을 최선을 다해 안내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능 성적이 5등급인 학생을 2등급이 되도록 만들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또, 자신의 실력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도록 눈치 작전을 잘 쓰는 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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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보낼 완성 버전은 여기
학부모님께
학부모님, 안녕하세요?
저는 3학년 *반의 담임을 맡게 된 교사 ***입니다. 제 이름이 조금 특이하고 남자 이름 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뜻은 여성스러우면서도 (순하고 예쁘다는 뜻이랍니다) 겉으로는 중성적인 이름을 고른다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아닌게아니라 지금의 제 모습을 돌아보면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대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속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한편으로는 소심하기도 하지만 또 겉으로는 조금 거칠기도 하고 무뚝뚝하면서 거침없기도 하거든요. 제 올해 나이는 서른 세 살이고,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농담 삼아 멋있는 삼촌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답니다. 하하하.
저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교직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만난 3학년 *반 친구들이 제가 네 번째로 담임하게 되는 학생들이고, 특히 3학년 학생으로서는 처음입니다. 고3 담임을 처음으로 맡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학생들이 담임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려고 할 텐데 제가 그 기대를 다 채울 수 있을지 고민이 되더군요. 그렇지만 준비하는 동안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었습니다. 별 것은 아니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 하자.’라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참 많은 선생님이 있습니다. 학원에도 선생님이 있고, 인터넷 속에도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 많은 선생님들 중에 ‘담임’이 아이들에게 의미있는 선생님인가, 회의가 들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담임이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담임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학생들이 삶의 길을 바르게 찾아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다소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① 저는 그동안 담임으로서 학생들의 장점을 찾아 격려하는 일에 더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은 실수를 많이 하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질책만 하는 어른이 된다면 학생들은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상대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학생들이 3학년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 나갈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② 학생들이 학교에서 살아가는 공간은 무척이나 갑갑한 공간입니다. 이런 공간 속에서 온종일 살아가는 학생들이다보니 서로가 저지르는 잘못, 서로의 단점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회로 나가야 할 학생들이 자신에게 해당하는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안 될 노릇입니다. 학생들이 서로의 목소리를 동등하게 존중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나도록 가르치겠습니다.
③ 또한 저는 스스로가 고등학생 시절, 외부의 힘을 빌지 않고 스스로의 계획과 실천에 따라 수험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저와 같이 노력하고자 하는 학생에게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꿈을 이루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성의껏 안내하고 지도하려고 합니다.
학생들도 부모님들도 마음이 바쁘고 조급해지시는 시기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섣불리 많은 것을 약속드리기보다는 위와 같이 제가 생각하는 교육의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더불어 당부의 말씀 두 가지를 드립니다.
첫 번째는 지각에 관한 것입니다. 학교 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등교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학생들이, 훗날 대학 입시 원서를 쓸 때 ‘지각 횟수’를 이유로 불리함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취업을 준비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다 큰 학생들이지만 등교 시간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부모님들이 조금만 도와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두 번째는 진로에 대한 솔직하고 깊은 대화를 많이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2학기가 되어서야 학생들의 진짜 실력을 아시고 실망하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것은 학생에게도 전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목표 대학과 학과를 정해야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수 있으며, 이 목표는 나중이 아닌 ‘지금’의 성적을 토대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학생의 진로에 대해 솔직하게 터놓고 상의하는 일을 지금 바로 시작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한 담임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가감 없이 말씀드렸습니다. 학생들에 대해 하시고픈 말씀, 학급 운영에 대해 하시고픈 말씀이 있으시면 첨부한 설문지에 적어주십시오. 또, 아래에 적어 놓은 연락처를 통해 연락을 주셔도 됩니다.
또 하나 첨부하는 것은 우리 학생들이 폭력과 차별 없는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서울시 교육을 만들기 위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을 청원하는 서명용지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시는 학부모님께서는 함께 서명해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봄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힘겨워 할 올해도 어서 끝나고 좋은 날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