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한 지 두번째 날 일기
어제 상담했던 걱정되는 학생 K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상담일지를 꼭 기록해놓기로 했다.
(이건 온전히 나를 위한 결정)
오늘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점심시간에 회의하고 나서 계속 생각나는, 다음 내용.
'3년째 같은 업무를 하다보니 분명 익숙하기는 한데 혼자서 신나있고 잘난척하는 것 같은 느낌'
업무로 신명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3년째 고립된 업무를 혼자 도맡아 하고 있다보니, 부정적 생각들이 생겨난 것 같다.
나만 잘 아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고,
여기서 인정받는 것이 즐겁다고 느끼는 등.
근데 이게 볼썽사나울 거라는 것도 다 느껴지고.
1. 수업
어제 진도를 나갔던 반에서 진도를 나가기 위해 어제 밤까지 공부하고, 조금 넘치게 준비했더니 수업이 훨씬 수월하다.
올해 새로 나가는 문학 교과서는 아무래도 학습지 없이는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해볼까 하고 의논해보았는데 학습지는 혼자 만들어야 할 것으로 전망됨.
꾸준히 할 수 있을지 걱정되지만 학기 초만 지나가면 단군신화부터는 잘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함.
어제 수업을 준비하다가 뒤늦게 출판사에서 준 CD를 열어 보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고 쓸데 없는 것도 있다.
내가 제안하여 운문은 꼭 낭송을 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낭송이 모두 빠짐없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정성은 갸륵하나
들어보니 절대로 틀어줄 일 없을 것 같은 낭송이다.
문장.or.kr에서 연재되는 시 낭송이 좋아서 해달라고 했던 건데 이따위로 해놓다니 정말 실망.
그 외에는 평가문항이 실려있는데 평가문항까지 교사들이 여기에 의지하는지?
예전에 대학에서 공부할 때 국정 교과서 폐지에 따라 출판 자본이 학습 내용을 지배하고 있다는 분석을 교수님이 하셨었는데 실제로 그 현장을 목도하는 듯.
판서를 잘 하는 것은 수업의 기본일 텐데, 아직도 조금 자신이 없다.
EBS 강사들이 하는 것 중 부러운 것 하나는 구조화된 판서.
나는 PPT가 싫어서, 어지간하면 쓰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구조화된 판서를 못한다면 PPT가 낫다고 생각할런지, 잘모르겠다.
어찌됐든 문제집이 아니라 교과서를 나가기로 했으니 아직은 흥이 난다.
준비를 잘 해야지.
송인(정지상) 수업
물이 상징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시를 읽으며 시 속에서 자연물 찾아 동그라미 해보기
시를 읽고 떠오른 풍경
한줄 씩 내용 살펴보기 (기승전결)
시어들의 관계
운율(압운)
표현
다른 번역과 비교하기
이수복 '봄비'와 비교
송인은 정말 아름다운 시인데, 그걸 제대로 전달했을까.
2. 담임
다섯 명 상담.
아침에 한명, 저녁에 네명.
모두 성적 걱정이 앞서는 친구들.
이 친구들을 어떻게 대학을 보낼지,
고민하면서 우왕좌왕하다가 졸업 후에도 찝찝한 채로 남을 것 같아서 걱정이다.
방법이 없는 걸 어쩌나, 싶다가도 정말 없나? 싶어서 다시 보게 되고.
그런데 대학 보낼 방법을 찾는다고 한들 이게 정말 방법인가? 싶기도 하고.
오늘 학급회 조직함.
회장 부회장 선거에서 후보 추천이 한명밖에 되지 않아 한 십여분 당황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설득도 해보고, 제비뽑기로 협박도 해보고, (제비뽑기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 맥락에서는 협박이나 다름없었겠지)
그러다가 결국 여러번 회장 했던 친구의 추천이 나와서 안도하고 회장 부회장 결정.
'다행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게 회장 부회장 선거 결과에 대한 말로 읽힐까봐 걱정.
말하자마자 '제비뽑기 안해서 다행이라고요'라고 하긴 했는데 괜찮겠지?
담임 첫 해 반장선거에서 실수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오늘도 마음이 조심스럽네.
청소조를 정하고, 청소하는 방법을 내 나름대로 설득해보았다.
뒤로 밀기, 뒤로 쓸기, 한번에 모아 버리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같이 마무리하기.
작년에 청소지도를 게을리 해보고 나니 절대로 거르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끝까지 실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담이 끝나면 배고픈 채로 저녁 시간을 넘겨서,
어제부터 계속 저질 저녁을 먹고 있는데,
이것도 이번주까지만 하고 다음주부터는 빨리 끝내야지.
도시락을 싸와 볼까.
삼일째 쓰레기를 바로 정리하고 퇴근하고 있는데 이것도 끝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