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슨웹 인터뷰 워크샵에 실었던 글


인터뷰에 관한 잡담

두리번
 
인터뷰는 묘한 대화다. 질문은 내가 그에게 던지지만 그의 대답은 독자들을 향한다. 그는 나에게 말하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말한다. 말하는 사람은 인터뷰이지만 그의 말을 요리할 사람은 나다. 질문과 글 작성의 칼날을 쥔 나는 인터뷰이의 대답을 유도하고, 정리하고,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는 권한을 가진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그의 속사정에 대해 다 알고 있는 매니저처럼, 또 때로는 천연덕스럽게 문외한의 행세를 하며 질문을 던진다. 둘의 대화는 때로는 내밀한 국면을 거치지만 대부분은 마치 이 대화를 듣는 관객이 있는 양, 보란 듯이 진행된다. 그래서 인터뷰 장면의 대화는 종종 토론, 혹은 연설이기도 하다. 
 
이렇게 토론 혹은 연설로 변질되곤 하는 ‘인터뷰’라는 묘한 대화를, 나는 꽤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다. 고백건대 실은 나 자신이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으나 그 통로를 찾지 못했던 많은 말들이, 인터뷰이의 입을 빌어 퍼슨웹의 지면을 채워갔다. 나는 인터뷰이 뒤에 숨어 인터뷰이의 등을 쿡쿡 찔러 무언가를 말하게 한 후 회심에 찬 미소로 그것을 인터뷰이의 이름으로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인터뷰 글에는 보이지 않는 별표들, 형광색의 밑줄들이 있다. ‘여기를 읽으라구 여기를!’하는 보이지 않는 외침이 글의 행간에 담겼다. 
 
또 한편으로 나는 내가 배움을 얻고 싶은 이들을 인터뷰이로 초청했다. 과거 대학시절 함께 활동했었으나 어느덧 직장 생활을 하면서 멀어진 이들을 만나 최근의 활동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무뎌져 가는 정치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계기로 삼았다. 혹은, 스쳐가는 짧은 만남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이들을 인터뷰이로 모셔 궁금한 것들을 물으며 본격적인 개인 과외의 자리로 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늘 인터뷰이의 말에 쉽게 동조하는 편이었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로서의 역할에는 게을렀다. 그러다 보니 나의 글은 그 배움의 기록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 게을렀던 것은 준비 과정에서 인터뷰이에게 반해버렸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를 인터뷰이로 골라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때부터 그를 만날 날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면, 그 중에 며칠 간, 인터뷰이에게 몰입하게 되는 기간이 있다. 그 기간에 나는 스토커가 된다. 인터뷰이의 삶을 구글링하기도 하고, 그의 블로그나 트위터를 탐독하기도 한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알아버리겠어!’라고 중얼거리는 - 욕망에 사로잡힌 스토커가 되어 그의 기사를 읽고, 그가 쓴 글을 읽고, 하다보면 어느덧 그의 삶에 반해버리는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마음 속에서 퐁퐁퐁 솟아 오를 때,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적어나갈 때 내 마음은, 가벼운 흥분 상태였다. 
 
결국은 인터뷰 자리에 날카로운 취재 기자의 마음보다는 ‘팬심’으로 가득 찬 부푼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가곤 했다. 이 부푼 마음은 인터뷰 대화의 녹음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 녹취를 하기 위해 녹음을 듣다 보면 민망해질 때가 많다. 그의 마음을 잘 구슬러 그가 조금씩 내밀한 속내를 보일 때라거나, 기대했던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올 때에 느꼈던 일종의 쾌감은 녹음 속에 반드시 드러난다. 과장된 웃음으로, 혹은 엉뚱한 추임새로.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인터뷰어를 요리하기 위해 과장되게 반응하고 동조하는 나를 볼 때, 깨닫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에 의아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인터뷰는 궁극의 팬질, 나와 인터뷰이와 독자와 편집장의 욕망들이 다투는 투쟁의 장, 나와 인터뷰이와 세상에 대한 공부 노트,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나의 마이크... 와 같은 다양한 옷을 입은 묘한 대화다. 
 
인터뷰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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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자 퍼슨웹 업데이트.
사진과 함께 곱게 편집된 기사는 여기로 -  http://www.personweb.com


평화의 언어로 병역거부를 말하다 - 임재성

임재성 씨는 병역거부자다. 입영 일이었던 2004년 12월 13일, “누군가는 먼저 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전쟁과 폭력으로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군대 대신 감옥행을 택했다. 그는 출소 후 ‘평화학’ 연구에 수 년 간 매진했고, 최근 평화운동의 관점에서 병역거부 운동을 돌아보는 저서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를 펴냈다. 

두리번 / @redpebl

과거 ‘집총 거부’는 특정 종교인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2001년 말, 불교 신자 오태양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 이후 자신의 소신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병역거부는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당시 군대 대신 감옥행을 선택하던 이들은 1년에 약 1600명. 그들이 ‘대체복무’라는 다른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오태양의 선언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고, 병역거부자들의 의미를 알려내는 활동, 대체복무제를 마련하자는 서명 운동에 열심이었다. 주변의 남학생들은 군 복무가 다가오는 나이였고, 이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스스로 병역을 거부하겠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임재성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친구들이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했다. 

대체복무제에 동의하는 서명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기득권자들의 병역 비리가 불거져 나오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병역거부’는 ‘병역기피’로 오인받기 일쑤였다. “이러다가 다들 대체복무제로 빠지면 어떡할 건데요?”라는, 병역 제도에 대한 불신과 우려만이 가득한 목소리 앞에서, 병역거부 운동의 본질적인 질문들은 일단 보류되었다. 병역기피의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우선 ‘만 3년에 합숙생활을 대체복무제도로 하면 된다.’며 소심한 대답을 하고, ‘당신도 군대에 가기 무섭지 않나요?’, ‘군대 안 가도 되는 세상이 더 좋지 않나요?’라는 질문은 목에 걸린 채로 꿀꺽, 삼켜야 했다. 

이렇게 병역거부 운동은 ‘감옥행을 멈춰 달라’, ‘대체복무제를 마련해달라’는 목소리를 높이며 병역을 거부한 이들의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소수자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임재성 씨는 이번 저서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에서, 당시의 상황을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의 긴장’이라 진단한다. 정작 말하고 싶었으나 삼켜야만 했던 말들 - 전쟁을 반대하고 군사주의를 비판하는, 즉 ‘평화의 언어’가 아직 말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책 보러 가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7457

책을 읽으며, 필자도 어느 새 조금 멀어져 잊고 지냈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느새 ‘역사’라고 이름붙일 만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온 병역거부 운동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나 싶어 조금은 두근거리기도 했다. 책의 저자를 직접 만나, 출소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 그간 진행했던 병역거부 운동, 평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군대, 안 가겠습니다. 

퍼 :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수감되기 전이었던 것 같아요. 출소한 건 언제였어요? 

임 : 2006년 5월 4일, 석가탄신일을 맞아서 가석방됐죠. 

퍼 : 오래 전이네요. 그럼 수감되었던 건? 

임 : 2005년 1월 28일에 구속됐죠. 원래 입영일은 2004년 12월 13일이었구요. 

퍼 : 그날, 입영을 하지 않았던 거군요. 재성 씨는, 대학 시절에 이미 예비 병역거부 선언*도 했었지요. 그때가 기억이 난다면 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 예비 병역거부 선언 관련 기사 <병역거부 ‘어깨동무’>(한겨레2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0071

임 : 네, 그랬죠. 당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고, 제가 속해있던 모임에서 병역거부 운동을 대중적으로 펼쳐나가자고 하면서, 예비 병역거부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받았던 것이 계기라면 계기이죠. 

퍼 : 그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임 : 병역거부 운동에 참여하면서 스스로의 군대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고, 병역거부에 대한 이성적, 감정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커져갔지요. 그렇지만 군대에 가지 않는 걸 선택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권유를 받았을 때도 ‘할까, 말까’ 하고 고민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행사에서 이미 병역거부를 하신 유호근 씨가 발언을 하시는 걸 듣게 됐어요. 

퍼 : 유호근 씨는 2002년에 병역거부 선언을 하신 분이죠? 

임 : 네. 그때가 2002년이었어요. 그날, 한 10분 동안,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분이 하는 말씀이 다 맞는 거예요. 틀린 말이 한 마디도 없어. 그래서 옆에 같이 앉아있던 후배에게 이야기했어요. “야, 나 병역거부 해야겠다. 저 사람이 하는 얘기에 대해서 내가 다 동의하는데 안 하는 건 이상하다.” 만약 내가 하지 않는다면,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조건들 때문이겠다고 생각했죠. 

퍼 : 생각에 동의한다고 모두가 결심할 수 있는 쉬운 선택은 아니죠.

임 : 그렇죠. 병역거부는 감옥행이고, 또 나머지 삶을 전과자로서 살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당시에 학생운동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걸 많이 봤었기 때문에, 감옥의 문턱을 낮게 느꼈던 거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이 고민했겠지요. 

퍼 : 예비 병역거부 이후로는 어땠나요?

임 :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이 터졌던 것도 저에게는 큰 영향을 줬죠. 내 눈앞에서 목도한 전쟁. 저는 2004년 4월 2일이 아직도 기억나는데요,

퍼 : 그날이 무슨 날이에요? 

임 :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이 통과되던 날이에요. 국회 앞 아스팔트에 아침부터 앉아있었죠. 결국 오후 4시쯤 파병안이 통과되었어요. 많이 울었는데. 그때, 저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서 사람들이 분신도 했었겠구나, 이런 감정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몸에 그런 일을 하기도 했겠구나.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었죠. 그때 봤죠. 전쟁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일어나서 이유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는 거구나, 라고. 그 이후로 스스로가 병역 거부하기를 잘했다, 병역 거부 운동을 알게 되어 고맙다고 생각했어요. 

퍼 : 입영일이 점점 가까워지면서는 어땠나요?

임 : 부모님이 가장 마음에 걸렸죠. 부모님은 지금도 병역거부라는 말만 들어도 쓰러지려고 하세요. 혹시 또 잡혀가는 것은 아니냐는 걱정도 하시고요. 

퍼 :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렸어요? 

임 : 우연히 알게 되셨죠. 예비 병역거부를 선언했을 때, 제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었거든요. 그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가 학교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선거 포스터를 보고 너무 놀라신 거죠.

퍼 : 뭐라고 써 있었어요?

임 : 예비 병역거부 선언. 아버지는 이게 뭔 소린가 싶으시면서, 땅이 일어나서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으셨대요. 

퍼 : 학교에 직접 오지 않으셨으면 모르셨겠네요.

임 : 지금 생각해보면, 입영하는 날까지 비밀로 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어차피 부모님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건데, 미리 드릴 필요 없잖아요. 아버지는 계속 저에게 왜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서운해 하시는데, (고개를 절래절래) 미리 상의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잖아요.

퍼 :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임 : 설득을 한 게 아니라 제가 고집을 부리니까 포기를 하신 거죠. 제가 계속 고집을 부리니 아버지는 갔다 오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끝까지 포기 안 하셨구요.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세요. 두 분이 많이 다투셨죠.
 
퍼 : 어머니 마음이 더 아프셨을 것 같아요.

임 : 엄마는요, 병역거부라는 게 너무 무서운 이야기니까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하셨어요. 무서워하셔서, 제가 감옥에 있는데도 접견도 6개월 동안 못 오셨어요. 그런 데를 언제 와 보셨겠어요? 저희 어머니 아주 시골에서 자라신 분이거든요. 처음 접견 오시던 날은 접견실에 들어오지도 못하셨죠. 제가 죄수복 입고 앉아있으니까, 무서워서 도망가셨어요. 그런데 한번 오시고 나서는 마음이 조금 놓이셨는지, 매일 와서 음식 넣어주시고 편지 써서 넣어주시고. 제가 있는 게 확인이 되니까 마음이 편하셨나 봐요.

퍼 : 요즘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때요? 

임 : 아버지는 이런 얘길 하세요. 참 외로우셨대요. 차라리, 데모하다가 잡혀갔다는 건 친구한테 얘기라도 할 수가 있으셨을 거래요. 그런데 군대 안 가서 감옥에 갔다니, 이건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대요. 얼마 전에는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현빈이 해병대 갔다는 뉴스를 보면서 부끄러우셨다구요.

퍼 : 아, 가슴이 아프네요.

임 : 일종의 시소인거죠. 저쪽이 계속 도덕화되면 그 반대쪽이 더 비도덕화되는 거죠. 부정적으로 보이는 거고. 아빠가 죄지은 기분이 드실 수밖에요. 저 같은 사람들은 더 고립되는 거죠. 


병역거부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퍼 : 예비 병역거부 선언을 했던 친구들이 모두 병역거부를 했던 것은 아니죠?

임 : 진짜 고민은 그 다음부터 왔죠. 저와 함께 선언했던 친구들도 실제 입영 시기가 다가오면서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남들과 다른 생각을 오래 유지하거나 버티려면, 몸이 가까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대학 졸업 이후에 병역거부 운동 단체인 ‘전쟁 없는 세상’(http://www.withoutwar.org/)에서 활동을 했어요. 이렇게 계속 관련된 활동을 했던 것 때문에 생각을 유지할 수 있었죠. 실제로 예비선언을 했던 한 친구는, 어느 날부터 모임에 못 나오겠다고 했고, 결국은 군대에 갔고요. 

퍼 : 병역거부 이후에 전과가 있는 사람으로서 겪었던 불편함이 있어요?

임 :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제 경우에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그것을 전과로 인해 절대 이룰 수 없게 되었다면 더 힘들었을 거 같아요. 물론 그 고민 속에서도 병역거부를 했을 거 같지만요. 친구들 중에는 자기는 군대는 다녀왔지만 병역거부자를 이해하는 좋은 정치인이 되고 싶다, 병역거부를 하게 되면 정치인이 못 될 것 같다고 했던 친구도 있었어요. 

퍼 : 제 후배 중에도 교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병역거부를 못 한다는 사람이 있었죠.

임 : 그렇죠.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된 후에 다가온 입영 일에 병역거부를 하시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선생님도 계세요. 그분들은 또 대안학교라든지 하는 여러 방법을 통해 잘 살아 가시면서도 아이들을 떠난 상처를 늘 간직하고 살아가시거든요. 그런데 저에게는 이런 부분은 크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는 덜 어렵게 쉽게 결정할 수 있었을 거예요. 막상 감옥에 가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지만요.

퍼 : 막상 가보니 어땠어요?

임 : 하나의 장면이 늘 떠올라요. 감방 안의 문은요, 안에선 손잡이가 없어요. 그냥 평평하죠. 밖에서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문. 이 문이 닫히는 걸 보면, 답답하죠. 힘들어요.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점점 힘들더군요. 

퍼 :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으로서 다른 불편함은 없을까요?

임 : 저는, 병역거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아, 소수자로 살아가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좋지 않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 앞에서 느끼는 공포들이 있잖아요? 나한테 대학 어디 나왔는지 물어보면 어떡하지? 하고 느끼는. 그런 것처럼 저도, 군대에 대해 물어보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이 드는 거죠. ‘나 병역거부자예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사실 대부분이죠. 소수자라는 건. 그래서 소수자가 된다는 게 이런 마음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퍼 : 그 전에는 느낄 일이 없으셨군요.

임 : 그랬죠. 남성에, 이성애자에, 서울에 살고, 명문대를 다녔고. 주류였죠. 사실 지금도 그렇고요. 그런데 병역거부 하고 나선 달라졌어요. 

퍼 : 군대 얘기가 사회생활에서 빠지지 않죠.

임 : 그럼요, 한국 사회에서 남자에 대해서 물을 때 군대는 꼭 묻잖아요, 누군가를 처음 만나고 이야기 나누다가 군대 얘기가 나올 것 같으면, ‘안 물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나의 이야기가 저 사람한테 불편할 걸 충분히 느끼니까 스스로 위축되는 거예요. 그래서 긴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 ‘면제’라고 그래요. 실제로 면제가 된 것이기도 하고요.

퍼 : 그냥 면제라고 대답한 적 있어요?

임 : 많죠, 아주 많죠. 이를테면, 저는 예전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웹 디자인 일을 했거든요. 그럼, 고객들과 만나 밥을 먹을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임재성 씨는 군대 갔다 오셨죠?’라고 물으면, 그렇게 한 번 만나는 사람한테 설명하기 불편하니까요. 

퍼 : 제가 대학 다니던 당시, 학생운동하던 사람이 병역거부를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들도 있었던 것 기억하고 있어요. 재성 씨도 학생운동을 하면서 폭력적인 시위 현장에서 앞장서 본 적 있죠? 

임 : 그럼요. ‘사수대 조장’도 해 보고 그랬죠. 

퍼 : 그때의 기억이 어떤지 궁금해요. 

임 : 음,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 연구한 기록들을 보면, 전투 상황에서 전쟁의 대의명분에 대해 숙고하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제가 사수대 경험에서 느낀 것도, 그런 거예요. 전경들과 딱 맞닥뜨리면, 데모의 대의명분? 그런 거, 금방 사라져요. 쟤들도 나보다 어리거나 끌려온 애들인데… 하는 미안한 마음도 없어져요. 격렬하게 충돌하고, 맞고 때리고. 몇 번 그러다보면. 무조건, 때려야 되고 자빠뜨려야 되고. 그랬던 경험들이 마음에 무겁게 남는 것 같아요. 

퍼 : 전투 상황에서는 원초적인 본능만 남는군요. 

임 : 그렇죠. 그래서 이런 생각 많이 해요. 전쟁에 동원된다는 건, 진짜 ‘도구’가 되는 거구나. 명분이 있어 싸우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는 ‘내 옆 사람이 죽고 나면 나도 죽는다.’와 같은 원초적이고 미시적인 공포와 내 눈앞에 있는 저 집단에게 느끼는 살의만 남는다고, 연구의 기록들이 말해주고 있어요. 

퍼 : 폭력적으로 데모하던 사람은 평화를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임 : 그랬죠. 2002년에 병역거부를 하셨던 제 선배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데모하러 나가면 가장 폭력적으로 싸우던 놈이 무슨 병역거부냐’고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셨었죠. 

퍼 : 병역거부자 이미지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걸까요?

임 : 저희 아버지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출소하던 날,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를 마중 나와 주신 분들이 여럿 계셨는데, 그 중에 병역거부를 준비하시던 김도형 씨라고, 불교 신자였던 분이 계셨거든요. 아버지가 그분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나중에 저에게 “야, 저 사람은 진짜 병역거부자 같구나.”고 하시더군요. 병역거부자의 아버지에게도 ‘병역거부자 이미지’가 따로 있나보다 싶어서 재미있었어요.

퍼 : 하하하, 아버지께서도 병역거부자 ‘다움’이 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임 : 병역거부자들은 총을 드는 것을 거부해서 감옥까지 가는 사람들이니까, 그에 부합하는 이미지들을 기대하세요. 

퍼 : 병역거부라는 개인의 선택에 대해 ‘그럴 만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하고 왈가왈부한다는 건,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임 : 우리가 소수자에게 원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소수자다운 얼굴, 적당히 불쌍하고 약한 이미지를 원하죠. 너무 말을 잘 해도 안 되던걸요.

퍼 :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임 : 그런데 우리 병역거부 운동하는 사람들은 이걸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설득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재밌고 행복하게 사는 거 같아요. 나처럼 살면 재밌다, 나처럼 살면 행복해진다고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원하지 않아요. 그러면 소수자답지 않다고 생각하죠. 그 딜레마가 있는 것 같더군요.


군대를, 왜 안 갔습니까?

퍼 : 책의 맨 앞부분에 “왜 병역거부를 했느냐?”는 질문을 받는 부분이 있어요.

임 : 네. 2006년 당시 국방부에서 대체복무제 연구위원회를 꾸렸을 때 병역거부자들을 데려다 놓고 했던 질문이었죠. 그런데 우리의 답변이 자신들이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라는 듯이 무척 불만스러워했었어요. 뭔가 정말 특별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은, 납득이 갈 만한 이유를 기대했었나 봐요. 그렇게 저희를 완벽히 타자화시킬 때에야 우리를 소수자로 인정할 수 있고, 그래야만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거겠죠.

퍼 : 그런 질문은 한두 번 받아본 것이 아닐 텐데요.

임 : 제가 수감되어 있을 때도 그랬어요. 방 바뀔 때마다, 사람들 새로 만날 때마다 같은 대화가 반복돼요. ‘왜 들어왔느냐’ - ‘병역거부해서요’ - ‘여호와의 증인이냐’ - ‘아니요… 저는 사실… ’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해 버릴까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이해받기 어렵구요.  

퍼 : 아예 써서 나눠줘 보지 그랬어요. 

임 : 그 생각도 했죠. 내가 가진 이야기 중에서 몇 가지 자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붙여서 남들이 조금 쉽게 납득될 만한 스토리를 만들어 볼까 싶기도 했어요, 반응이 좋은 걸로. 상식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납득이 되려면 충격이 필요하기는 하니까요.

퍼 : 당연한 것으로 굳어버린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렇겠죠. 

임 : 듣는 사람이 그걸 원하기도 하죠. 광주 출신의 병역거부자인 제 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래요. 광주 출신이라 병역거부를 한 거 아니냐고. 사실 그 친구 스스로는 광주라는 고향의 정체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데 말이죠. 

퍼 : 아.

임 : 그렇게 이해하고 싶은 거예요. 광주에서 국가의 폭력을 봐서 그렇다고요. 제주도 출신이면, 4·3 항쟁 이후의 상처들을 보고 자라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싶어 하고요. 뭔가 남다른 배경이 있을 때에야 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거죠. 사실 제 책의 6장에서 병역거부자들 한 명 한 명을 다룬 인터뷰를 배치하면서도, 그런 점을 고려했던 것도 있어요. 

퍼 : 특별한 상황에 놓였던 병역거부자들을 인터뷰하셨죠. 

임 : 네. 특별한 경험들. 1991년에 백골단으로 활동하다가 강경대 열사가 죽는 걸 보고 군복무를 거부하게 된 사람, 2008년 촛불집회의 무력 진압을 보고 거부한 사람, 동성애자로서 군 입대를 거부한 사람. 이런 분들은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공감을 얻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죠. 제가 제 책에서 이 이야기를 열심히 다룬 것도 어떻게 보면 한계라고 할 수 있어요. 

퍼 :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병역거부 이야기도 다루고 싶으셨던 거죠?

임 : 그렇죠. 그런데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병역거부를 한다는 건, 공감을 받기 더 어렵죠. 사실은 그 부분을 좀 파고들고 싶었던 거였어요. 

퍼 : 책이 나온 후에 그 공감을 얻는 데에 조금 성공한 것 같나요? 

임 : 병역거부자들은 자기 언어가 없어요. 모든 소수자들이 그렇듯이. 그런데 병역거부를 하신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자기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 같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자기 대변인 같았다나요? 또 병역거부자들의 주변인들이, 그 친구의 수감생활을 도우면서도 정작 자기 스스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기가 참 힘들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더군요. 

퍼 :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설득할 수 있겠네요.

임 : 이를테면 저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설명하기 굉장히 힘들거든요. 얼마 전에는 친구와 친구 부인을 만났는데, 사실 제 친구야, 저를 이해는 못해도 이미 받아들였지만, 친구 부인이 보면 제가 좀 이상해 보였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책이 나왔다고 친구들에게 한 권씩 줬더니, 그 친구 부인이 보고서는, “이제야 재성 씨를 이해할 수 있겠다”라고 했대요, 하하하.

퍼 : 병역거부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임 : 예, 병역거부자들이 이 책을 부모님들께 많이 갖다 줬대요. 병역거부에 대해서, 나와 가까울수록 설명하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요. 부모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 가장 어렵고요. 만약 이 책이 앞으로,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이들이 그들의 부모님께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드릴 수 있는 책이 된다면, 정말 기쁠 거 같아요. 

퍼 : 책을 낸 보람이 있으시겠어요. 

임 : 이 책의 편집자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일주일에 책이 이백 권이 넘게 나온대요. 1/200, 한 달로 치면 천 권 중의 하나인 건데, 그중에 의미 없는 책들이 더 많다. 그런데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책이 되지 않느냐고, 그럼 된 거라고요. 이 책이 뭐, 신정아 씨의 <4001>처럼 팔리겠어요? 제 책에 추천사를 써 주신 한홍구 선생님과도 이런 대화를 나눴어요. ‘선생님, 어떠세요?’ - ‘잘 읽혀.’ - ‘잘 나갈 것 같아요?’ - ‘에이, 잘 나가겠어?’ (웃음)

퍼 : 대중적으로 팔릴 만한 책은 아니라는 거군요. 

임 : 제가 책 부제에 이렇게 썼죠.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저는 지금까지 병역거부자들이 ‘말하지 못했던 것’을 담고 싶었던 건데, ‘말했다’고 생각했던 것도 여전히 말하지 못했던 것이더군요. 아쉬운 점도 많아요.

퍼 : 말은 해왔으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던 거네요.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퍼 : 비폭력이라는 말이 쉬우면서도 어려워요. 

임 : 레비나스라는 사람이 이런 얘길 했어요.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내가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이의 긴장이 비폭력이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너무 커요. ‘우리나라 침략 당하면 어떡할래?’라는 질문만 끊임없이 던져왔죠.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하죠. 그런데 자기가 죽일 수도 있잖아요. 이 둘 사이의 긴장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퍼 : 보호 본능이 더 큰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죠.

임 : 병역거부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만날 이렇게 물어봐요. “네 누이가 강간당하면 그래도 가만히 있을래?”라고. 그 질문에, 자신이 다른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주저함은 없지요. “네가 누구한테 성추행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니?”라고는 아무도 묻지 않잖아요. 내가 누구에게 폭력을 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해요. 저는, 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게 병역거부자들인 것 같아요.

퍼 : 민감한 사람들이네요.

임 : 병역거부자의 의미는, 한국 사회에 부재했던, 내가 누굴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비록 미약하지만 10년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었어요. 저는 책을 통해서 이런 그들을, ‘불쌍한 사람, 보호해 줘야 하는 사람, 구제해 줘야 되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만든 자로서, 어떻게 다른 사람인지를 보도록 하고 싶었어요.

퍼 : 책에서 ‘평화학의 방법론’이라는 이름으로 ‘공감’이라는 화두를 던지셨어요. 

임 : 병역거부자들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실제로 병역 제도 아래에서 군대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고민했던 시간들, 수감됐을 때의 경험들을 통해서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 공감이 흔히 이야기하는 공감이랑은 다른 거 같아요. 

퍼 : 다른 사람들이 병역거부자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조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임 : 마음을 정말 움직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국가와 민족은, 사실상 유사 종교니까요. 그렇게 보면 군대를 안 가겠다는 건 신성모독이잖아요. 사실 어떻게 보면 국가를 부인하는 거죠. 만약에 전체 민주주의에 요만큼의 특이한 소수자들이 있다면, 그걸 받아들이는 건 쉬울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에 공감하겠다? 거기에 공감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이건 어려운 일이죠. 

퍼 : 그렇지만 재성 씨는 그 질문을 하고 싶으신 거죠?

임 : 아주 근본적으로는 그 얘길 하고 싶은 거 맞아요. 병역거부자들의 마음을 보이고, “넌 어떻게 생각하니, 너의 결정은 뭐니?”라고 묻고 싶어요.

퍼 : 조금 추상적인 질문을. 국가란 무엇일까요?

임 : 대학원 다니면 많이 팔리는 책은 별로 안 보게 되는데, 책을 내고 나니 좀 살펴봐요. 벤치마킹? (웃음). 최근에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을 책방에서 슬쩍 살펴봤는데, 유시민이 가장 처음에 했던 국가에 대한 분석이 이거예요, ‘합법적 폭력의 독점체’. 

*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보러 가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4274 

퍼 : 정말 그렇군요. 국가의 폭력은 합법적이죠.

임 : 이게, 홉스가 했던 이야기랑도 연결되는데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상황에서 홉스는 전쟁을 멈추는 한 방식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사적인 폭력들을 국가가 독점하면 될 거라고 했어요. 16세기 내전상태의 영국에서 살았던 홉스가 ‘평화’를 만들기 위한 방식이었죠. 이건 사실 말은 맞죠, 사적 폭력은 줄어들죠.

퍼 : 국가가 치안의 역할을 하니까요.

임 : 그런데 그 결론으로, 점점 더 큰 대규모의 전쟁이 가능해지고 집단 학살이 등장했죠. 저는 지금의 국가의 모습은 폭력의 독점체라 보고, 그것이 가진 위험과 오류를 연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했던 행동 역시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폭력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것이고요. 

퍼 : 병역을 거부하는 일의 의미죠.

임 : 대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한 부류는, 지역 방위의 개념으로 확장시켜서 폭력의 단위를 국가에서 하나 더 올리자는 거예요. EU라는 프로젝트가 ‘지역 안보’ 시스템의 대표적인 실험이죠. 결국 크게 보면 칸트가 말한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세계 공화국 만들면 전쟁 없어진다는 거.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단위에서 폭력을 독점하게 하는 것이죠. 

퍼 : 세계 공화국을 만들면 적국이 없어지기는 하겠네요.

임 :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아나키스트들의 방식이죠. 군대 없는 세상, 국가 없는 세상. 소규모 공동체. 존 레논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글쎄요, 저는 둘 중에 뭐가 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어떤 주체에게 통제된 무력이든, 그것이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만 쓰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거예요. 압도적인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면. 궁극적으로 평화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봐요. 세계 공화국을 만들면 행복할까요? 전 그 엄청난 권력이 두렵기도 합니다.

 
일본의 평화 박물관

퍼 : 작년에는 교토에서 평화 연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임 : 일본의 평화박물관에 대한 연구를 했어요. 흔히 말하는 역사라는 건,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걸 위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국가는 스스로가 정당화시키지 못하는 기억들은 끊임없이 삭제하려는 시도들을 하죠. 그중에 가장 큰 게 전쟁이고요. 일본은, 가해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기억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포장하고, 혹은 고백하는지가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는 것이 평화박물관이에요.

퍼 : 평화박물관이 많은가요? 

임 : 일본은 평화박물관의 나라라고 하죠. 평화박물관은 전 세계에 한 백 개 정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중에 50개 이상이 일본에 있어요. 평화박물관을 통해서 전쟁의 기억을 전시하거나 기념하죠. 평화박물관 중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가장 대표적인데, 일본에서는 그 지역의 평화박물관에 가는 게 초중고 수학여행의 가장 중요한 코스예요.

퍼 : ‘히로시마, 나가사키’라면 자신들을 피해자로 기억하는 거 아닌가요?

임 : 그렇죠. 일본에서 ‘평화’라는 말은 가해자로서의 기억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에요. 평화박물관이니, 평화길 이런 말들이 곳곳에 범람해요. 그러나 그 평화는 일본만의 평화라고 할 수 있죠.

퍼 : 우리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네요. 

임 : 평화도 ‘어떤’ 평화냐가 중요한데, 피해자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의아한 일이죠. 그런데, 본인이 가해자라는 걸 인식하고 살아가는 건 참 힘든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잊고 정당화시키는 게 보통의 자연스러운 방식이에요. 원폭의 기억을 호출하든, 자신들이 특정한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몰랐다고 얘기하든. 

퍼 : 원폭의 기억을 호출한다는 건 어떤 건가요?

임 :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에 가면, 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만 있어요. 물론 최근 리모델링 하면서 역사적 맥락이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전체 규모에서 보면 일부에 불과하죠. 전쟁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원폭인데, 이를 탈 역사화시키고 탈 맥락화시켜서, 원폭만을 절대 악으로 만드는 거예요. “원폭 반대=평화”라는 메시지를 불편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동의할 수 있죠. 다 끌어안고 같이 울고, “원자폭탄을 실험하지 맙시다! 없앱시다!”라고. 

퍼 : 그러고 보니 저도 히로시마가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를 모르네요.

임 : 히로시마는 당시에 제2의 군사도시였어요. 1900년대 초반부터 엄청난 군사 시설이 발달했죠. 청일전쟁 때부터 군인들이 싸우기 위해 출발하는 항구가 히로시마였고요.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은 그런 상징성 때문에 여러 가지를 계산해서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던 거죠. 

퍼 : 그랬군요. 

임 : 제1의 군사도시는 황군 사령부인 동경이었는데, 동경에 원폭을 떨어뜨려서 우두머리가 죽으면, 협상을 못하잖아요. 아시아 각지에 주둔해 있던 일본 군인들이 빨치산이 되거나 게릴라가 되면 어떡해요? 한꺼번에 일사불란하게 무장해제하고 본국으로 들어가려면, 우두머리가 죽으면 안 되죠. 특히 군최고통수권자였던 일본 천황이 말이죠.

퍼 : 치밀했네요.

임 : 아주 치밀했어요, 교토에 왜 그 유적들이 다 남아있을 수 있는지 아세요? 원폭 후보지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전쟁 말기 미국이 계속 퍼부었던 공중 폭격을 안 했어요. 

퍼 : 왜요?

임 : 원폭을 떨어뜨렸을 때 얼마나 한 번에 없앨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놔둬 봤던 거예요. 미리 폭격을 해 버리면 그걸 알 수가 없잖아요. 

퍼 : 소름 끼치는군요.

임 : 반면 오사카나 동경에는 공습 사이렌의 기억이 있어요. 사이렌이 울리고 미군이 와서 폭격하고 가는. 그래서 동경은 유적이 많이 훼손됐죠. 그러다가, 교토에 원폭을 떨어뜨리면 반미 감정이 너무 커질 것 같았다나요? 교토도 일본의 천년 고도라는 상징성이 있잖아요. 전후 지배해야 하는데, 일본의 자존심이 너무 훼손될 테니까요. 

퍼 : 아. 

임 : 그래서 히로시마가 선택되었다고 해요. 마침 8월 6일 히로시마의 날씨가 좋았고. 비극이죠. 그런 치밀한 계산 하에, 히로시마는 ‘죽여도 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되었던 거죠. 

퍼 : 끔찍한 일이네요.

임 : 물론 히로시마의 원폭은 안타까운 일이고, 다신 일어나선 안 되지요. 명백한 전쟁범죄에요. 그런데 일본 역시 히로시마를 통해서 스스로 책임져야 할 전쟁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노력을 전후에 시작하죠. 

퍼 : 히로시마 박물관이 그 노력 중 하나이겠네요. 

임 : 히로시마 박물관에는 민간인의 기억, 피해를 당한 기억만 있어요. 일본 군인의 기억은 없죠. 원폭은 전쟁의 맥락에서 있었던 건데, 일본 군인은 사라지고 없고 히로시마 민간인에 대한 기억만 있는 거예요. 그렇게 탈 맥락화시키는 거죠. 



가해자의 자리, 가해자의 기억

퍼 : 조금 다른 평화박물관도 있다던데요.

임 :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잊지 말고 힘들게 살자고 이야기하는 박물관도 있어요. 일본 사회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놓고 오랜 논쟁 중이거든요.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도 있고, 야스쿠니처럼 전쟁을 정당화하는 방식도 있지만 스스로를 가해자의 자리에 놓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도 있죠.

퍼 : 그런 박물관을 소개해주세요.

임 :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에서 만든 평화 박물관의 경우에는 가해자의 기억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어요. 

퍼 : 어떤 기억인가요?

임 : 이 대학은 당시 아주 우익적인 대학이었어요. 천황이 교토에 있었을 때는 천황 깃발 들고 천황을 지키겠다고 사수대를 조직하고 그랬던 대학인데, 전쟁이 나고 대학생들이 처음에는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다가 학도병들이 나가기 시작하니까 ‘우리가 보내겠다.’고 비장하게 결의했죠. 그 대학 학생들은 중국으로 파병이 되었고, 그 지역이 난징대학살이 있었던 곳과 밀접한 곳이었죠.

퍼 : 그 대학생들이 학살에 참여했었다는 걸 기록하고 있는 건가요?

임 : 그 사람들이 학살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는 거지만, 자신들이 어디로 갔었는지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거죠. 절대악을 향해서 평화를 외치면서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아요. 리츠메이칸은 그 후엔 ‘우리 학생들은 절대 전쟁터로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해요. 거기서 시작하고 있어요. 그 가해자로서의 불편한 자리를 외면하지 않는 거죠.

퍼 : 다른 곳은 어떤가요?

임 : 피스오사카 박물관도 유명하죠. 미국인들이 어떻게 오사카에 공습을 해왔고 어떻게 불타고 죽었는지도 기록하고 있지만, 그 당시 오사카가 어떤 공간이었는지도 말하죠. 오사카에는 군사 시설이 많았는데, 이것을 삭제하지 않고 함께 보여줘요. 

퍼 : 전쟁의 맥락을 함께 보여주는군요.

임 : 그렇죠. 그리고 전쟁을 일컫는 말도 달라요. 앞선 리츠메이칸 평화박물관이나 피스오사카 박물관에서는 ‘15년 전쟁’이라고 전쟁을 일컫고 있어요. 보통 주류 일본사회의 전쟁기억은 태평양 전쟁, 즉 1941년 진주만 폭격부터 시작하는 미국과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거든요. 명칭이 기억을 결정하지요.

퍼 : ‘15년 전쟁’이라면?

임 : ‘15년 전쟁’이라는 명칭은 1931년 만주침략부터 시작하는, 아시아에서 자신들이 했던 일들까지 담고자 하는 거죠.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식민지의 역사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문제 있는 명칭이라 할 수 있지만, 그나마 이 정도의 명칭도 일본에서는 “좌파”적인 명칭이에요. 이런 평화박물관들에는 일본 군인들에 대한 기억이 있죠. 일본 군인들이 중국에서 뭘 했는지, 조선에서 뭘 했는지. 

퍼 : 가해자의 기억을 간직하려는 거군요.

임 : 민간인들에 대한 기억 역시 자국민의 피해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이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총동원령이 어떻게 내려지고 어떻게 동원되었는지, 국방 애국 부인회같은 단체들이 얼마나 열심히 남자들을 다 찾아내서 군대에 내보냈는지 등등, 이런 기억들이 있죠.

퍼 : 이런 흐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임 : 이전부터 일본 시민사회가 전쟁기억을 형성하기 위한 전시운동을 벌였어요. 그리고 90년대에 와서 냉전체제가 마무리되면서부터, 이런 박물관들이 91년, 92년쯤 만들어져요. 

퍼 : 다양한 목소리가 가능해졌나보네요. 

임 : 이때부터 아시아의 ‘타자들’이 입을 떼고 말을 해요. 그 전까지,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도 난징 대학살도 다 조직된 거라고 해왔거든요. 그런데 위안부 피해자들이 진실을 고백하기 시작하고, 강제징용 사과하라는 요구의 목소리들이 시작되는 거죠. 냉전시대에는 오로지 '아군과 적군'의 구도 속에서 침묵을 강요했다면, 그때부턴 다른 목소리들이 움직이는 거죠. 보통, 그때부터 일본의 진짜 전후가 시작되었다고 봐요.

퍼 : 한국에도 평화박물관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죠?

임 : 베트남전 진상규명운동에서 진화한 평화박물관 건립준비위원회가 있어요. 저도 회원인데요. 그러나 이 단체는 아직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평화운동단체의 성격이 강해요. 제주에 4·3 평화박물관이 있고, 거창의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는 시설도 있고요. 거창에 가면 군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비석이 있어요. 유례가 없는 모습인데요, 평화를 기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지요. 

퍼 : 가해자임을 고백하는 모습이네요.

임 : 그렇죠. 우리나라에선 아직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야기예요. 독일에는 베를린 한복판에 유럽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추모비가 있는데요, 지하의 관람시설 중 하나를 들어가면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대부분 1944년 1945년에 다 죽죠. 제가 영어는 잘 못하지만 그 말소리가 계속해서 ‘저먼 아미(German Army)가 어떻게 했고, 저머니(Germany)가 어떻게 했고’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걸 들으면서, 독일인이 이걸 견딜 수 있을까 싶더라구요. 

퍼 : 우리라면. 

임 : 그렇죠. 생각해봐요, 만약 우리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요? ‘한국군대가 죽였고 한국인이 학살했고’... 아마 못 견딜 거예요. 상시적으로 안보에 위협을 느껴서인지, 우리는 아직 국가 폭력에 대해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퍼 : 국가 폭력에 대한 거리두기?

임 : 누가 묻던데, 연평도 포격 이후에 해병대를 더 많이 가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전 당연한 심리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런 상황으로 오히려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도 늘어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거봐라, 결국 결론이 이거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안 되는 게 문제죠. 국론이 분열되면 안 된다, 일치단결해야 한다. 전쟁 앞에서는 언제나 이 말이 강조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퍼 :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군요.

임 : 일본이 전쟁 기억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해 온 것과 달리 한국사회엔 아예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일본 사회도 사회운동이 많이 무너졌고, 상당히 우경화된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평화운동과 관련해서는 일본이 한국사회에 비해 많은 시사점을 가지고 있죠. 일본에서는 헌법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사회운동이잖아요.

퍼 : 평화헌법 수호를 말하는 거죠?

임 : 일본에서 가장 큰 데모는 5월 3일이랑 11월 3일이에요. 이게 헌법 제정일과 헌법 시행일이에요. 가장 중심에는 헌법 9조가 있지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전쟁을 영구히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육·해·공군을 보유하지 않는다.”

퍼 : 그 헌법을 삭제하려는 시도들이 있는 거죠? 

임 : “일본도 이제 ‘보통 국가’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일본 자위대가 세계 군비 지출 5위권인 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9조를 안 바꾸고 지키고 있는 건 일본 시민 사회의 힘이라고 봐요. 전후 일본이 전쟁과 거리를 유지해본 것 역시 헌법 9조의 힘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학교에서도 왜 헌법 9조가 있는지 다 가르치게 되어 있어요.

퍼 : 병역거부도 국가 폭력에 대한 거리두기의 일종이죠.

임 : 독일에서 병역거부하는 사람들은 홀로코스트,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군인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소견서에 많이 쓰는데,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 국가 폭력에 대한 성찰과 통제가 가능할 수 있다고 봐요.


평화를 연구하다

퍼 : 아까부터 말씀하신, ‘자신을 가해자의 위치에 놓는 것’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이것은, 너무나 불편하고 어렵지 않나요? 책의 마지막에도 쓰셨듯이, 병역거부 운동이 소위 ‘배운 사람들’, 이런 담론을 접한 사람들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임 : 맞아요, 정말 그래요. 국가폭력이니 뭐니 하는 말들이 어려운 얘기죠. 한편으로는 평화라는 것이 중산층의 언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지요. 

퍼 : 가진 사람은 지금이 편안하죠.

임 : 그렇죠. 이를테면 이번에 손학규가 분당 선거에서 ‘평화냐 전쟁이냐’는 슬로건을 내걸었거든요? 그게 아주 분당에 적절했죠. 가진 사람은, 전쟁을 원하지 않아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죠. 비극이에요. 그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을 수밖에 없는 게 전쟁인데 말이죠. 저도 수감되어 있으면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전쟁을 원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경험이 있어요. 

퍼 : 한번 싹 바뀌는 게 낫겠다는 마음인 건가요?

임 : 수감시절, 남북관계가 안 좋아졌을 때가 있는데, 다들 신문 보면서 ‘전쟁이나 확 나라’고,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퍼 : 아. 

임 : 일본의 최근 청년실업자들이 우파가 되는 이유도, 지금의 계급 사회에서 자기가 좋은 자리로 갈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런 거거든요. 급격한 사회변동이 필요한 거죠. 나치가 600만 명 유대인을 죽였는데, 딱 그때 독일 실업자가 500만 명이에요. 실업자의 숫자와 학살당한 유태인의 숫자가 비슷하다는 게 의미심장하죠. 그렇게 경제 불황이 극심해졌을 때 파시즘이 대두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고요.

퍼 : 영화 “더 리더”가 생각나네요. 문맹인 여성이 실직자가 되었을 때 유태인 수용소에 취직해서 학살 임무를 다 수행하다가 몇 십 년 후 전범 재판을 받죠. 

임 : 네, 맞아요.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국가와 거리를 두면서 지식인이 택할 수 있는 길이 제가 말하는 길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이게 지식인 담론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못 하겠어요.

퍼 :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네요. 

임 : 저는 병역거부자로서 평화를 연구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최근에는 글을 써서, 발표를 하고, 투고도 하는 일을 많이 했죠. 그렇게 하니 숨통이 좀 트였어요. 사람이 공부만 하다보면, 가끔은 이게 무슨 한량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이 책 읽는다고 세상이 뭐가 달라지나 싶고. 

퍼 : 외부로의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임 : 저는 바깥에 얼굴을 보일 일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는 편이에요. 병역거부를 했던 다른 분들은 인터뷰하자고 하면, 거의 다 싫다고 하세요. 같은 얘기 반복하는 것이 힘든 일이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다 꺼내 보이고 평가받는 것이 어찌 보면 비루한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개인의 모든 정체성이 병역거부로 환원되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인지 병역거부자 중에 병역거부 운동 계속 하는 사람도 많지 않네요.

퍼 : 또 자신이 병역거부자로서 지키는 것이 있다면? 

임 : 저에게 일종의 준거점인 것 같아요. 어쨌든 저는 지금 명문대 대학원에 다니는, 제도권에 있어요. 대학원에 다닌다는 게 다른 사회 진출과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현실과의 타협을 고민하게 되는 일이 생겨요. 그때마다 병역거부를 했다는 것이,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거죠.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이런 고민을 하나, 옳은 것을 하자. 병역거부까지 했는데.’ 라고요. 

퍼 : 스스로를 ‘평화 연구자’라고 소개하시던데요. 명함에도 그렇게 써 있고요.

임 : ‘평화 연구자’라는 말이, 욕심나는 직함이에요.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사실 한국에선 ‘평화’라는 말이 최근에야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어요. 이승만 시절에는 ‘평화통일’을 주장한 조봉암이 사형도 당했지요. 운동권들은 또 운동권들대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타협하는 거라 생각했고. 평화운동도 그래서 1990년대 후반에서야 한국 사회에서 등장할 수 있었지요. 그래도 최근에는 평화 관련 담론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퍼 : 네.

임 : 여전히 사회적으로 주된 평화의 이미지는 ‘노사 평화’의 평화, 불법 폭력 집회에 반대되는 ‘평화 집회’ 같은 것이에요. 그런데, 영국의 브래드포드 대학이라고 퀘이커가 만든, 평화학으로 유명한 대학이 있어요. 거기에 1975년 아담 컬(Adam Curle)이란 교수가 취임하면서 남긴 말이 있어요. “내가 하는 평화라는 말은, 현존하는 불평등이나 착취에 대해서 눈감는 평화가 아니다.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거나 유지하려는 평화가 아니다.”

퍼 : 평화는 질서가 아니다.

임 : 그래서 당신 평화 연구가 구체적으로 뭐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징병제, 병역거부, 미군기지, 평택 투쟁’ 이런 거 연구한다고 대답해요. 그러면 ‘이건 아닌데’하는 표정들을 지으세요. 한나라당도 평화를 이야기하죠. 이렇게 ‘평화’라는 말이 오염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편성 때문에 내가 갖고 싶은, 이쪽으로 끌어오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퍼 : 여기 명함 뒷면에 쓴 말(“그것은 일어났고, 그렇기에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다”)은 뭐예요? 

임 : 프리모 레비라고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한 말이에요. 그가 쓴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라는 책에 있는 문구인데요, 전 레비의 책 중에서 이 책을 가장 좋아하는데, 여기에는 폭력의 맨 얼굴을 담담하게 담은 그의 고민이 가장 잘 들어있거든요. 여기서 ‘익사한 자’는 유태인 수용소 안에서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다 죽은 유태인들이고 ‘구조된 자’는 살기 위해서 수용소 안에서 나치에게 협력했던 유태인을 상징해요.

* 프리모 레비(1919-1987) : 유대계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후 아우슈비츠의 경험과 기억을 저서로 남겼다. 1987년 자택에서 자살하였다. 대표작으로 <주기율표>, <이것이 인간인가> 등이 있다. 

* 프리모 레비,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보러 가기
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67972186X 

퍼 : 나치에게 협력했던 유태인이요?

임 : 레비는 나치를 악마로, 유대인을 피해자로서 보는 도식적 구도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그가 처음에 책을 낼 때 반응이 좋지 않았죠.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었던 폭력에게 “괴물이다!” 하고 외친 후 얼굴을 돌린 게 아니라 계속 응시를 한 거예요. 그리고 말하는 거예요. “절대로 나치만 가지고 수용소가 유지되었던 것이 아니다. 여기, 협력한 유태인들 - 그 안에서 기꺼이 부품이 되어서 다른 유태인들 죽이는 데 협력한  - 이 있었다, 그게 홀로코스트다.”

퍼 : 으스스한 진실이군요.

임 : 저는 폭력을 연구하면서, ‘폭력이니 나쁘다, 없애자’가 아니라 실제로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고 싶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접근해서 실제 폭력을 지양해 나갈 수 있다고 믿고요. 이런 방식이 보기에 따라서는 불편하죠. 나쁜 걸 무조건 없애자고 하지 않으니까요. 레비가 저에게 이런 통찰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해요. 레비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이자 증언자죠.

퍼 : 평화를 연구하기 위해 폭력을 응시하는 일이 필요하군요.

임 :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나치 시대의 예외적인 이야기라고, 더 이상 이런 시대는 오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죠. 레비는 그걸 인지했던 거죠. 우리가 국가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도, 베트남이나 이라크를 언급하면서 무심코, 그건 예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그렇지 않거든요. 언제든지 또 다시 그런 방향으로 탈주할 수 있고, 그걸 막는 힘은, 이런 인식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끊임없는 응시의 과정에 평화로 가는 길이 있을 것 같아요. 

퍼 : 그 길을 가시는 모습,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5월 15일은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이다. 올해 5월 15일은, 병역거부자들의 활동 모임인 ‘전쟁 없는 세상’이 우리나라에 생겨난 지 8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생소했던 이름이 알려진 지 이제 햇수로 10년 째, 아주 조금이지만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2004년에는 병역거부자에 대한 최초의 무죄 판결이 있었고, 2007년에는 드디어 국방부에서 ‘종교적인 사유 등으로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군대 대신 다른 방법으로 병역을 이행할 수 있도록 대체복무를 허용키로 했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 발표는 결국 백지화되었지만, 대체복무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널리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인 ‘병역거부’가 사회 운동으로 조금씩 정착이 되어 가고 그 목소리의 풍부함을 더 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길을 선택하고 온갖 장애물을 헤치며 걸어온 병역거부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임재성 씨와의 인터뷰를 하는 내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세상 이곳저곳에서의 의미 없는 총격들과 죽음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라고 노래한 권정생 시인이 자꾸만 떠올랐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AND



사진과 함께 보기 좋게 편집된 버전은 여기로 고고 http://www.personweb.com/main/interview/250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 - 추혜인 


의료 생활협동조합은 지역 주민들이 출자하여 조합을 만들고, 운영하는 대안적 의료 서비스이다. 주민들이 의료 기관의 운영 주체이므로 민주적 운영이 가능하고, 수익의 용도도 주민들이 직접 결정한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들을 위한 의료 생활협동조합을 꿈꾸는 ‘여성주의 의료 생활협동조합(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의사 추혜인 씨를 만났다.


두리번 / @redpebl


‘혼자서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 씩씩하게 생각하다가도, 그 마음이 흔들리고 문득 겁이 날 때는, 몸이 아플 때다. “늙어 혼자 지내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자식도 없이 서러워서 어쩌려고 그래?”하는 부모님의 걱정에 코웃음 치다가도, 가끔은 그 말이 뇌리에 깊이 박히기도 한다. 

비혼(非婚) 상태의 여성들은 ‘노후 대비를 철저히 해 놓았느냐?’는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밥벌이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무엇보다도 독거 생활 중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질병’은 실로 두렵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그럼에도 병원과 의사, 나아가 현대 의학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현대 의료 행위는 ‘표준’에 의거하고 있다. 표준 체중, 표준 키, 표준 체지방, 표준 혈압, 표준 사이즈. 표준의 홍수 속에서 그것을 넘어서거나 혹은 미치지 못 하는 우리들은 늘 전전긍긍한다. 언젠가 읽었던 현대 의학에 관한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 의학이 표준으로 삼았던 기준은 대부분 서양의 성인 남성들이라고, 그렇기에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미달한 존재로 다루어지거나 대상화되거나 심지어 무시되었다는 사실. 

의사 추혜인 씨가 여성들을 위한 의료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가웠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의료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필수 영역이라면 우리가 직접 뛰어 들어 그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의료 생협은 의료 서비스의 세계에서, 아니 적어도 나의 몸에 관한 한 내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주지 않을까? 기대감을 품고 추혜인 씨를 만났다. 


병원의 주인은 주민이다.

퍼슨웹(이하 ‘퍼’) : 요즘 여성주의 의료 생협(준)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추혜인(이하 ‘추’) : 축제와 같이 특별한 지역 행사가 있을 때, 거리에서 하는 건강 검진을 한번씩 하고 있어요. 

퍼 : 여성주의 의료 생협(준)의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femihealth)에 들어가 구경해보니, 아기자기한 소모임 활동들도 활발하던데요. 

추 : 네. 여러 가지 소모임들도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산행, 걷기 같은 취미 모임도 있고, 텃밭 가꾸기, 밑반찬 만들기 모임도 있고요. 밑반찬 만들기 모임, 참 재미있어요. 혼자 사는 사람들은 반찬 만들어 먹기가 애매하잖아요. 아마 지금도 모여서 반찬 만드는 모임 하고 있을 걸요? 

퍼 : 그렇군요, 아직은 준비 단계로 알고 있는데, 정식 조합이 되기 위한 절차는요? 

추 : 의료 생협은 조합원들이 직접 출자하여 의료 기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그 수익을 조합원들의 뜻에 따라 쓰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협동조합을 설립하려면 법적으로 300명의 설립 동의인과 3000만원의 출자금이 있어야 하고요, 지금 저희 의료 생협(준)의 조합원은 백 명 정도. 그 중 의사들은 7-8분이 계시고, 의대생들도 있고요.

퍼 : 한창 준비 단계군요. 

추 : 그렇죠, 조합이 병원을 세울 수 있는 규모가 되려면 조합원이 천 세대는 필요해요. 그래야 일정 규모의 운영이 가능해요. 

퍼 : 소위 ‘가짜’ 의료 생협도 많다고 하던데요?

추 : 네, 놀라지 마세요, 지금 사실은 한국에 의료 생협 백여 개가 있어요. 그런데 이 중 상당수는 ‘가짜’죠. 현행 의료법 상, 의사가 아니면 의원을 개원할 수 없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의사는 아니지만 병원을 만들어서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이 병원을 세우는 법이 바로 의료 생협을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병원을 세운 다음 의사를 고용하고 병원에서 나는 수익으로 돈을 버는 거죠. 

퍼 : 생협이라는 제도를 악용하는 거네요.

추 : 네, 그런 가짜 생협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브로커도 있어요. 법에서 지정한 서류들을 대신 준비해 주고, 설립 동의인도 가짜로 모집해 주고, 의사도 데려다 주는 거예요. 

퍼 : 그럼 진짜 생활협동조합다운 의료 생협은 얼마나 있나요? 

추 : 지금 열세 개가 이미 세워져 있고,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두 개 있어요. 서울엔 영등포와 노원에 있고, 마포구와 은평구*에서 준비 중이에요. 나머지는 안성, 안산, 인천, 수원, 용인, 시흥, 성남, 전주, 청주, 대전에 있고요. 

* 여성주의 의료 생협(준) 한겨레 기사 보러 가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370681.html

퍼 : 주로 수도권이네요.

추 : 네, 많이 부족해요. 더 많이 생겨야지요. 

퍼 : 은평구에서 의료 생협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추 : 병원은 집에서 가까워야 하잖아요. 지역의 기반이 필요하겠더군요. 그래서 조사를 해 보니, 은평구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균형 잡힌 인구 분포를 보이는데, 서울시에서 사망률이 굉장히 높은 편이에요.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의 비율도 높고, 암 사망률도 높고요. 

퍼 : 기존 의료 서비스의 빈틈이 있는 거군요. 

추 : 네. 주민들의 의료 욕구에 대해서 충족되는 부분이 많지 않은, 의료 생협이 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큰 지역이었어요. 이미 설립되어 있는 은평 두레 생협에서 의료 생협을 검토하고 있던 참이라 그분들과도 마침 뜻이 맞았죠. 

퍼 : 다른 지역 의료 생협과 준비하고 계신 여성주의 의료 생협은 뭐가 다를까요?

추 :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여성주의적 의료 운동은, 의료인의 절대 권력을 부정하고, 의료 지식인에 독점된 의료 서비스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서 출발하거든요. 

퍼 : 의료 서비스에서 정말 필요한 측면입니다. 

추 : 그렇죠. 의료 생협 운동도 민중에 의해서, 그리고 민중을 위해서 의료 지식을 사용하자는 것이죠. 목표가 같아요. 우리가 여성주의 의료의 실천 양태들로 고민하던 걸 이미 여러 지역 의료 생협에서 많이 구현하고 있더군요. 다른 지역 의료 생협도 거의 여성분들이 중심이 되어 있어요. 이게 전반적인 흐름이죠. 

퍼 : 그렇군요. 

추 : 다만, 우리는 의원이 수익을 냈을 때 수익을 좀 다른 것에 쓸 수는 있을 거예요. 

퍼 : 이를테면?

추 : 지역에 여성 건강 연구소를 만든다든가, 지역 여성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기획할 수 있겠죠. 



일본 미나미 의료 생협

퍼 : 일본에서는 의료 생협 운동이 활발하다면서요? 

추 : 예. 작년 10월에 일본의 의료 생협을 보러 갈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많은 걸 느꼈어요. 

퍼 : 어떠셨어요?

추 : 한국 의료 생협 연대(http://www.medcoop.or.kr/ )라고 의료 생협을 지원하는 단체가 있어요. 여기서 일본 연수단을 파견해서, 일본에서도 의료 생협 운동의 교과서라 불리는, 나고야 시에 있는 미나미 구의 의료 생협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어요. 

퍼 : 그곳에서는 주민들이 실제로 많은 혜택을 받나요?

추 : 네. 미나미 의료 생협은 규모가 큰 생협이죠. 미나미 구에서 가장 큰 병원을 의료 생협이 운영하고 있어요. 조합원이 6만 3천 세대나 되죠. 여기 소속돼서 일하는 의사만 70명이고, 직원은 천 명 가까이 돼요. 

퍼 : 다른 병원과 비교했을 때, 그 병원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추 : 조합원이 병원의 주인이라는 점이 좋죠. 병원을 주민들이 운영하고, 주민들에게 그 수익이 돌아간다는 점. 그 병원이 만들어진 과정도 참 감동적이에요. 

퍼 : 어떤 과정이기에?

추 : 5년 전에 원래 있던 낡은 병원을 고쳐 새로 짓자고 결정을 한 후에, 주민들이 병원 건설에 관련된 모든 것을 의논하는 기구, ‘천인회(千人會)’를 만들었대요. 

퍼 : 천 명이 모이는 건가요?

추 : 모든 사람이 모여 모든 것을 의논하자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그런 이름을 붙인 거래요, 그런데 회의를 하면 보통 백 명 이상은 모였다고 해요. 

퍼 : 대단한 관심입니다. 

추 : 그렇죠. 병원이 세워지기까지 마흔다섯 번의 회의를 했대요. 병원의 디자인부터, 병원에서 일할 사람, 병원의 위치, 병원을 건설할 돈 마련의 방법까지 모두. 그래서 그런지 이 병원이 가서 보면 디자인 하나하나부터 주민을 위한 병원이라는 게 흘러나오더군요.

퍼 : 어떤 점이 그랬나요? 

추 : 이 병원은 마을과 지하철 역 사이에 세워져 있어요. 마을에 가깝게 하기 위해서죠. 보통 병원 부지가 크면 사람들이 오고 갈 때 병원을 돌아서 지하철역으로 가야 하는데, 이 병원은 부지의 앞뒤를 뻥 뚫어 놓고 병원을 가로질러 갈 수 있게 부지 안쪽에 마을길을 내 놓았더군요. 그러니 병원에 오고 가는 게 편안한 거죠. 이게 다 조합원들 아이디어래요. 

퍼 : 와, 대단. 병원을 가로질러 간다!

추 : 이 병원은 아프지 않아도 누구나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에요. 병원 안에 마을 도서관, 사랑방, 보육원, 뿐만 아니라 직원들을 위한 탁아시설이 있어요. 간호사들이 맡길 수 있는 야간 탁아도 되고요. 병원 안 큰 헬스센터는 누구나 등록할 수 있고, 운동 처방사가 환자 운동 처방도 해 주죠. 

퍼 : 부럽네요.

추 : 병원 안에 있는 보육원에서, 아픈 아이들에 대한 특별한 보살핌이 가능해요. 아이가 조금 아프면 이곳에 맡기고 출근을 할 수 있는 거죠. 간호사들이 보다가 아이 상태가 나빠지면 의사들 진료를 받도록 연결해 준대요.

추 :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부인과가 조산소를 함께 운영한다는 점이었어요. 

퍼 : 왜죠?

추 : 조합원들이 요구한 거라고 해요. ‘아기를 낳는 과정은 질병이 아니다.’, ‘조산원의 도움만으로 아기를 낳고 싶다,’고 요구해서 조산소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퍼 : ‘질병이 아니다.’ 그렇죠.

추 : 미나미 의료 생협의 경우 운영 주체들 중에 여성들이 많아요. 70대 할머니도 계신데 이분은 “일본 평화헌법을 사수하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세요. 매일 그 티셔츠를, 색깔과 두께, 길이만 달리하며 입으세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면서 취미로 미나미 구 근처에 있는 갯벌에 새를 보러 나가시는데, 그러려면 갯벌이 살아 있어야 하니까, 갯벌 살리기 운동도 하세요.

퍼 : 정말 멋진 분이네요.

추 : 맞아요. 그런 분들이 의료 생협에 계세요. 일본 의료 생협에는 상무이사라는 제도가 있는데, 월급은 받지 않으면서 똑같이 출퇴근을 하는 거래요. 이 제도 덕분에 주변의 주부나 퇴직한 분들이 상무이사를 하러 오셔서 지역 공동체에 정말 필요한 일들을 모색해 생협에서 일구어 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할머니와 같은 분들이 동네를 위해서 일을 하실 수 있는 거고, 실제로 동네가 정말 좋아지더군요. 



의사를 신뢰하지 않는 사회

퍼 : 지금 서울대 병원에서 전공의(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계시죠? 병원에서 근무하시면서, ‘이래서 의료 생협 꼭 필요해.’라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추 : 많죠. 이를테면, 저는 입원하는 환자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만약 저분이 지역 사회에서 의료 생협을 만났다면, 가까운 곳에서 통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충분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아 답답하지요. 

퍼 : 의료 생협이 일종의 주치의 역할을 하는 거죠.

추 : 네. 의료 생협이 생기면, 가까운 곳에 내 주치의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의료 생협은 주치의를 추구하거든요. 내 주치의가 가까운 곳에 있다면 좋을 것 같지 않나요? 

퍼 : 제가 원하는 바죠.(웃음)

추 : 지금 제가 서울대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있으니 제가 하는 진료 행위에 대해서 사람들이 특별히 의심하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 서울대 병원을 벗어난 다른 곳이라면, 아마 ‘저 의사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진료를 보고 있다’는 의심을 많이 하실 거예요. 

퍼 :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가 많이 깨어진 상태라는 말씀이시죠?

추 : 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의사를 신뢰하지 않잖아요.

퍼 : 그렇게 보면 의료 생협이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더 좋은 제도일 수 있겠네요. 

추 : 그럴 겁니다. 

퍼 :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준비하고 계시죠? 가정의학과는 어떤 곳인가요?

추 : 가정의학과 레지던트는, 모든 과의 실습을 다 거쳐요. 지역 사회 커뮤니티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흔하게 걸릴 수 있는 병들에 대해 배우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가정의학과 의사는 전문의이면서도 전문적인 분야가 있는 건 아니죠. 

퍼 : 서울대 병원은 3차 진료기관인데, 굳이 이곳 가정의학과로 오는 사람들은 어떤 분들이에요?

추 : 다양하죠. 어떤 분들은, 몸이 정말로 불편한데, 다른 곳을 아무리 돌아도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해서 돌고 돌다가 가정의학과로 오세요. 또 어떤 분들은 단순히 서울대 병원 가까이에 사시니까 오시기도 하고요. 

퍼 : 진료비가 비쌀 텐데요.

추 : 네, 그런데 여기에 오면 상담을 충분히 받을 수 있거든요. 오늘도, 네 시간 반 동안 열두 분을 만났어요. 다른 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퍼 : 가정의학과라서 가능한 건가요?

추 : 그렇죠. 저희는 다른 과와 달리 저희를 찾아오는 분의 건강 상태 전반을 체크하고 나이와 성별에 맞는 건강검진을 제때 받고 있나 챙겨요. 가령 55세 여성이 유방 촬영을 한 번도 안 했다면 받도록 하죠. 다른 과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죠. 

퍼 :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검사들이 병원의 수익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문을 갖고 있기도 하죠.

추 : 음……, 병원에서 건강검진센터가 수익모델로서 기능하고 있는 건 사실이죠. 이를테면 서울대 병원은 최근 건강검진센터를 강남에 새로 열었어요. 잠실의 아산 병원, 일원의 삼성 의료원을 의식한 결정이죠. 서울대 병원 본원이 있는 혜화동이 지리적으로 강남과 떨어져 있으니, 건강검진센터를 강남에 열어서 그곳의 환자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성모 병원이, 다른 곳에서 나는 모든 수익을 다 강남성모병원에 투자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퍼 : 그랬군요.

추 : 병원 운영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런 걸 고려하죠. 그런데 아직은 외래에서 환자를 만나는 전공의들에게까지 그런 수익을 내기를 요구하지는 않아요. 단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꼼꼼히 진료하는 법을 잘 배우기를 원하죠. 우리는 단지 예방의학의 관점에서 챙기도록 정해져 있는 검사들을 때에 맞게 하도록 챙겨주는 거예요.

퍼 : 의대를 졸업한 분들이, 성별 때문에 원하는 전공을 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추 : 최소한 내과 계열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내과 계열에서는 여자 선생님들이 좀 더 꼼꼼히 환자를 본다고 평가받고 있고, 실제로 좀 더 실력 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래서 환자분들도, 선생님들도, 여자 레지던트를 뽑는 것에 대해서는 별 차별이 없어요. 그런데 여자 의사가 이 병원에서 교수가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서울대 병원에는 아직도 산부인과에 여자 의사가 없는 걸요. 

퍼 : 환자들이 선생님을 대하는 건 어떤가요?

추 : 서울대 병원 같은 경우는 여자 의사가 워낙 많아져서, 이젠 여자 의사라고 이상하게 보는 눈은 없어요. 만약 여기가 작은 시골 병원이라면 여자 의사를 보며 이상하다 여길 수도 있겠죠. 큰 대학 병원의 고도화된 시스템 속에서는, 의사의 성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군요.

퍼 : 큰 병원에서는 의사 선생님들 개개인이 잘 드러나지 않나 봐요.

추 : 네, 맞아요. 그런데 응급실에서 이런 적은 있었어요. 응급실에서는 보통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수술복을 입고 일해요. 그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저를 의사인 줄 잘 알아보지 못 해요. 그래서 저를 종종 ‘아가씨, 언니’ 이렇게 부르세요. 같은 상황에서도 남자 의사들에게는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시곤 해요. 저를 앞에 두고 ‘의사 와보라’고 하는 상황도 있었어요. 

퍼 : 간호사와의 관계는 어때요? 

추 : 제가 의대생일 때는, 여자 선배들 중에 간호사와의 관계로 고민하는 언니들이 많았어요. 간호사들도 우리 사회에서 자라난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 의사의 지시는 당연한 권력 관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여자 의사의 지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던 때도 있었던 거죠. 그런 입장에 처한 여자 의사들은 ‘여자라서 무시당했다’는 생각에서 감정이 악화되고, 소통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퍼 : 요즘은요? 

추 : 지금은 많이 달라졌더군요. 여자 의사가 점점 많아져서 서로 훈련이 많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최근의 젊은 의사 세대들은 간호사와 관계를 단지 하는 일의 성격과 그 역할이 다른 것이라고 받아들여요. 지시와 복종의 관계라기보다는 협동하는 관계, 일의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요즘도 간호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의사들도 많죠. 제가 좀, 특별히 관계가 좋은 편이에요, 하하. 



여성주의 의료로 가는 길

퍼 : 공대생이었다가 여성들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재수를 해서 다시 의대에 입학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때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추 : 시민 단체로 자원 활동을 가는 계기가 있었어요. 한 학생운동 그룹에서 2학년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 각 단체 자원 활동을 연결했거든요. 평소 여성 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한국 성폭력 상담소로 자원 활동을 갔죠. 

퍼 : 가보니 어땠나요?

추 : 96년도에 성폭력 방지를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난 직후라서 일은 마구 쏟아지는데 전국에 성폭력을 다루는 전문기관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전국에 성폭력 상담소라고는 달랑 하나였으니까요. 그때 상담소에 계신 분이 성폭력 사건 해결에서는 의료 지원이 절실한데, 너무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그 역할을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었죠.

퍼 : 의료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셨을까요?

추 : 그때만 해도 자세히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를테면 이런 일들이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응급실에서 강간 피해자를 환자로 받았었는데, 그 환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적이 있거든요. 환자가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이 가해자의 폭행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또 의학적으로 봤을 때, 몸에 나 있는 상처들이 어떻게 강간이라는 폭력을 시사하는지에 대해 말할 의사가 필요한 거죠.  

퍼 : 그런 역할을, 의사들이 종종 하고 있나요?

추 : 잘 안 하지요. 그리고 재판정까지 가기가 굉장히 애매해요.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구요.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는 것 외에도, 의사가 필요한 일은 많아요. 성폭력과 같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릴 수 있죠. 

퍼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요?

추 : 네. 교통사고나 지진과 같은 큰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 경우에, 급성 스트레스 반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랜 기간을 괴로워할 수 있어요. 잠도 못 자고,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고요. 그럴 때 정신과 의사들이 즉각적으로 개입을 해 주면, 큰 도움이 되죠. 

퍼 : 그렇군요. 

추 : 최근에는 ‘원스톱 센터’라고 부르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응급실이 따로 생겨서 제도적으로 보완이 되고는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해요. 꼭 의사뿐만 아니라, 그런 피해를 받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람을 얼마나 따뜻하고 친절하게 배려하느냐가 훗날에 남을 상처를 크게 줄여줄 수 있어요. 반대로 그렇지 못한 경우에 그 상처가 평생을 갈 수도 있구요. 

퍼 : 의대 진학 이후 생활은 어떠셨나요?

추 : 당시 학생회장을 하던 선배가 학생회 여성위원회에서 뜻을 펼쳐보라고 제안하는 바람에 입학하자마자 그 일을 맡았죠. 그해 마침, 조교에 대한 성폭력 가해자로 악명 높은 화학과 신정휴 교수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이 났어요. 성폭력 피해자가 신 교수에게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어요. 그 판결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느라 무척 바빴죠. 

퍼 : 의료 생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인가요?

추 : 최근에 일기를 뒤져보니, 2004년 8월 14일부터였더군요.

퍼 : 그때는 아직 의대생이었을 텐데,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추 : 여성주의를 실현하는 병원, 여성들의 권익을 실질적으로 신장시킬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쭉 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그것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계획도 감도 없었죠. 의사로서 환자를 만나는 일도 하고 싶지만,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의사도 함께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방법도 몰랐고요. 

퍼 : 네. 

추 : 그 즈음 건강세상 네트워크에서 일하고 계셨던 김창보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이 제 진로 계획에 대해 물으시길래, 여성주의적인 병원을 만들려고 한다고 했더니, 여성들의 의료 생협은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그때 ‘의료 생협’이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어요. 

퍼 : 그때 처음 들으셨던 거군요.

추 : 예. 의료 생협은 조합원들이 직접 출자를 해서 운영하는 병원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모든 고민이 시원하게 해결된 기분이었어요. 여성주의적인 병원을 꼭 나 혼자서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여성주의자들의 그룹만 있다면, 그 사람들과 함께 사람과 자금을 모으고, 나는 거기 취직하면 되는 거였어요. 

퍼 : 기쁘셨겠어요.

추 : 그럼요. 내가 혹 병원을 경영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병원이 여성주의적 의료를 실천하는 병원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거든요. 여성들이 출자해서, 여성들에 의해서, 여성들을 위해서 직접 경영하는 병원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그 형태가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퍼 : 그때부터 의료 생협을 함께 할 친구들을 모으셨나요? 

추 : 예, 알음알음으로 알고 지내던 여성주의 의료인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서 생협을 준비하자는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 모임에서는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시는 ‘언니들’을 진료하는 일도 했었죠. 

퍼 :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추 : 막달레나 공동체라는 성매매 여성 지원 단체에서 이분들에 대한 의료 지원 프로젝트를 국가에 신청해서 국비를 지원받아 운영한 사업이었고 우리는 자원봉사를 했죠. 간이 진료소에서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살피고, 병이 발견되면 정식 진료를 받는 의료 기관으로 연결해주는 시스템이었어요. ‘언니들’이 의료 기관에서 진료 받는 비용은 국비로 지원이 되었고요. 굉장했어요. 

퍼 : 생협 준비는 잘 되었나요?

추 : 아니오. 조금 지지부진하다 2006년 언니 네트워크에서 비혼(非婚) 여성주의자 그룹*을 만나면서 힘을 받았죠. 비혼 여성들이 흔히 듣는 말이 ‘늙어서 아프면 누가 챙겨주나?’는 말이잖아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면서 살아가야 하죠. 그래서 그분들은 의료 생협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크시더군요. 

* “비혼이 행복해야 사회가 행복하다” 기사 보러 가기
http://www.hani.co.kr/section-021003000/2008/03/021003000200803130701004.html

퍼 : 그 그룹에서 만난 친구 분이 지금 의료 생협을 준비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추 : 네, ‘어라’라는 친구죠. 지금 이 친구가 상근을 해요. 본래, 비혼 여성들을 위한 마이크로 크레딧을 세우고 싶어 했었던 친구였어요. 이 친구가 금융에 밝거든요. (웃음) 실제로 다른 지역 의료 생협에서 일도 많이 하셨어요. 모금 전문가로 유명하답니다. 


감옥에서 배운 것들

퍼 : 대학 시절엔 학생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신 적도 있다고 들었어요. 

추 : 아, 그랬죠. 하하하. 잊고 있었는데, 기억이 나네요. 

퍼 : 어떻게 된 거예요?

추 : 99년 초에, 서울 지하철 노조에서 파업 투쟁을 벌였어요. 그때 지하철 노동자 분들이 서울대 노천극장에서 기거하셨고, 학생들은 파업 투쟁을 지키기 위해서 교문을 열심히 지켰죠. 제가 학생회 일을 하다 보니, 투쟁에 쓸 화염병 1000개와 쇠파이프 300개를 운반하는 트럭을 학교 안으로 들여오는 역할을 책임지고 맡게 됐어요. 그러다가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해서, 그 트럭에 탔던 저와 제 친구가 잡혀갔죠. 

퍼 : 무서웠겠어요.

추 : 네, 무서웠어요. 그런데 안 무서운 척 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그때의 경험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 되었던 것 같네요. 

퍼 : 어떤 점에서요? 

추 : 구치소에서 지내면서, 제가 그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삶을 살아온,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성들을 만났던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지식인이 아닌 여성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당시에 ‘외국인’ 방에 수감되었었는데, 한 방을 쓰시던 조선족 아주머니들, 필리핀 아주머니들과 만난 경험에서 많이 배웠죠. 

퍼 : 좀 더 이야기해 주세요.

추 : 당시에 제가 있던 층에 ‘공안’으로 분류된 수감자가 저까지 셋이 있었어요. 그 중 한 분은 황선 씨라고, 북한에 다녀오셨던 분이었고요. 또 다른 한 분은 당시 한총련 조직 관계로 들어온 분이었어요.

퍼 : 다 함께 같은 방에 있었나요?

추 : 아뇨, 공안수들은 떨어뜨려 놓게 되어 있어요. 서로 가장 멀리 있도록 끝과 끝에 배치하죠. 마침 제가 4월 말에 잡혀갔는데, 5월 1일이 메이데이잖아요. 노동절이라고 감옥 안에서도 집회를 하더라구요. 

퍼 : 셋이서 집회를요? 

추 : 네, 저는 처음이라 잘 모르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황선 씨가 시작을 하더군요. 

퍼 :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았나요? 

추 : 솔직히 말하자면, 모른 척하고 싶었어요. 이 일 때문에 제 재판이 불리하게 돌아갈까봐 걱정도 됐고요. 

퍼 : 그러셨겠죠. 

추 : 그런데, 황선 씨가 저를 호명하는 거예요. 공안수가 들어오면 방 배치를 바꾸기 때문에, 공안수가 들어온 걸 다 알게 되어 있어요. 이미 계획하고 있었는지, ‘며칠 전에 들어오신 몇 번 누구누구’라고 번호와 이름까지 부르면서 저더러 먼저 정치 발언을 하라고 황선 씨가 제안하는데, 저도 제 자존심이 있지,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었어요. 

퍼 :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추 : 발언을 했지요. 준비도 없었던 상태라, 당시에 제 일과 관련되어 있었던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어요. 그 이야기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아무 감흥도 주지 못 했어요. 그런데 다른 한 분의 발언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퍼 : 어떤 내용이었나요?

추 : 그분은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갇혀 계신 여러분들도 다 들으라고,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사기나 절도 등으로 잡혀 오신 분이 많으실 터인데, 많이 잡아 봤자 그 금액이 1억 정도 아니냐. 그런데 몇 천 억씩 떼어먹고, 더 엄청난 비리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이런 사람들도 있다고요. 이런 비리를 척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요. 

퍼 : 그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추 : 네. 수감된 다른 분들도 모두 술렁이며 박수를 치더군요. 저와 함께 있던 조선족 아주머니들도 세상에 그렇게 돈을 많이 떼먹었다니, 정말 나쁜 놈들이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그때 느꼈죠. 아,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는 건, 이렇게 하는 거구나. 

퍼 : 그랬군요. 

추 : 네, 발언이 각자 다 끝나자 다른 두 분은 ‘한총련 진군가’를 약속한 듯 부르더니 집회를 끝냈어요. 저는 당시에 한총련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싫고 당황스러웠죠. 그렇지만 같이 집회를 했는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다시 창살 앞으로 가 혼자서 ‘인터내셔널 가’를 불렀어요. 

퍼 : 혼자서요? 

추 : 네. 그런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같은 방에 계시던 중국에서 오신 아주머니들이 그 노래를 아시니까 중국어로 따라 부르셨던 거예요. 제창이 됐죠. 또, 인터내셔널 가는 워낙 노래가 아름다우니까, 노래를 듣고 나더니 다른 분들이 많이 박수도 쳐주셨어요.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들어와서 저는 아주머니들로부터 중국어로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는 법을 배웠지요. 

퍼 : 정겹네요. 

추 : 그렇지만 집회를 끝내고 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재판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까봐. 사실 검사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엔 ‘나는 그 트럭이 무슨 트럭인지 몰랐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거든요. 

퍼 : 그러셨군요. 

추 : 그런 상황에서 남들 앞에서 독한 운동권 학생인 걸 다 티를 냈으니, 겁이 덜컥 나더군요. 게다가 황선 씨는 이렇게 집회를 하니 참 좋다면서 또 하자고 하는 거예요. 저는 더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교도소장 면담을 신청했어요. 독방으로, 공안이 없는 층에 보내달라고요. 

퍼 : 독방은 힘들다던데요.

추 : 아녜요, 있을 만해요.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그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다가, 재판이 잘 해결돼서, 나왔지요. 

퍼 : 생각해보면, 참 어린 대학생들이었는데, 정말 큰일을 겪으신 것 같네요. 그 일로 자기 자신이 변화했다고 느낀 것이 있었나요?

추 : 같이 감방에 있던 언니들의 강인한 생존 방식. 그분들은 마치 로빈슨 크루소들 같아요. 그 안에서, 감방 살림에 필요하고 자기 몸을 단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제 손으로 다 만들어 내던 언니들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퍼 : 만약 제가 구속되고 구치소에 들어갔다면, 못 견뎠을 것 같아요. 

추 : 막상 경험하면 또, 좀 달라요. 이를테면, 까치방이라는 곳이 있어요.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면 까치방이라 불리는, 법원 안에 있는 구금시설에 사람을 가두어 두는데, 구치소에서는 수갑을 안 차지만, 그 방에서는 수갑을 차고 있어야 해요. 

퍼 : 그런 게 있군요. 

추 : 공안수는 거기서 하루 종일 수갑을 차고 있다가 수사를 받아야 해요. 공안수는 일부러 더 오래 두거든요. 그러면 정말 너무너무 짜증이 나고 힘들어요. 그런데, 그 벽에는 무수한 시간동안 수많은 양심수들이 써 놓은, “국가보안법 철폐”, “민중민주” 이런 구호들이 사방팔방에, 정말 온 벽 가득히, 써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국가의 폭력에 대해 무서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분노하게 된답니다.  

퍼 : 그 이후에 부모님이 학생운동에서 손 떼라고 하지 않았나요? 

추 : 그랬죠. 저는 뗐다고 말했죠. 

퍼 : 하하하하. 

추 : 이젠 그렇게 안 살려고요. 실제로 무서운데, 안 무서운 척하면서 살지는 않으려고요. 무서운 거 그냥 티내면서 살려고요.



의료 생협이 주는 행복

퍼 : 지금 병원에서 생활하시는 것도 큰 불편은 없어 보이시는데, 굳이 협동조합의 의사가 되려고 마음먹으신 거잖아요? 이 선택에 대해서 걱정은 안 되세요?

추 : 병원 생활이 편안하기는 해요. 병원에서 시키는 일들도 다 할 만하고, 병원 사람들하고 있을 때 말도 더 잘 통하고요. 환자와 있었던 일, 보호자와 있었던 일, 모두 마음 편하게 털어 놓을 사람들도 많아요. 

퍼 : 아무래도 그러시겠지요.

추 : 만약 제가 병원 바깥의 여성주의자들, 보건 의료 운동하시는 분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왔다면 저도 그냥 평범한 의사로 안주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외부의 관계들을 계속 맺어왔기 때문에, 지금 제가 하는 선택이 전혀 불편하거나 걱정되거나 낯설지 않아요. 

퍼 : 동료들이 선생님의 선택을 잘 이해하나요? 

추 : 제 주변에 의사의 신분적 지위에 대한 생각보다는 사명감이 크신 분들이 많은 편이에요. 의료 생협하겠다는 이야기도 잘 받아들여지는 편이고요. 가정의학과에는 한 해에 한두 명씩은 의료 생협을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과의 특성인 것 같네요. 

퍼 : 의료 생협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추 :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시죠. 의사도 안 될까봐 걱정이 많으셨는데. 

퍼 : 즐거워 보이세요.

추 : 네, 즐거워요. 생각해 보면 대학 시절에는, 반(反)성폭력 운동을 주로 했어요. 그런데 그 일은 참 사람을 지치게 했던 것 같아요. 재미없었던 건 아니에요. 참 재미있었는데, 계속 뭔가에 반대하는 운동들 - 저 사람의 가부장성에 반대하고 온 세상의 가정폭력에 반대하고 내 안의 마초성에 반대하는 그 모든 일들이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퍼 : 그렇죠. 

추 : 요즘은 무언가에 대한 ‘안티’가 아닌 실제로 성과물을 만들어 나가는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이 느낌이 참 좋더군요. 왜 이 재미를 몰랐을까 싶네요.

퍼 : 네. 

추 :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어요. 반대만 하는 운동을 계속할 때에는, 사람들을 계속 감시하게 돼요. 나쁜 짓하는 사람 어디 없나, 하고요. 그런데 의료 생협하면서부터는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네요. 같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하니까, 좋은 점, 공통점이 먼저 보여요. 

퍼 : 내년 이맘때에 선생님은 어떤 모습이실까요?

추 : 2012년에는……, 전문의가 되어 있을 테니 의료 생협 의원에서 일을 하겠죠. 시간만 더 있으면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너무 많아요. 좀 더 훈련받고 싶거든요. 게다가 지역 사람들이랑 만나서 친목도 쌓아야 하고요, 가족력도 파악해야 하고요. 지역 사람들을 생각하다보면 또 의사로서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욕심이 나죠. 제가 부족하면 지역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 같아서요.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저는 너무너무 바빠요.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여성주의 의료 생협(준)의 상근자이자 모금 전문가로 유명한 ‘어라’님으로부터 조합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는 전화가 왔다. 나는 주저 없이 설립동의서를 팩스로 보내고 조합비를 입금하며 나의 주치의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여성주의 의료 생협의 시도를 보며, 삶의 장애물들을 부수기 힘들다면 장애물을 넘어갈 사다리를 함께 만들면 된다는 걸 배우게 된다. 작은 힘이지만 조금씩 모은다면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할 수 있다고 믿고 움직여 새로운 실험을 한 발짝씩 내딛고 있는 추혜인 씨를 보니 든든했다. 그리고 그 실험들 속에서 즐겁고 행복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함께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사이면서도 그들의 닫힌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를 시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재구성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준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경계를 확장하고, 외부와의 끈을 놓지 않는 일. 거기에 다른 삶의 힌트가 있는 것 아닐까.  

AND



사진과 함께 보기좋게 편집된 글을 볼 사람은 여기로 고고


인터뷰 전문 


유쾌한 씨의 섹슈얼리티 - 변혜정



변혜정 선생님을 소개하는 글에는 늘 ‘유쾌한’, ‘신나는’, ‘열정적인’, ‘일중독’과 같은 단어가 따라 다닌다. 오랜 기간 여성 섹슈얼리티 분야에서 활동해온 그녀는 서강대학교 성평등 상담실 상담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최근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 센터’를 만들어 이전과는 다른 섹슈얼리티 담론을 풀어내는 중이다. 지난 10월에는 그녀가 엮은 책,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가 발간되었다.


두리번 / @redpebl


나는 여자고등학교 교사다. 그리고 나는 여성주의자, 속칭 ‘꼴 페미’다. 그래서일까? 남자아이들 틈바구니에 있는 것보다 여자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더 의미 있고 즐겁다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종종 괴롭다. 여학교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치마 길이 단속, 예의범절 교육들이야 적당히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런데 ‘너희들도 남자아이들과 똑같은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어’라고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교육을 하기는커녕, 그 아이들이 성적 결정권를 행사하기라도 할까봐 벌벌 떠는 것이 현실이다.

변혜정 선생님은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낸, 두 아이를 둔 엄마다. 책 속에서 그녀는 고등학생 딸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갈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성폭력 문제 전문가인 변 선생님이 두 아이의 엄마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딸아이를 둔 엄마가 ‘10대의 섹스’ 운운하는 책을 내기까지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터뷰는 변혜정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인터뷰 시작 전 예의 빠른 말투로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 센터’ 업무를 마친 선생님은 “꼭 해야 할 통화가 있다”며 양해를 구하셨다. 그리고 외국에 있는 딸이 무언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인지 전화기를 붙들고 설득적인 어조로 한참을 옥신각신하셨다.


종갓집 며느리 페미니스트

퍼슨웹(이하 퍼) : 따님이 외국에 있나 봐요?

변혜정(이하 변) :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영국에서 학교를 다녀요. 제가 그걸 여기서 보살피느라 너무 바빠요.

퍼 : 혼자 가 있나요?

변: 네, 혼자. 원래는 가디언(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가디언을 쓰면 한 달에 백만 원은 들거든요. 학비도 비싸고.

퍼 : 가디언이 없으면 비자가 안 나올 텐데요?

변 : 그럼요. 유학생 애들은 가디언이 꼭 있어야 해요. 그런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이름만 올려놓고, 가디언 일들은 제가 다 하는 거죠.

퍼 : 선생님이 백만 원 어치의 일을 하고 계신 거네요.

변 : 그렇죠, 그런데 일이 정말 많아요. 제 일도 워낙 바쁘고, 그러다 보니까 시간을 놓치는 일이 많은데, 지금 꼭 해야 하거든요. 좀 있으면 거기 시간으로 애 잘 시간이고, 그래서 부득이 통화를 했어요.

퍼 : 먼 곳에서 선생님이 영국에 있는 딸을 돌보기가 쉽지 않으실 텐데요.

변 : 그럼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애 때문에 자기 일을 그만둔 친구도 있어요. 너무 바쁘기 때문에.

퍼 : 유학생 하나 돌보는 게 보통 일이 아니군요.

변 : 아이 공부 문제는요, 학력 자본이라는 게 한국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해결이 안 돼요. 소위 ‘스펙’이라 불리는 걸 쌓아주기 위해 엄마들이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퍼 : 선생님이 결혼해서 자녀까지 있다는 걸 이번 책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을 통해 처음 알았어요. 결혼한 분이라거나 아이가 있는 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 책 보러가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6342

변 : 결혼은 일찍 했어요. 석사과정 중. 제가 페미니스트라 하고 다니고,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살아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퍼 : 결혼할 때도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셨나요?

변 : 그렇죠. 그래서 파토도 냈죠. 남편이 종갓집 종손이에요. 청첩장까지 찍었던 상황이었지만, 이 사람이 집에만 갔다 오면 보수적으로 바뀌어서 안 되겠다 싶었어요.

퍼 : 청첩장까지 찍고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셨어요?

변 : 종갓집 종손이 청첩장 찍었는데 문제가 생기니 시어머니가 직접 연구실까지 찾아 오셨었어요. 그래서 내가 설명했죠. “나는 페미니스트고, 종갓집에서는 아들을 낳아야 되는데 아들 낳을 자신이 없다. 종갓집에서는 제사가 많을 텐데 나는 일이 많아서 제사를 모실 수 없다. 남편 될 사람이 이해하는 듯하다가도 집에만 갔다 오면 사람이 변해서 결혼 못 하겠다.” 그랬더니 우리 시어머님이 괜찮다고, 각서 쓰며 보장해 주셔서 결혼한 거예요.

퍼 : 시어머니가 대단하신 분이네요.

변 : 네, 저희 시어머니 대단하세요. 전남여고 나오셨고,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그렇지를 못해서 한이 되신 분이죠. 아마 사회가 이렇지만 않았으면 큰일을 하셨을 분이에요.

퍼 : 그런 분이 종갓집 며느리 노릇을 하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변 : 그렇죠. 결혼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일을 찾아서 사업하셨던 분이세요. 젊으셨을 때는 눈썹 휘날리게 다니셨대요. 그런데 그런 점을 시어머니의 시댁과 자식들은 좋아하지 않았던 거구요. 남편도 ‘왜 우리 엄마는 가정을 돌보지 않나’하고 불만이 많았었다더군요. 시어머니 삶 속 갈등을 제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설명해 드리면서 시어머니와 아주 친해졌죠.

퍼 : 독특한 고부관계예요.

변 : 그럼요. 세상에서는 시어머니 같은 여자를 나쁘다고 하잖아요. 남편도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저는 그랬죠. 당신 어머니 너무 훌륭하신 분이라고. 남편이 그런 주제로 여성 신문에도 글을 쓴 적도 있어요.

퍼 : 그런 과정을 통해 시어머니는 선생님과 돈독해지셨겠네요.

변 : 저희 시댁이 개인주택인데 2층에는 시할머니, 3층에는 시외할머니가 살고 계셨어요. 저희 시어머니는 외동딸이셔서 친정어머니가 큰 부담이셨나 봐요. 홀로되신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살게 되었는데, 일상에서는 매일 부딪힐 수밖에 없죠. 한번은 저희 시어머니가 당신 친정어머니 때문에 댁에서 싸우고 가출하신 적도 있는데, 이때 제가 흔쾌히 저희 집에 오시라 했어요. 남편은 중간에서 난처해하며 어머니를 시골에 다시 내려가시게 하려고 애쓰는데, 나는 시어머니께, “어머니 여기서 당당히 계셔라. 어머니는 당당하시다” 편들었죠. 이런 게 다 여성문제잖아요.

퍼 :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을 모시겠다고 오히려 고집을 부린 셈이네요.

변 : 여성 연대죠. 어머니의 힘든 상황들을 제가 제 언어로 풀어드리면서, “어머니는 훌륭하시다, 당당하게 사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어머니는 며느리가 하는 여성학을 인정하게 되신 거구요.


애 잘 낳는 엄마 페미니스트

퍼 : 결혼 전 출산 계획을 하셨던가요?

변 : 제가, 몰랐는데, 다산 체질이에요. 성관계만 하면 애가 생기는 체질. 애를 가질 계획이 없어서 피임약을 먹었었는데, 부작용이 생겨서 잠시 끊은 사이에 아이가 생긴 거예요. 그것도 대학원 레포트 때문에 바빠서 모르다가 7월 말에 생리가 없어서 병원을 갔더니 임신 4개월이라는 거예요. 병원에서는 몰랐냐고 황당해 하더군요. 그날 병원 가고 초음파 한번 안 찍어보고, 한 달에 한번 가는 정기검진도 바쁘다고 한 번도 안 가고, 애 둘을 진통도 없이 3분, 5분 만에 낳았어요.

퍼 : 진통도 없이 5분 만에 아기를 낳으셨다구요?

변 : 남편은 저더러 닭처럼 애를 낳는다고 해요.(웃음) 저 책도 냈었어요. <출산 십계명 - 아기를 5분 만에 낳는 방법>. 체질이기도 하지만, 활동적으로 사는 것도 빨리 낳는 비결일 거예요. 의사가 저더러 자궁문을 한 2센티는 열고 다니는 사람이라면서, 그러다가 길동이 낳는다고, 조심하라더군요. 저는 아이가 뱃속에 있으면 밥맛도 너무 좋고 인생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아기도 좋아하고요. 만약에 제가 바깥 일로 바쁘지 않았으면 아이를 계속 낳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퍼 : 그렇지만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변 : 못 하는 게 있긴 해요. 제가 비위가 약해요. 애가 토하면 저도 토해요. 다행히 남편이 잘해줘서, 어려움이 크지는 않았어요. 남편이 자유업종이라 시간이 조금 자유롭고, 돈을 여유 있게 벌어오니까, 사람을 썼죠. 낮 시간 동안은 그분이 돌봐주셨죠. 경제적으로 사람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아기이던 시절에는 괜찮았어요. 어려워진 건 애가 학교가 들어가서 엄마가 해줘야 할 일이 생길 때부터였죠. 숙제를 도와주고, 학교에 적응하게 돌봐줘야 하는데, 그건 다른 사람이 해줄 수가 없으니까요.

퍼 : 남편분과 역할 갈등은 없으셨나요?

변 : 물론 없을 수는 없죠. 그렇지만 저희 남편은 여성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에요. 드라마 보다가 울 정도로 감성적이고 착하고 부드러워요. 이런 것들이 애를 키우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내가 부탁을 하면 부탁은 다 들어줘요. 인간으로서, 그리고 남편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도와주는 거죠. 생색 안 내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면에서 남성적인 면이 드러나는 거라고 할 수도 있죠.

퍼 : ‘약한 여자를 돕는 것이 남자의 할 일’이라는 관점에서?

변 : 그렇죠, 술자리에서 여자 친구의 술을 대신 마셔주는 ‘흑기사’ 놀이도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비판하곤 하잖아요.

퍼 : 그렇지만 부드러운 감수성과 묵묵한 흑기사 기질을 두루 갖추신 남편 덕분에 아이 키우는 데는 많은 도움을 받으셨네요.

변 : 맞아요, 저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편했고 그래서 그럭저럭 이혼하지 않고 잘 살아요. 운이 좋았던 편이죠. 또, 제 시댁에서도 제 일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시죠.

퍼 : 집에 들어와서 살림하라고 하지 않으시고요?

변 : 저희 시댁이 다행히 여자가 공부하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세요. 시아버지가 교수님이셨거든요. 여자 박사, 교수가 익숙하신 분이라 ‘빨리 논문 써서 교수돼라’고 늘 말씀해주셨죠. 그런데 제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모르세요. 10대들의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라고는 아마 상상도 안 하실 거예요.

퍼 : 선생님 이름만 검색하면 자위니 섹스니 하는 온갖 민망한 단어들이 검색되는 데도요.

변 : 모르세요. 그냥 저는 전통 있는 집안의 며느리인 거예요. 여성학은 그냥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저의 사정을 아는 다른 동료가, “시아버지가 변 선생님이 하는 일이 뭔지 아느냐”며, “아마 정말로 아시면 받아들일 수 없으실 텐데”라고 하더라고요.(웃음)

퍼 : 똑똑하고 예쁜 며느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부장 권력의 해체, 자유로운 섹슈얼리티, 이런 것들을 주장한다는 걸 아시면 기절할 노릇이시겠어요.

변 : 저는 이런 제 상황들이 참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봐요. 제 수업에서도 분석적으로 다뤄요. 젠더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통념이, 여성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재미있는 지점이 되죠.

퍼 : 어떤 이야기를 다루세요?

변 : 저는 신체적으로 아이를 쉽게 갖고 낳을 수 있었기에 다 가능했던 거죠. 입덧으로 고생하고, 임신 기간에 힘든 사람이었다면?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았다면? 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다행히도 이런 부분에서 큰 문제가 없어서 아이를 잘 낳고 키우고 있기 때문에 시댁에서도 제 바깥 활동을 인정해주는 것 아니겠어요?

퍼 : 가정에서 엄마 노릇을 팽개친 여성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씀이시죠?

변 : 그렇죠. 우리 사회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면서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암묵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매우 강하죠.

퍼 :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서 겪은 어려움도 말씀해 주세요.

변 : 뒷바라지를 전혀 할 수 없는 학부모였어요. 애는 애대로 저는 저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죠. 큰 애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나는 모르는 사이에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거죠. 엄마의 뒷받침을 못 받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왕따가 된다더군요. 어느 날 친분이 있는 아이 친구의 엄마가 “‘웬만한 집’에서 왜 그렇게 애 관리를 안 하느냐, 애 옷 좀 잘 입혀라. 애가 옷을 잘 안 입어서 애들 사이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충고하기도 했죠.

퍼 : 속상하셨겠어요.

변 :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우리 아이가 무슨 준비물을 안 가지고 가서 11시부터 교실 뒤에서 벌을 섰는데, 선생님이 그걸 까먹고 애를 세워둔 채로 점심시간이 지나버린 거예요.

퍼 : 아이 점심은요?

변 : 굶은 거죠. 애가 굶는 것도 모르고 벌을 세운 거예요.

퍼 : 큰 사건인데요. 인터넷에 오르내릴만한.

변 : 그럼요, 너무 큰 사건이죠. 그때 제가 문제제기를 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학교를 다 뒤집어 놓을 각오가 아니면 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결국은 제가 편지를 써서 이야기 전달했더니 벌주었던 담임선생님은 “어머, 밥을 못먹었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넘어가더군요.

퍼 : 더 항의하지는 않으셨나요?

변 : 그때 제 지인들 중에는 비슷한 일을 학교에서 당해서 교육청에 민원을 넣어 학교를 다 뒤집어 놓은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왠지 그렇게는 못하겠더군요. 제 남편이 옆에서 ‘남의 일은 열심히 싸워주면서 왜 자식 일에는 나서지 않느냐’고 했었죠.

퍼 : 학생 인권 문제였는데도요.

변 : 네. 스스로 분석해 봐야할 문제인데, 그때는 그렇게 나서는 게 왠지 내 개인적인 이권을 위한 것 같기도 하고, 바깥 일이 너무 많다보니 싸울 에너지도 부족했던 거죠. 아이들이 ‘엄마는 모순적’이라고 해요.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하면서 집에서는 ‘너희들이 참으라’고 한다고. 그런 건 엄마가 말하는 ‘페미니스트 실천’이 아니지 않냐고요.

퍼 : 자녀분들이 서운하겠어요.

변 : 서운할 거예요. 또 제가 늘 페미니스트로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모순되기도 하죠. 생각해보면 제 안에 모순적인 논리들이 혼재되어 있어요.

퍼 : 치맛바람 일으키는 학부모처럼 보이기 싫으셨던 거 아닌가요?

변 : 어릴 때부터 유교에서 가정이 잘 돼야 다 잘 된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논리를 무척 싫어했어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집단의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런데 다른 한편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모토와 상통하는 면도 있는 거고, 가정이 사회적 변화의 거점으로 중요하기도 하고.

퍼 : 유교적 가치관이 강한 집안에서 자라셨나 봐요.

변 : 제가 종갓집 딸이거든요. 저희 외가가 정읍의 이름난 종갓집이고, 저희 외갓집은 문화재일 정도랍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러니까 종부의 딸인 거죠.


여성학과로 간 ‘명예 남성’

퍼 : 종갓집 시댁에 종갓집 따님이라니 생각도 못 한 반전이네요. 가부장에 반기를 드는 페미니스트가 되신 과정이 궁금해요.

변 : 제가 고려대 83학번 운동권이었죠. 대학 때는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퍼 : 전공은?

변 : 심리학과였죠. 사회과학 서클에서 활동했고, 여성성을 삭제당한 채로 살았어요. 막걸리 마시고, 담배 피우고.

퍼 : 그런 걸 ‘명예 남성’이라고 하죠?

변 : 그렇죠. ‘명예 남성’으로 제가 여성이라는 자의식이 전혀 없이 남자 동료들과 똑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제가 농활을 가서 성추행 사건이 있었던 거예요.

퍼 : 주민들이요? 아니면 학생들끼리?

변 : 학생들이죠. 내가 피해자였어요. 농활을 가서 숙소에서 자는데, 그땐 혼숙이 너무 당연했어요. 성별 구분해서 자는 게 오히려 더 우스운 때였죠. 그런데 내 옆에서 자던 남자선배가 자면서 나를 만진 거예요. 나는 성추행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상대가 내 몸을 만지는데, ‘어, 이 사람이 왜 그래? 이게 뭐지?’ 싶었죠.

퍼 : 성적인 의미가 있는 행동인지 알고 계셨나요?

변 : 전혀 몰랐어요. 그런 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무성적인 존재였다니까요. 연애에도 관심 없고. 80년대 엄혹하던 시절이라 그 당시엔 연애라는 것도 없고, 연애하는 건 시대적으로 부끄러운 거고, 동지적 관계만이 존재하는 시대였죠.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그 선배랑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제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하게, ‘어 선배 잘 잤어?’ 하고 오버액션할 정도였어요.

퍼 : 스스로 없었던 일로 하려고 하셨던 거네요.

변 : 네, 없었던 일처럼 하기 위해 내가 일부러 상황을 연출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그 형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그냥 그렇게 끝났어요. 아마 그 선배는 기억도 못할 거예요.

퍼 : 그게 성추행이었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인가요?

변 : 무성적 존재로 살다가, 어느 날 제가 사회과학 서클을 그만두는 사건이 생겼어요. 저희 집이 좀 잘 살았거든요. 저희 아버지 직장이 고려대 근처라 출근하시면서 항상 저를 학교까지 승용차로 태워주셨는데, 서클 선배가 그걸 보고는 저를 마구 비판한 거예요.

퍼 : 뭐라고요?

변 : 그땐, 대학 졸업하면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로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였는데, 너는 자본가의 딸인 네 성분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차를 타고 다닐 수가 있느냐. 너는 쁘띠 부르주아다. 이런 식으로 저를 너무 괴롭혔어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퍼 : 어차피 차가 오는 거니까요.

변 : 그렇죠. 같은 곳으로 오는 사람들이 같은 차를 타고 오는 일이 왜 잘못됐다는 건지. 내가 다른 걸 타고 오면 오히려 낭비 아닌가요? 이런 운동은 내 정체성을 숨겨야만 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서클 활동을 다 정리했죠.

퍼 : 열심히 하던 활동을 접을 정도로 심경의 변화가 크셨나 봐요.

변 : 그래서 4학년 2학기에는 올A를 받을 정도로 심리학 공부를 열심히 했고, 심리학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기도 했었어요.

퍼 : 어디로요?

변 : 입학 허가를 받은 대학은 독일 베를린 대학이었죠. 사회심리학을 전공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못 갔어요,

퍼 : 왜죠?

변 : 그때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사회 분위기도 많이 변화해서, ‘꼭 유학을 가야 하나’, 결정을 주저하고 있었죠. 저를 비판했던 선배의 물음도 여전히 마음에 무겁게 남아있었거든요.

퍼 : 네.

변 : 또 당시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시작했고, 집에서 유학은 결혼하고 가라 말리기도 하셨고요. 주저하던 차에, 누군가가 이대 여성학과에서 너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있는데 한 번 가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어요.

퍼 : 아무런 계기도 없이, 갑자기 여성학을요?

변 : 제가 여성성을 삭제 당하고 살았던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주 없지는 않았거든요. 당시에 이대 여성학과라고 하면, 여성 문제에 관심 있는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과였어요. 권유 받은 바로 다음 날이 원서 제출 마감이었는데, 그냥 내 보지 뭐, 하고 냈죠. 열흘 후에 시험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가 쓸 수 있는 문제만 나왔어요. 만약 떨어졌으면 유학을 갔겠죠.

퍼 : 당시 저희 대학생들은 ‘여성학’이 섹슈얼리티 문제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서 ‘성매매’, ‘성폭력’같은 사회 문제에는 발언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들고 나오셨어요. 그건 어떻게 가능했나요?

변 : 석사 논문을 쓸 때, ‘한국 성폭력 상담소(http://www.sisters.or.kr)’가 생겨났어요. 이대 여성학과 사람들이 상담소를 만들었기 때문에, 선후배들이 다 발기인이 되었죠. 성폭력에 대해서는 당위적으로만, 생각하면서 거기에 참여하게 되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섹슈얼리티에 관심을 갖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퍼 : 성폭력 문제에도 우연히 관여하게 되신 거네요.

변 : 저는 원래 일 귀신이거든요. 일을 굉장히 잘 해요. 성폭력 상담소도 처음에는 단지 ‘일’로 시작을 한 거죠.

퍼 : 상담소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변 : 많은 일이요.(웃음) 가령 당시 상담소가 돈이 없고, 국가 지원도 못 받을 때여서 규모가 큰 디너쇼를 기획해 인맥이란 인맥은 다 동원하여 몇 천만 원을 벌어들인 적도 있어요. 물론 비판도 많았죠. 그런데 저는 NGO가 살려면 개인 후원으로 조금씩 버는 걸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퍼 : ‘일중독’이라는 선생님 소개가 있던데, 사업가 기질이 있으신가 봐요.

변 : 성폭력 예방에 관한 비디오, 브로슈어, 자료 글을 번역하여 한국식으로 만드는 일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후회해요. 성폭력에 대한 이해와 사유 없이, 단순히 벤치마킹해서 만들었던 일들을 지금은 비판하고 있어요.

퍼 : 한국 실정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변 : 그렇죠. 외국 비디오를 보고 ‘필링 노 필링 예스’라는 말을 ‘좋은 느낌, 나쁜 느낌’이라는 말로 만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쁜 느낌’일 때 ‘싫어요’라고 말해요>라는 교육이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아요.

퍼 : 요즘 성교육에선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를 아예 외우도록 가르치던데요.

변 : 맞아요. 그런데 그런 기계적인 교육이 문제가 많아요. 가해자 앞에서 ‘싫어요’라고 말해서 더 위험해질 수도 있고, 말해도 우리나라 어른들은 일단 아이의 말을 무시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퍼 : 그렇죠.

변 : 그런 지침은 외국에서 아동 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좀 생겨난 후에 가능한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고 봐요. 아직도 과거의 자료들이 명맥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 제가 문제제기 많이 했죠. 없는 것보다 낫지만 근본적인 성폭력 예방 정책이 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섹슈얼리티 전문가로 ‘변태’

퍼 : 출발은 단지 ‘일’이셨는데, 주관심사가 섹슈얼리티로 옮아간 계기가 있으셨나요?

변 :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상담소를 나오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생겼어요.

퍼 : 갈등이 있으셨나요?

변 : 제가 상담소 소식지인 ‘나눔터’에 이런 글을 썼어요. ‘어린이 성폭력의 예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아이들이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확대되는데, 위험을 강조하고 조심할 것을 요구하는 성폭력 예방 교육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축소시키고 성적 성장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얘기였어요. 그 글을 쓰고 나서 너무나 많은 비판을 받았어요.

퍼 : 그건 지금 듣기에도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오르셨어요?

변 : 어느 날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예방 교육을 갔는데, 어떤 교장 선생님이 저에게 ‘성’에 관한 이야기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자꾸 ‘성’ 이야기를 하면 애들이 따라한다고. 성교육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모델링 효과를 가져온다는 거죠.

퍼 : 저도 학교에서 성교육을 고민하다보면 그런 지점이 참 어려워요.

변 : 고민이 되더군요. 나는 이 교육을 해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따라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유로 성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은 이런 식의 접근은 오히려 성 담론 자체를 위축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결론에 다다른 거죠.

퍼 : 성의 ‘폭력성’만을 강조하다보면 오히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더욱 축소시킬 수 있죠.

변 : 그러면서 갑자기 내 옛날에 대한 기억이 마구 돋아나기 시작한 거예요. 한 번도 그 경험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고 한 번도 반추하지 않았던 내 경험들이.

퍼 : 대학생 시절의 일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신 거네요.

변 : 그렇죠.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내가 성폭력 개념을 교육 받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때 저에게는 성에 대한 관념이나 욕망이 전혀 없었던 거거든요. 우리 부모님은 통금 시간을 설정하신 적도 없고 남자를 조심하라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저는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선배들하고 연애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배들 앞에서 여성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않은 거죠. 남자를 조심한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퍼 : 아예 몰랐을 때 오히려 자유로우셨다는 거죠.

변 : 이런 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명예 남성’에 불과했다고 비판받을 수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바람직한 남녀관계를 맺어 왔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 경계는 매우 모호하죠. 이런 사람에게 갑자기 성폭력 개념을 가르치고 남자가 위험하다고 이야기하면, 잘 지내다가 갑자기 위축되겠죠.

퍼 : 그 이후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셨나요?

변 : 네. 95년 상담소에서 그 글을 쓰고 엄청난 비판을 듣고 깨지고 나서, 96년부터 2000년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한 공부예요. 내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들이 필요했거든요.

퍼 : 진짜 여성학 공부는 그때 시작하신 거네요.

변 :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사실 제가 83학번이고, 사회과학 서클활동을 한 사람이다 보니, 서클활동을 다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의 시대적 무게감, 이념의 무게감을 계속 안고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무게감을 떨쳐버리고 자유로움을 획득하게 된 것은 섹슈얼리티 공부를 하면서부터예요.

퍼 :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되었군요.

변 : 섹슈얼리티 공부는 그 당시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라 처음에는 너무나 힘들었어요. 보이지 않게 저를 지배했던 386의 패러다임과 완전히 충돌한 거죠. 그래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치질에 걸렸어요.

퍼 : 스트레스로 치질까지 걸리셨다구요?

변 : 네, 몸이 여기저기가 마구 아프면서 머리의 고통, 심리적 고통이 몸의 변형 과정을 가져왔는지 저 자신이 굉장히 많이 변하더군요. 그동안 여성학 연구자로서 고민하고 부딪혀왔지만 저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이 몸의 변화를 겪으면서 제 사고 구조를 완전히 재구성하게 됐어요.

퍼 :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변 : 저는 공부를 잘한다는 여자들이 갖는 잘난 척, 자신만만, 이걸 가지고 있었어요. ‘공부 잘하는 여자’의 전형은 연애, 남자에 거리두기를 하면서 굉장히 꼿꼿한 자아를 가졌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런데 그 꼿꼿했던 자아가 다 깨진 거예요.

퍼 : 보통 대학 신입생 시절에 사회과학을 접하면서도 한 번 깨지잖아요?

변 :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여성 정체성의 고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제 계급성만 가지고 깨졌던 거라면 한 번 더 젠더 정체성을 가지고 깨진 거예요. 이렇게 삶을 재해석하다 보니, 제가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도 다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가 연관되어 있더군요.

퍼 :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변 : 시작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예요. 제가 자세가 좋지 않아서 삐딱하게 앉아서 시험을 봤는데, 그때 제 뒷자리 친구가 제 답안지를 다 베끼고 있었나 봐요. 그걸 안 선생님이, 출석부로 저를 열 대를 때린 거예요.

퍼 : 자세 똑바로 하라고요?

변 : 아뇨, 내가 일부러 보여줬다고. 너무 억울했죠.

퍼 : 앞뒤 상황을 파악하지도 않고 학생을 때리다니, 너무하네요.

변 : 그런데 고3 담임으로 그 때렸던 선생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하고 소통하는 걸 거부하면서 공부를 아예 놓아버렸죠. 그렇게 시험을 봤으니 학력고사를 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담임 선생이 너는 재수해서 서울대 가야 한다고 제가 가겠다는 고려대 원서를 안 써주겠다는 거예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퍼 : 기가 막히셨겠어요.

변 : 그래서 그동안에는 자존심 때문에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제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면서 울었죠. 울면서 다 얘기했어요. 다 당신 때문이라고. 그런데 담임선생이 몰랐다고 사과하면서, ‘나는 네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네가 연애하느라 그런 줄 알았다.’고 하는 거예요.

퍼 : 실제로 연애하셨어요?

변 : 아뇨. 그냥 친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내가 공부 안 한 원인을 연애와 관계시켜서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너무 자존심 상했어요. 그 일로 저는 그 선생과 소통을 완전히 끊어버렸어요. 그땐 저에게 심각한 충격이었고 그 선생을 혐오할 만한 거였어요.

퍼 : 아까 말씀하신 ‘꼿꼿한 자아’가 발동한 거네요.

변 : 예, 바로 그 자아를 다시 성찰하게 된 거죠. 그리고 제가 대학교 때 왜 연애를 안 했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니까, 고등학교의 일이 트라우마였던 거예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까지 남자애들하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도 연애를 안 했던 거더라구요.

퍼 : 남편분 만나기 전에는 연애를 전혀 안 하셨어요?

변 : 아뇨, 그러던 중에 운동권 총학생회 사람하고 알게 됐는데 그 사람이 술 먹고 우리 집에 데려다 주는 길가에서 강제로 키스를 한 거예요.

퍼 : 성추행이잖아요?

변 : 지금 생각하면 추행이지만 추행이라는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는? 연애의 시작이죠. 그래서 그 사람하고 사귄 게 첫 연애예요. 문제의식이 없었죠. 연애라는 걸 하면서, 이렇게 강제로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은 조금 있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았던 거예요. 이런 게 다 돌아보니 섹슈얼리티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더군요.


섹슈얼리티는 유쾌하다.

퍼 : 선생님의 삶부터 재해석하기 시작하신 거네요. 저는, 99년쯤에 <섹슈얼리티 강의>*를 읽고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됐어요.

* <섹슈얼리티 강의> 책 보러 가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4064&partner=egloos

변 : 그때가 클라이맥스였죠. 대학 학내가 성폭력 문제로 들썩거릴 때고, 학교마다 다들 성폭력 근절 학칙을 제정하고, 지금 있는 성폭력 담론의 밑바탕이 다 그때 생겨난 거예요.

퍼 : 저희 학교도 처음으로 성폭력 사건 가해자의 공개 사과 대자보가 붙고, 이에 대한 인권침해 논쟁이 일어나던 때였어요. 그때 세운 중요한 원칙이 ‘피해자 중심주의’였죠.

변 : 가해자의 의도보다 피해자가 느낀 피해가 중요하다.

퍼 : 그런데 여러 가지의 성폭력 사건이 공개되면서 사건 해결 주체로 나서는 페미니스트들도 ‘성폭력’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점점 어려워졌어요. ‘피해자 중심주의’의 대 원칙도 흔들릴 때가 있었구요. 그때 선생님의 책에서 ‘성폭력은 관계의 연속선상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하셔서 큰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 나요.

변 : 제 경험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내가 나의 성폭력 사건을 언제 성폭력으로 인지하게 되었는가를 돌아봤죠. 그리고 과연 내가 소위 ‘피해자’ 담론에 맞는 사람인가 생각해봤어요.

퍼 : 선생님은 당시에 그 일을 피해라고 느끼시지 않았던 거죠.

변 : 물론, 아주 치명적인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내가 그 당시 ‘명예남성’이었기 때문에 내 가슴은 ‘가슴’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가슴을 성애화된 것으로 인지하느냐에 따라서 성적 피해의 정도는 매우 다르다, 성폭력 개념과 피해자 개념은 하나의 잣대로 들이댈 수 없다는 거죠. **

** <‘피해자 중심주의’ 새롭게 고민하자> 관련 기사 읽기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1713&section=sc1&section2=성폭력

퍼 : 이번에 엮어 내신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에서 인상적인 점. 진보적인 활동가들도 자기 아이를 키우면서는 여러 관념이 보수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은 오히려 반대이시더군요. 성 문제에 관한 한 자녀에게 ‘10대도 섹스할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나요?

변 : 글쎄요, 저도 고민해요. 다리 벌리고 앉아서 치마 안 속옷이 보이면, 저걸 어째야 하나, 고민하죠. 아까 제가 통화하는 걸 보셨듯이, 저희 딸애도, 지금 영국에 가디언도 없이 혼자 있어 걱정이 되는데, 아이가 오히려 ‘엄마는 왜 나를 불신해? 엄마 너무 웃겨. 나한테는 한비야 책을 권하면서 세계를 다니라고 하면서? 그러는 것도 젠더 고정관념 아니야? 엄마가 자꾸 그러니까 사회 문제가 고착화되는 거야.’라고 해요.

퍼 : 따님이 이미 선생님의 언어에 매우 익숙한가 봐요.

변 : 네, 우리 딸애는 제가 일하던 성폭력 상담소에서 상근하는 언니들하고 자주 같이 지냈고, 방학이면 같이 상담소에서 개최하는 캠프에 다니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자기주장도 강하고 이런 담론에 아주 익숙해요.

퍼 : 선생님이 바쁘신 대신 상담소 언니들이 멘토 노릇을 톡톡히 했군요.

변 : 그렇죠. 그런데 딸이 자라나면서, 중학교 때까진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었는데, 고등학교에서 딱 부딪치는 거예요. 아이들로부터 ‘트랜스 젠더’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갔다가 포스터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학교와 굉장히 크게 부딪쳤어요.

퍼 : 책에 언급했던 사건 말씀이시죠? 영화 ‘작업의 정석’ 포스터를 패러디한 선거 홍보물을 만들었다고 강제로 철거당했다는.

변 : 예, 제가 보기엔 전혀 선정적이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매우 부당하게 아이를 대했다고 생각했어요. 편지를 써 들고 학교를 찾아갔는데 오히려 문제를 키운 꼴이 되었어요. 남편은 제게 책임지라고 애를 망쳤다고도 말하지만, 이게 뭐 저의 개인적인 문제인가요? 이 사회가 자연스런 10대들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문제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퍼 : 따님을 남다르게 키우신 것이 후회되지는 않으셨나요?

변 : 너무 많은 걸 가르쳐줬다 싶어서 후회할 때도 있었어요. 나이에 맞게, 몰라도 되는 것은 넘어갈 것을 그랬나, 하고요.

퍼 : 예를 들자면?

변 :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엄마, 술 먹어도 돼?” 하길래 “응, 먹어봐” 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온 거예요. 옥상에서 애들하고 술 먹다가 뻗어 있다고 남자애가 전화를 했더라구요. 가슴이 덜컥 했죠. 바로 성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요? 다행히 그 남자애가 착한 애여서 집으로 연락을 했던 거죠.

퍼 : 큰일 날 뻔 했네요.

변 : 그럼요. 그 이후로 아이에게 잔소리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갈등이 시작됐죠. 딸애는 ‘왜 갑자기 나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느냐’고 하고, 나는 “맞다, 이런 나의 간섭이 네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데 장애가 될 거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때 맞게 될 여러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냐.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나도 딜레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퍼 : 아직까지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으셨나요?

변 : 대체로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이 성문제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가 별로 남자를 좋아하지는 않더라구요. 만약 남자를 좋아한다면 사고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면의 문제는 없어서 제가 그러죠. “너 섹스는 왜 안 하니? 너는 정말 섹스 빼고는 다 하는구나”. 그랬더니 아이가 섹스 너무 싫대요. 엄마 아빠가 한다는 상상만 해도 너무 싫대요. 사실은 아이의 이런 면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고민이 돼요.

퍼 : 결국 한국에서 교육을 시키지 않으시기로 결정하셨구요.

변 : 예, 아이가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니기 싫다고 해서, 결국은 자퇴를 시키고 영국으로 보냈어요. 속상하기도 했고,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될까봐 저도 고민을 했지만, 아이가 원하는 교육을 시켜줄 수밖에 없더군요. 저희 집이 다행히 경제적으로 해줄 수 있는 환경이 되었구요.

퍼 : 요즘은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 센터’(http://www.sexuality.or.kr/)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변 : 섹슈얼리티의 위험성만을 강조하는 담론에서 벗어나서 유쾌하게,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자는 거죠. 저는 제 활동들이 너무 재미있어요. 이게 저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하는 거지 어떤 이데올로기로서 하는 건 아니에요.

퍼 : 옆에서 보기에도 즐거워 보이세요. ‘재미있다’, ‘즐겁다’는 말을 많이 하시고요.

변 : 그럼요. 저는 앞으로 시민운동도 이데올로기나 이념보다는 자기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똑똑한 젊은 친구들이 페미니즘 다 공부해놓고 왜 활동을 못 하나요. 돈이 안 돼서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NGO나 시민운동은 투잡 개념으로 접근하자는 게 제가 늘 하는 얘기에요.

퍼 : 생계 수단은 다른 것으로 하고, 사회운동은 자아를 실현하는 활동으로 하자는 말씀이신가요?

변 : 그렇죠.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물론 시민운동으로 생계를 해결하면 더 좋지요. 그렇지만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멋쟁이도 많아요. 누리고 싶은 문화 활동이 있고 자기 스타일이 있고 여행도 많이 즐기거든요. 그러려면 허리 졸라매는 과거의 운동 스타일로는 안 되죠. 저희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 중에는 보험회사 다니면서, 저녁에는 저희 활동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행복하면 된 거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즐거움을 전파하고요. 물론 이런 삶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퍼 : 구금 시설의 청소년들도 만나신다고요.

변 : 예.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 센터’에서 구금 시설의 청소년들에게 인문 강좌를 하는 프로젝트를 맡아서, 그 아이들을 만났죠.

퍼 : 특수한 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일 텐데요.

변 : 무척 강하고, 또 똑똑한 아이들이에요. 제가 ‘너희와 다른 애들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선생님, 저희는 너무 강해요.’ 그래요. 제가 ‘어머, 너무 좋겠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사회는 이런 저희를 너무 싫어해요.’

퍼 : 자신들의 모순된 상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네요.

변 : 아, 그 말을 듣고 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아이들과 만나면서 90년대 후반에 섹슈얼리티를 공부하면서 얻은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성찰을 얻었어요. 이 아이들의 훌륭한 에너지를 어떻게 발현시킬 수 있을까 싶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취직도 물어봤었어요. 그런데, 그들도 꺼리더군요.

퍼 : 위험하다고 생각하시겠죠.

변 : 그렇죠, 데리고 일하기에는 버겁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회적 편견이죠. 저는 그 아이들과 부딪치고, 만나고, 일 대 일 면접을 하면서, 구금 시설 청소년들이 가진 특별한 면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이렇게 강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자신들의 강함을 알고 있고 사회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선택을 할까 생각해봤어요.

퍼 : 자신의 강함을 포기하지 않을까요?

변 : 그렇죠. 아마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선택하겠죠.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아이들도 그걸 알고 있어요. 아이들 사연을 하나하나 소개하자면 끝도 없지요. 저는 요즘도 이 아이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퍼 : 선생님께서 사회 활동을 많이 하시는 남다른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변 : 재밌으니까요. 이게 정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그 아이들과 만나고 오면 너무너무 흥분이 돼요.

퍼 : 대학 사회가 답답하진 않으세요?

변 : 아유 그 얘기 하자면 끝도 없죠. 그 이야기는 죽을 때쯤, 다 하고 죽을 거예요. 그 얘긴 너무 기니까 생략!

퍼 : 교사들, 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한 마디씩만 해주세요.

변 : 너무 많은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은 모두 다르니 개성과 특성, 차이를 좀 인정해 주십사 하는 거예요. 부모들도, 다른 아이와 우리 아이가 다른 점, 특성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마시고. 특수함을 좀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키울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 보자는 거 말씀드리고 싶어요.

퍼 : 10대들에게는요?

변 : 친구들하고 많이 놀고 많이 먹고 많이 자라, 정말 하고 싶은 거 많이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것의 결과가 우리 사회에서는 사고나 비행으로 말해지잖아요, 그러니 그걸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이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10대 아이를 둔 엄마로서 10대들의 ‘유쾌한 섹슈얼리티’를 말하고, 종갓집 며느리이자 딸로서 ‘가부장 권력’이 여성의 삶을 억압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골치 아픈 것이 싫어서 이런 모순된 상황 속에서 쉽게 양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모순에 너무나 예민한 나머지 우울과 비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변혜정 선생님이 하고 있는 일은 세상의 거의 모든 편견 - 성별, 나이, 성 정체성, 학벌, 계층 등 - 에 도전하는 일인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활동은 끝나지 않을 허들 경주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고 변 선생님은 “나중에 술 한 잔 하며 더 깊은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하셨다. “지금이야 쉽게 말하지만, 살아오면서 어찌 쉽기만 했겠냐”며. 끝없는 장애물들을 바라보며 ‘즐겁다’ 말하는 원천 에너지를 전수받을 수 있는, 유쾌한 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 자리는 언제든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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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반짝이는 맑은 날
인천
바다냄새 섞인 부드러운 바람

맥아더의 귀신들이 지금도 진을 치고 있는 자유공원
전원주택처럼 '작정하고 예쁘게' 지은 집들
100년 동안 사연이 쌓이고 쌓였을 오래된 집들, 골목들, 교회들
'명동백작'이나 '경성스캔들' 같은 드라마에서 튀어나올 법한 오래된 가게들
삐까뻔쩍하지만 텅 비어 있는 아트플랫폼의 이물감
뻥 좀 쳐서 수백명이 먹으려고 줄 서 있던 신포시장 닭강정
스테인드글라스가, 저렇게 예쁜 거였나? 싶었던 답동성당
텅빈 골목과 가로등의 불빛과 그림자의 아름다움
벽에 붙여진 전단지, 안내문, 간판 하나하나가 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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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골목길'의 아름다움을 그린 지식채널E 영상.
'서울, 골목길 풍경'이라는 책도 읽어보고,
삼선동, 한남동, 이태원동, 북아현동, 서계동,,,, 하는 동네들도 다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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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슨웹 인터뷰 http://www.personweb.com/beta/main/interview/229?page=1

청소년 인권 운동가, 배경내

8월 중순의 비 내리는 토요일 점심, 충정로의 한 카페에서 인권 운동가 배경내 씨를 만났다. 활동가들 사이에서 ‘개굴’이라 불리는 배경내 씨는 ‘인권 운동 사랑방’을 거쳐 지금은 ‘인권 교육 센터 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우리교육, 2003)는 저서의 제목이 말해주듯 학교 내 인권, 청소년 인권이 그의 주요 관심사이다.

두리번/ @redpebl



나는 그를 작년 여름 교사 연수에서 처음 만났다. 청소년 인권 운동가로 유명했던 그는 ‘교원 인권 감수성 향상’ 연수의 강사로 등장하였다.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울림은 한여름 밤 팔딱이는 개구리의 목청만큼이나 우렁차고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학생 인권 조례 제정을 비롯하여 학생 인권에 대한 논쟁이 시끌벅적한 요즘, 그는 전국을 누비며 교사와 교육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바쁜 일정을 쪼개 어렵게 시간을 낸 배경내 씨와 마주했다.

 


학교 안 인권 문제를 제기하다

 두리번(이하 두) : 많이 바쁘시죠? 인터뷰 약속 잡기도 힘들었어요. 어제도 교육 때문에 천안에 다녀오셨다 들었어요. 종횡무진 활약이십니다. 어때요, 요즘 들어 더 바빠지신 거죠?

 배경내(이하 배) : 그렇죠. 학생 인권 조례 때문이죠. 요즘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운동 본부를 만들고 있거든요. 곽노현 교육감이 당장 2학기부터 체벌을 금지하기로 하는 바람에 각종 교육 일정들이 늘어났어요.*

 * “서울시 교육청 2학기부터 각급 학교 체벌 전면 금지” (연합뉴스)

두 : 게다가 학생 인권 조례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서울뿐만 아니라 강원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죠.

배 : 네. 그런데 조례 제정하려면 당장 인권 교육이 필요하거든요. 자료 요청과 연수 요청이 몰려오죠. 학생 인권 조례를 제정하는 것은 무척 필요하고 중요하고 기쁜데, 일이 몰리고 있어서 힘들기는 해요. 8월까지는 너무 바빠요.

두 : 학생 인권 조례는 먼저 경기도에서 제정되었잖아요? 배경내 씨는 가까이에서 과정을 지켜보셨죠? 그 과정에 대해 듣고 싶어요.

배 : 경기도 교육청에서 자문위원단을 꾸리고 조례안 작성을 시작했죠. 꽤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했습니다.

두 : 자문위원단은 어떻게 구성되었어요?

배 : 국가인권위에서 온 분, 인권 법학자 한 분, 교육 운동가, 현직 교장 교감 등으로 구성되었었는데, 교장, 교감 선생님들의 자세가 인상적이었어요. 주어진 일이니까 최선을 다 해보자는 태도였고 학생 인권에 대해 배우려는 자세이셨어요.
그런데 12월에 초안이 발표되고 조·중·동에서 조례안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잖아요. 그걸 보고 자문위원들, 특히 현직 교장, 교감 선생님들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학생 인권에 대한 관심이 막 생기려고 하다가 밖에서 우려하는 걸 보고 금세 위축되어 버렸던 것 같아요.

두 : 보수 언론의 공격이 영향력을 발휘한 셈이네요.

배 : 보수 언론의 공격과 일련의 논쟁들을 지켜보며, ‘학생 인권’은 아직 사회적 합의가 안 된 주제임을 실감했죠. 그래서 2월에 학생 인권 조례 최종안을 발표했을 때 초안보다 청소년의 사상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축소된 채로 발표되었어요.

두 : 그래도 경기도 교육청의 학생 인권 조례안이 지닌 의의가 적지 않죠.

배 : 네, 경기도 교육청의 학생 인권 조례안은 사회적 공감대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추진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촉발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죠.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 인권 조례안을 마련할 때, 모델로 삼기에 크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생각해요.

두 : 진행 과정에서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요?

배 : 짧은 기간에 준비하는 바람에 고려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어요. 먼저 실효성 면인데요, 과연 실효성이 있을 것인지, 싶어요. 또 한 가지는, 조례안이 여러 다양한 조건을 가진,  다양한 학생들을 포괄할 수 있는지 미처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워요.


왜 학교 안 인권이 문제인가

두 : 최근의 학교 체벌 논쟁은, 서울시 교육청에서 2학기부터 ‘학교 체벌 전면 금지’ 발표 이후 본격화되었죠. 저는 물론 체벌 금지에 동의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소위 ‘위로부터의 개혁’이 가지는 한계가 분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배 : 맞아요. 경기도는 사회적 여건이 부족한 지역이었어요. 교사들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죠. 그러나 서울에서는 이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합의를 모으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조례 제정을 추진한다면 학생, 학부모, 교사가 주체가 되는 운동 단위가 꾸려져야 해요.

두 : 그래야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겠네요.

배 : 사실 조례 제정은 중요한 게 아니죠. 진짜 중요한 건, 우리 사회에서 학생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성숙하는 과정, 그리고 현장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물꼬를 트는 일이죠. 이게 정말 ‘우리가 하는 운동이다’는 느낌이 드는, 현장의 꿈틀거리는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 거예요. 

두 : 서울에서 학생 인권 조례를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나요?

배 : 7월 7일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서울 운동본부’가 발족했어요. 전교조, 참교육 실천 학부모회, 평등교육 실현 학부모회, 또 각종 청소년 단체들, 사회단체들이 모였어요. 지금 이들의 입장은 경기도와는 달리 인권 조례 제정을 ‘주민 발의’로 시작하자는 거예요.

두 : 주민들이 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것이군요.

배 : 네, 지금 학교 체벌 논쟁을 보수 언론이 주도하면서 학생 인권 조례의 제정 여부가 ‘진보 교육감의 공과 실’로만 논의되고 정작 중요한, 학생 인권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은 사라졌어요. 우리는 이 논쟁의 방향을 틀어 보려 합니다. 그러려면 교육 주체들이 참여가 필요하죠. 보수 언론의 공격이 계속된다면, 인권 조례의 내용과 시기가 후퇴될 수 있고, 교육청의 인권 조례 의지도 위축될 가능성이 높아요. 우리는 교육청과 보수 언론을 모두 압박하는 역할을 하려 해요.

두 : 보수 언론에서 학생 인권의 문제를 그렇게 열심히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요?

배 :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어요. 하나는, 질문하는 힘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학교 교육이 인간이 감당할 만한 상황인가?’, ‘내 삶은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일상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중요해요. 질문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체제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되죠. 저들은 질문하는 힘이 체제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거예요.

두 : 두 번째 이유는?

배 : 학교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들은 학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중요하죠. 특히 사립학교는 더욱. 그런데 학생 인권에서는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의견을 내고 정보를 요구할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생들과 교사들을 무력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학생 인권에서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이야기하죠.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결국 그들이 지금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다수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거예요.

두 : 학생 인권 문제가 학교 운영의 민감함 문제를 건드리는군요.

배 : 그렇죠. 세 번째는 우리 학교 교육 자체가 포함의 논리가 아닌 탈락의 논리로 학생들을 통제해나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죠. 현재 학교 교육은 더 많은 학생을 감싸 안는 곳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을 탈락시키는 명분을 부여하는 곳인 것 같아요. 그런데 학생 인권은 이 탈락의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이들이 다시 포함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결국 지금의 학교 교육의 방향과 학생 인권이 추구하는 방향은 정반대인 거죠.

두 : 학생 인권 논의가 지금의 학교 교육 전반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문제였군요.

배 : 조·중·동에서 학생 인권 조례 제정을 비판하면서 대립각이 선명해진 면도 있어요. 예전에는 학생 인권 문제는 ‘하면 좋지만 꼭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조·중·동에서 저렇게 반대하는 것이라면 학생 인권이 진보적 사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 보다”, 그러죠.

두 : 조·중·동에서 의도하지 않은 도움을 주었네요.

배 : 그런 셈이죠.(웃음)

두 :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서울 운동본부’에서 주민 발의를 위해서 9월까지 조례안을 만들고 10월부터 10만 명 서명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배 : 예, 서울시 주민 10퍼센트의 서명을 받으면, 법적으로 주민 발의가 가능하거든요. 서울 시민의 10퍼센트는 8만 2천명 정도인데, 서명을 받다보면 서명을 놓친다든지 주민등록번호를 놓친다든지 서울 시민이 아닌 사람이 섞인다든지 하기 때문에, 십만  명을 받는 거예요. 유권자만 유효한 서명이라 학생들에게는 ‘청원 서명’을 받으려고 하고요.

두: 와, 청소년을 빼고 학생 인권 조례에 동의하는 사람 10만 명이라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배 : 그래요. 어려운 일일 거라 생각은 들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말 걸기를 시작하려고 해요. ‘부모’의 정체성에 말을 걸고, 교사에게도 ‘선생님’의 정체성에 말을 거는 거죠. 저희는 ‘학생 인권을 보장하는 서명을 해 주세요’라고는 하지 않으려고요. 그 대신 ‘우리가 원하는 교육을 우리가 만들자’고, 함께 서명을 해서 제출하자고, 그렇게 말을 걸려고 해요.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에 좋은 매개가 되는 활동일 것 같아요.


청소년도 사람입니다

두 : 우리 사회에서 진보 진영이 선점한 가치들이 몇 가지 있죠. 이를테면 민주주의와 평등. 그런데 학생 인권, 청소년 인권은 진보적 인사들 사이에서도 아직 낯설어 하는 이가 많아요.

배 : 지금까지 진보 진영에서는 주로 균등한 기회, 평등한 지원과 같이 교육 복지의 측면에서 교육 문제를 접근해왔죠. 그런데 학생 인권은 쉽게 말해 학생들에게 자유와 참여를 보장해주는 거거든요. 근데 생각해 봐요. 먹고 살 수 있게 해줬는데 자유롭지도 않고 의견을 낼 수도 없다면, 그건 사육되는 동물과 같은 삶이잖아요? 자유와 참여가 빠져 있는 복지는 동물적 복지죠.

두 :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배 : 인권 의식은 우리가 사실은 모두 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통찰이 필요한 거거든요. 이런 성찰이 사회 전반에 진행되면 아마 인권 문제도 잘 풀릴 텐데, 진보 진영이 지금까지 사회에 필요한 활동을 많이 해 왔지만, 우리 사회에서 인간 이하로 취급받는 존재에 대한 고민은 생략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두 : 진보 진영에게는 뼈아픈 지적입니다.

배 : 생각해 보면요, “때리지 마세요”라는 부탁은 노예들이 했던 거잖아요. 또 우리나라 감옥 수감자들의 두발 자유는 2000년에 와서야 가능해졌거든요. 체벌 금지, 두발 자유는 정말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이잖아요. 체벌 금지와 두발 자유는 인간 이하의 등급에 놓여 있던 존재들이 인간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돼요. 그것이 학생 인권이라는 이슈가 갖는 의미이죠.

두 :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이 척박한 상황에서 교육 문제를 이야기하며 다른 주제가 아닌 ‘인권’으로 접근한다는 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배 : 외로웠어요. 많이 외로웠어요. 나 혼자 세상에 맞서는 느낌이랄까? ‘당신이 와서 가르쳐보라’는 반응이 많았어요. 가끔은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도 청소년들과 만나본 경험이 적었기 때문에 말이 안 통할 때가 많았어요. 말이 먹히지 않는 느낌이었고 외롭기도 하고 자신 없기도 했어요.

두 : 그래서 청소년 모임과 만나기 시작하셨나요?

배 : 학생 인권 운동이 옳으니까 이루어져야 한다는 식의 가치 운동으로는 소용없다고 생각했어요. 청소년들이 자기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고 봤죠. 그래서 청소년 모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두 : 그렇지만 학교 밖에서 청소년들을 안정적으로 만나기는 어려웠을 텐데요.

배 : 예, 계속 교류하는 청소년들이 있기는 했는데, 청소년 모임이 잘 되다가도 잘 안 되는 부침이 심하고, 그리고 청소년들은 나이를 먹고 자라나잖아요. 그러면 다른 운동으로 옮겨가고. 그런 게 힘들었죠.

두 : 청소년들과 모임을 지속해온 동력이 있을까요?

배 : 모임이 사라지더라도 개인은 남는다거나 구체적 활동을 통해 중요한 장면들이 만들어지면서 운동이 성장하는 것 같아요. 청소년 모임들도 여러 다양한 단체들이 있어서 정체성이 애매한 단체들이 있는데, 그 단체들이 문제적 장면에 노출되면서 ‘인권’이라는 가치에 직면하고 인권을 자기 의제로 가져가는 흐름이 있어요. 그러면서 청소년들이 많이 그룹화 되었어요. 청소년들 스스로 만들어내는 목소리들도 커졌죠.

두 : 그런 청소년들이 학교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죠.

배 : 학교에 간혹 계시던, 학교를 바꾸려고 헌신했던 선생님들, 보통 혼자 열심히 노력하다 실망하곤 하시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분들이 청소년을 통해서 자극을 받기도 하구요.

두 : 요즘 청소년 인권활동가 네트워크**라는 이름이 자주 보이던데요.

** 청소년 인권활동가 네트워크 홈페이지 http://cafe.daum.net/youthhr

배 : 네, 2005년에 만들어졌는데, 2006년부터 제대로 구실을 하기 시작했죠. 네트워크는 아수나로***, 중·고등학교 학생회 간부들 모임, 전북 학생 인권 모임 나르샤 등등 몇몇 단체가 묶인 거예요. 처음에는 느슨한 네트워크를 소박하게 만들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만들고 무척 바빴어요, 스쿨 어택, 전국 행진, 캠프, 학생의 날 행사까지.

*** 아수나로는 2004년말에 탄생한 청소년 인권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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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 경내 씨는 다른 누구보다 청소년을 함께 활동하는 동료, 동지로 삼고 있는 거죠? 오랫동안 그래왔으니 이미 성인이 된 친구도 많을 테고, 또 그러다보면 경내 씨 곁을 떠나간 친구도 많을 거 같아요. 그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배 : 오랫동안 만나온 청소년들은 이제 친구나 다름없죠. 제가 청소년들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물론 청소년은 미성숙하지만 그건 경험의 절대치가 다르기 때문일 뿐이지 다른 의미는 아니라는 거예요.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지금의 사회가 더더욱 청소년을 미성숙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의 권리-인권은 미성숙 여부와 상관없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단단해졌어요. 이건 이 사회에서 미성숙하다는 취급을 받고 있는 여성이나 장애인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이라고 봐요.

두 : 그래서인가요? 언젠가 ‘인권교육센터 들’**** 소식지에서, ‘세상에 저항하는 나만의 방법’으로 경내 씨는 ‘청소년과 함께 담배 피워 주기’라고 한 적이 있죠. 어른인 경내 씨가 청소년과 동료로 지내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취하는 태도나 행동들이 있으면 좀 더 말해 줄래요?

**** 인권교육센터 ‘들’ 홈페이지 http://www.dlhre.org

배 : 음, 이건 정말로 진지하게 각오해야 하는 건데요, ‘최대한 솔직해지기’. 투정도 부리고, 정말로 투정 부려요. ‘나 힘들어~’ 하고. 그들 앞에서 어른이 아니기 위해서요. 또 ‘나쁜 짓 같이 해주기’. 술집에 같이 가주고, 담배도 사다주고.

두 :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배 : 술이나 담배에 대해서 다른 어른들이 아이들의 상태를 걱정하며 하는 말, 이를테면 ‘쟤 요즘 술 너무 마신다’, ‘담배가 너무 는 것 같다’고 하는 걸 보면, 저는 “~~하니까 그만 피워. 안 돼”라고 하지는 않아요. 대신 이렇게 해요. “몸의 변화는 없어?”, “남들이 이렇게 말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라고 물어보죠.

두 : 청소년들과 거리가 느껴질 때는 없으신가요?

배 : 조급함과 답답증이 생길 때도 있어요. 저는 오래 전부터 이들의 문제를 고민해서 어느 때는 좀 적극적으로 치고 나갔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들은 아직 고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만 청소년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 운동이니까 제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돼요. 조급함을 누르고 그들의 속도를 기다려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또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에너지를 제가 못 따라가기도 하고요.


가장 보편적인 언어, 인권을 만나다

두 : 이야기를 듣다보니 배경내 씨 개인이 궁금해지네요.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배 : 특별히 문제의식이 많은 학생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죠.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참 좋은 분이고, 반 분위기도 참 좋았어요. 수업 시간에 재미있는 말 하는 친구들, 기상천외한 질문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 친구들이 인기도 많고, 인정받는 분위기였어요.
그 중에 무슨 문제든 끝까지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담임선생님께 뭔가를 또 끝까지 물어본 거예요. 선생님을 곤혹스럽게 한 거죠. 그 지경에 이르니까 그 좋던 선생님이 그 아이 볼때기를 막 때렸어요. 진짜 심하게. 그걸 보면서 느꼈죠. ‘저 사람은 권력자였어. 그동안 그 권력을 사용 안 했을 뿐 사실은 우리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때 받은 느낌이 굉장히 강렬했어요.

두 : 아...

배 : 고 2때 전교조가 막 만들어졌는데, 이웃 학교에서 해직된 선생님이 순회투쟁이라는 걸 하더라구요. 우리 학교에서 선전전을 했는데 지금 뭔가 세상에 부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죠. 그렇지만 저는 그때 오로지 지상목표가 서울로 대학 가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거였어요. ‘나는 공부해야 한다’ 생각하고 그냥 공부를 열심히 했죠.

두 : 대학에 가서는요? ‘강경대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던 글을 봤어요.

배 :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그때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이 터졌는데, 그런저런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유인물을 나눠 주더라구요. 그걸 받으면서, ‘아, 이제 이런 질문들이 나에게 주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러다 강경대 사건이 터지고 우연히도 열사의 시신이 세브란스로 왔어요. 학교 전체가 술렁술렁했죠. 도서관에서도 다들 그 얘기. 그때 마음이 무척 무거웠어요. 한 백 미터만 가면 되는 곳에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나에게 정면으로 질문이 던져지는 느낌. 결국 갔죠. 그날이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거죠.

두 : 원래 전공이?

배 : 아, 이거 우스운데. 영문과예요. 제가 남들에게 늘, 영문도 모르면서 영문과 갔다고 하죠. 4학년 때까지는 그냥 학생회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 대안 교육 운동 동아리를 만들면서 교육 운동을 시작한 거예요. 그 세대는 어떻게 보면 축복받은 세대죠. 대중 운동이 엄청나게 고양된 시기였고. 그런 걸 보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두 : 요즘 마음은 어때요? ‘학생 인권’이라는 이슈는 경내 씨가 십여 년 동안 중요하게 붙들고 있었던 주제인데, 드디어 제대로 펼쳐보는 느낌일 것 같은데.

배 : 네, 정말 그래요. 저는, 학생 인권이 진짜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학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학교라는 공간에 있는지가 중요하다고요. 그리고 그게 어떤 정책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청소년 자신의 문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대안 교육에 관심이 있어 대안 교육 운동에 기웃거렸어요. 그런데 음, 뭐랄까…… ‘좋은 어른들이 좋은 교육을 만들려는 거구나.’ 싶었죠. 뭔가 꽉 차 있어서 더 텅 비어있는 느낌? 너무 잘 만들어진 관상용 같은 느낌? 그랬어요.
저는 좋은 교육 만들기는 시끄럽고, 너저분하고, 힘든 거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학생들이 주인이 되는 거여야지, 어른들이 만들어주는 거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니 ‘학생인권’이라는 주제에 주목하게 됐죠. ‘인권’이 갖는 정체성, ‘인권’이 주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모든 걸 다 말하는 느낌이 좋았어요.

두 : 아, 그랬나요? 저는 대학 다닐 때 ‘인권’에 대해 말하는 건 왠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고, 몰계급적인 것 같고, 너무 맨숭맨숭하다 싶었는데.

배 : 그렇죠. ‘인권’이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로만 멈추면 재미없죠. 인권이 문제적인 구체적 장면과 만나면 정치성이 확실해져요. 인권이 침해받는 구체적 장면들 하나하나는 매우 정치적이죠. 사람이 정말 스스로 바닥까지 내려갈 때가 있잖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정말 바닥일 때, 그럴 때조차도 이 사회에 기본적 조건을 요구할 수 있는 언어, 그게 ‘인권’이죠.

두 : 경내 씨는 인권 운동 사랑방에서 사회 운동을 시작했잖아요? 인권 운동 사랑방과 만남을 ‘운명적 조우’라고 하셨죠?

배 : 아, 제가요?(웃음) 대학 때는 인권이라는 말을 몰랐어요. 대안 교육 기웃거리면서 살아가다가 어느 날 인권영화제 포스터를 봤는데, 그 포스터가 엄청나게 컸던 것만 같아요. 주변의 다른 것들을 제치고 그것만 엄청나게 확대되어서 보였던 느낌?

두 : 인권이 경내 씨 가슴 속으로 뛰어 들었네요. 그게 몇 년이죠?

배 : (웃음) 96년이요. 1회 인권영화제. 96년 말에 사랑방에 갔어요. 80년대 대학생들은 졸업하면 모두 위장취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90년대부터 좀 달라진 거죠. 그때 ‘진보적 사회 진출을 위한 학교’라는 일종의 실습학교가 있었죠. 실습학교라고 해봤자 그땐 그냥, 재미도 없는,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입력하는 자원 활동을 했어요. 그치만 공부할 때는 참 좋았어요.

두 : 제가 대학 갓 졸업했을 때, 인권 운동 사랑방은 박봉으로 유명한 곳이었는데요.

배 : 네, 그 당시 월급이 35만원이었어요. 그 월급을 그만둘 때까지 받았나, 그래요. 그런데 나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찾고 싶었어요. 그러면서도 진보적 사회 진출이 좋기는 하지만 먹고 살 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유네스코도 기웃거려봤는데 유네스코는 현장성이 없더라구요. 인권 운동 사랑방에서는 뭔가 도전 의식이 생겼어요. 사랑방이 93년 창립됐는데 그 당시 인권운동의 사회적 기반이 하나도 없었어요. 내가 할 일이 많은 것 같았어요.
게다가 저는 조직 기반이 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랑방에는 ‘교육실’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교육실에 왔다 갔다 하던 사람들 중 교사 분들이 있었는데, 인권 교육을 고민하다보니 교육 내 인권을 고민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둘 다 하게 되었죠.


지금, 여기의 삶을 사랑하라

두 : 인권 운동 사랑방에서 인권 교육 센터 ‘들’이 분리된 과정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배 : 사랑방은 단체 하나 가지고 몸을 불리지 말고, 자꾸 알까기를 해서 더 많은 단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자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먼저 분리된 게 ‘인권 연구소 창’이고, 다음으로 인권 교육실이 분리되면서 ‘인권 교육 센터 들’이 생긴 거죠.

두 : ‘들’에서 활동하는 청소년들의 활동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재정과 학습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요.

배 : 네, 활동가 청소년들이 대부분 학교를 싫어하다보니 학교 공부는 재미없어 하는데 그러다보니 배울 기회 자체를 놓쳐요. 그 친구들이 어떤 자기 세계를 가지고 어떤 자기 전망을 펼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안타깝죠. 우리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천천히 맞이했던 그 질문들을 그 친구들은 당장 눈앞에서 만나게 돼요.

두 : 그들에게 학교 밖 학습을 위한 도움을 주는 것이군요.

배 : 공부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강사와 공간은 후원을 받아야 할 거예요. 청소년친구들에게는 수업료를 주려구요.

두 : 수업료를 받아야 할 텐데 주신다구요?

배 : 네. 활동 기반을 마련하자는 거니까요. 재정이 많이 필요하니 후원이 절실해요. ‘들’뿐만 아니라 문화연대, 교육공동체 나다, 진보교육 연구소, 동성애자 인권 연대 등 함께 해온 단체들이 같이 준비하고 있어요. 두리번도 강사 후원해 줄 거죠?

두 : 하하, 아는 건 없지만 노력해 볼게요. 짧은 기간이지만 약 1년 여 정도 제가 경내 씨를 보면서 받은 느낌은, 굉장히 ‘바르고 단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어요. 혹시 그런 거 있어요? ‘나는 운동가로서 이래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원칙 같은 것?

배 : (부끄러운 듯 웃음) 하하하. 저 스스로 활동가라고 생각해요. 제가 세운 원칙에 따라 제 삶은 구성되어야 한다고, 그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고, 그게 재미있죠. 저는 제가 어딘가에 쓰이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일을 많이 맡고 거절은 잘 못하죠. 쓰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뒷바라지하는 것도 좋아 하구요.

두 : 엄청난 활동력의 비결이군요.

배 : 제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요, 어느 순간에 일을 만들고 있고 사람들을 일하게 만들고 있어요. “야, 그거 진짜 재밌겠다. 그럼 우리 이거 해보지 않을래? 그래 이건 내가 하고 저건 네가 하고. 응응 와 진짜 재밌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러죠. “개굴이랑 같이 있다 보면 내가 어느 순간 일을 하고 있어!” (웃음) 나쁘게 보면 일중독 기질이 있기도 해요. 제 스스로 주의해야 할 기질이라 생각해요.

두 : 혹시 소모되는 느낌이 있지는 않아요? 쓰인다는 거는 닳는 것이기도 하니까.

배 : 글쎄요, 제가 해왔던 일이 다 혼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 일이었으니까 소모되는 느낌은 아니에요. 가끔 길게 보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해요. 지금의 과제는 이거죠. ‘지치지 않기!’
2005년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떠나면서 처음으로 좀 헛헛한 느낌이 왔어요. 그래서 그때 나를 여유롭게 해주는 뭔가가 필요했어요.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걷는 시간을 가지면서 극복했어요. 그때의 경험이 나이 들면 서울을 벗어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자연과 벗하는 삶을 고민하게 됐죠.
요즘은 쉬기 위해 가끔 거짓말도 해요. 옆에서 바쁜 게 보이는데 쉬러 간다고 하면 미안하니까 그냥 거짓말해요. 일 때문에 가는 것처럼. 근데 웃기는 거는 그게 별로 죄책감이 안 들어.(웃음)

두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배 : 저는 6개월 이상의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어요. 6개월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어려서부터 마흔 살 이상 살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게 버릇이  되다보니 긴 계획은 세울 필요가 없었어요. 대학 때는 학기 중에 열심히 돈 벌어서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모든 삶이 6개월 단위로 돌아갔어요.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6개월 단위로 계획하고 살기.

두 : 막연한 미래보다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는 뜻이죠?

배 : 네. 그래서 저는 보험, 적금, 이런 거 안 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나는 아프면 국민 건강보험 앞에 가서 농성할거야” (웃음) 어느덧 내년이 마흔이에요. 지금도 장기 계획은 전혀 없어요. 엄마나 언니가 저 대신 들어준 연금보험이 있어서 나중에 얼마간 나오기는 한다던데, 그거 말고는 전혀.

두 : 당분간은 ‘들’ 일에 매진하시겠네요.

배 : 네. 무슨 일을 해도 10년은 해야지 밭을 일궜다는 느낌이 들어요. 활동해 온 경험으로 알고 있는 거죠. 6개월 이후 무엇을 할지 계획하지 않아도 다른 일을 갑자기 선택하게 되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거. 지금까지 해온 일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거고요.
사랑방에 10년 있었고. ‘들’을 2008년에 만들었으니 또 한 십 년 걸리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 다음에는 귀촌이 꿈이에요. 그래서 농사짓는 친구들, 지역운동 하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만나고 있어요. 활동하다 보면 각 지역에 친구들이 많이 생겨요. 귀촌도 꾸준히 준비해야겠더라구요. 꾸준히 만나면서 앞으로 살아갈 구상을 하는 게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계획이죠.

두 :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눠 주어 고마워요. 또 일하러 가신다구요?

배 : 네, 월요일부터 교사 대상 연수가 있어 그거 준비하러 가요. 저도 두리번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는 술을 한 잔 해요. 오늘 재밌었구요, 나중에 두리번 이야기도 듣고 싶네요.

 

총총히 사라지는 배경내 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체벌과 두발 단속은 학생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우받고 있다는 증거’라던 배경내 씨의 말을 되뇌어 본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를 외치는 10대 소녀들이 성인 남성들에게 ‘섹시하다’는 경탄을 받는 사회에서, 청소년이기 때문에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치마 길이와 머리 모양을 단속받아야 하는, 이 모순의 시대에 교사로 살아가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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