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 앞에서 

                                   송경동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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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새 소리


백석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AND






아구찜 요리


최승호



  아구는 안 보이고 양념이 산더미 같은 아구찜, 버얼건 양념을 드세요, 얼큰한 양념을, 온갖 양념들이 당신의 이목구비를 버무리는 세상이니, 아구찜을 먹으세요, 죽어서도 침 흘리는 고기, 아귀처럼 아귀아귀 먹으세요, 당신도 독한 아귀 세상 매운 사람이 되세요.














AND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을 읽으며 꼭 울고 마는 이유.


당신의 모든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의 마지막 순간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신의 마지막은 어떻게 된 걸까,
나와 당신의 마지막은 왜 그렇게 엉망이었나,
당신도, 혹시, 어딘가에서, 계속 나에게로 돌아오는 중은 아닐까,
나는 이제 예전의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은데, 혹 당신이 나를 찾지 못한다면 어쩌나.
혹 내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쩌나.
그때가 되어도 내가 당신을 거절하면 어쩌나.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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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훼손하면 안 되지만,
이렇게 끊어읽을 때 더 좋기에
굳이 행을 나누어 적어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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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마지막에 소개해 준 세 편의 시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  황지우, '뼈아픈 후회' / 마종기, '3. 대화'


사랑으로 나는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김정란의 시, 참 한구절 한구절 좋아하는 시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라는 말을 자꾸만 곱씹게 돼요. 아들인 세계 - 즉 내가 가꾸고 만들어 내는 세계, 그리고 지아비인 세계 - 싫어도 살아야 하는 곳으로서(이부분에서 다들 폭소)의 세계. 이런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해요. 이렇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구나. 그리고 나의 상처를 그저 겸손히, 세계와 함께 포개어 생각하면서, 아프고 불행한 세계를 함께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마종기 시인 참 좋아하지만 나는 이 '대화'라는 시를 보고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났던 어릴 적, 이미 어둠이 깔렸는데도 오시지 않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등불을 켜고 기다리면서 어둠과 빛은 경계가 없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죠.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는 그렇게 그냥 함께 있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어둠의 세계를 밝히는 등불은, 항상 밝게 타는 건 아니잖아요. 꺼지기도 하는거죠. 그렇지만 밝게 타오르도록 심지를 돋우고 꺼지지 않게 등불을 돌보는 건, 결국 자신이 아닌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꾸는 등불.

제가 해고가 되었잖아요? 옆에서 복직이 힘들거라고들 합니다. 솔직히 걱정도 돼요. 두렵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냥 이렇게 등불 밝히면서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요." 



>>>그러면서 이걸 읽어주었다. 엠비씨 노조 카페에 올렸다는 글


빛과 어둠에 대하여

 그러니까 어린 날, 꼭 이맘때였습니다.
들일 나간 부모님은 사방(四方)이 캄캄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당신들은, 손에 잡은 연장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만 일하자, 분명 그러셨을 것입니다.

 예닐곱 살 저는 서둘러 남포등에 불을 켜 툇마루 기둥에 걸었습니다. 어둠이 무서워서였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곤 마루 끝에 서서, 마당과 울타리, 또 그 너머 골목 쪽을 두렵게 바라보았습니다. 등(燈)빛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마당도 채 밝히지 못했습니다.
 어둠은, 스무 발작도 안 되는 마당 끝에 짐승처럼 산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제가 건 등(燈)은 고작 작은 빛의 동심원을 기둥 주위에 그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빛은 어둠에 갇혀 있었고, 아이는 또 빛에 갇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빛 밖으로, 그 어둠속으로 한 발작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빛과 어둠의 경계는, 넘기 힘든 공포(恐怖)의 선(線)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등(燈)빛 밖으로 조금씩 발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빛과 어둠의 구별이라는 게 사실은 아주 작은 차이이며, 그 경계를 넘는 것 또한 한 순간의 두려움일 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빛 속에서 보는 어둠, 어둠 속에서 보는 빛. 빛도 하나의 어둠이고, 어둠도 또 하나 빛의 세계입니다. 부모님은 어두운 밭이랑을 오가며, 칠흑(漆黑)속에서 한참을 더 일하고 돌아오셨습니다.

 조합위원장인 제가 결국 해고(解雇)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조합에 짐이 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담담하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나아가고자 합니다.
 어둡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어린 시절을 결코 상처로 기억하지 않듯, 이 시절의 많은 것들도 훗날 행복하게 추억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6.10   이근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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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조세희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러 갔을 때, 조세희 선생님은 '빵과 장미'의 이야기를 해 주시며 이제 여러분에게 '빨간 장미 한 다발'씩을 안겨주겠노라고. 희망을 안고 살으라고 하셨었는데, 이근행 위원장은 등불 하나 밝혀 주었다. 내가 심지 돋우고 기름 갈아주어야 할 등불. 




>>> 그리고 강연에서의 말,말,말,


"입사 면접 당시, 중앙일보에서는 3당 합당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내 양심대로 대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입사하기위해 거짓말할 것인가 갈등하다가 대답했다. '구국의 결단이라고 생각하며,,, 갈등보다는 화합이 필요한 시국이고...' 결국 떨어졌다. MBC 면접을 보러 갔을 때에는 전교조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선생님들의 정당한 사회적 실천이며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고는 그냥 나와버렸다. 그런데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제로 나도 사범대 출신이고, 교육학과를 나와 잠시 교사 노릇을 한 적도 있다. 아내도 교사다. 그래서 전교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방어하는 편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역부족이다. 현실에 대한 대안을 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론운동도 사실 다 죽었다. 동아일보의 '동아투위' 사건이라든지 하는 역사가 기억하는 기자들의 사회적 실천은 이제 다 옛날 얘기다. 현재 언론은 찌라시지 신문이 아니다.  신채호, 박은식이 있던 황성신문으로부터 시작된 '기자'라는 명예,도 이젠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기자는 이제 없다. 기자들이 앞서서 현실에 영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호위대다. MBC를 운영하는 방문진이나 KBS이사회 모두 최시중이 임명하는 거다. 이젠 둘 다 국영방송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손석희씨는 까칠하다. 까칠하다. 냉랭하고, 까칠하다. 정말 까칠한 사람이다. 신경민도 그렇다. 까칠한 사람이다. 사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거다. '정권도 바뀌었는데 꼭 그런말을 하고 살아야 하나'.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짤렸지만 더 행복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87년에 시청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나, 2010년에 시청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 모두 다 삽시간에 모였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87년의 사람들은? 많이들 변절하고, 방향성을 상실했다. 2010년의 젊은이들은? 에너지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들이 지도와 나침반만 제대로 갖게 된다면? 아마 큰 일이 벌어질 것 같다. 386들이 젊은 세대에 대해 비난하는 걸 자주 보는데, 흉볼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 젊은이들이 더 나을 수 있다."

"386들이 욕먹는 이유는 무식하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이념의 지도를 고수하면서, 여기에 따라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이제 한계가 있다. 이런 진보는 죽은 진보다. 이제 오늘날 운동은 제 자리에서 제 역할 다 하는 것이다. 무한도전 김태호를 보라. 이 사람이 어디 운동하게 생겼나? 그런데 자기 프로그램을 KBS파업현장을 배경으로 찍고 그러는 사람이다. 이제 희생/명분/국가 이런 무거운 운동의 시대는 갔다.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서의 운동, 행복한 운동, 즐거운 운동이 필요하다."

"이런 젊은이들, 다 누가 만들어냈나? 나는 이것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교사들이라고 본다. 교사들 너무나 중요하다. 부모는 못하는 일을 교사들은 할 수 있다."

AND

'3. 대화'

카테고리 없음 2010. 10. 25. 16:12



3. 대화 

마종기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지성사,1980)-


금요일, 해직된 MBC 노조위원장 이근행 씨의 강연에서 소개받은 시.
세 개의 시를 소개받았는데 다 참 좋았다.
그 중에서도 세번째 시.

아, 이 시는 눈물이 나서,
앞으로도 평생,
낭독은 못할 것 같다.


AND




조이미용실
 

김명인


늦은 귀가에 골목길을 오르다보면

입구의 파리바게트 다음으로 조이미용실 불빛이

환하다 주인 홀로 바닥을

쓸거나 손님용 의자에 앉아 졸고 있어서

셔터로 가둬야 할 하루를 서성거리게 만드는

저 미용실은 어떤 손님이 예약했기에

짙은 분냄새 같은 형광 불빛을 밤늦도록

매달아놓는가 늙은 사공 혼자서 꾸려나가는

저런 거룻배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이

허술한 내 미(美)의 척도를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몇십년 단골이더라도 저 집 고객은

용돈이 빠듯한 할머니들이거나

구구하게 소개되는 낯선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소문난 억척처럼

좁은 미용실을 꽉 채우던 예전의 수다와 같은

공기는 아직도 끊을 수 없는 연줄로 남아서

저 배는 변화무쌍한 유행을 머릿결로 타고 넘으며

갈 데까지 흘러갈 것이다 그동안

세헤라자데는 쉴 틈 없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얼마나 고단하게 인생을 노 저을 것인가

자꾸만 자라나는 머리카락으로는

나는 어떤 아름다움이 이 시대의 기준인지 어림할 수 없겠다

다만 거품을 넣을 때 잔뜩 부풀린 머리끝까지

하루의 피곤이 빼곡히 들어찼는지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저렇게 쏟아져나오다가도

손바닥에 가로막히면 금방 풀이 죽어버리는

시간이라는 하품을 나는 보고 있다!




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03&pID=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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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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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이 비싼 음식이나 장난감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모도 결핍되어 있다. 부모가 생계로 바쁘거나, 혹은 생계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아이들을 버려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다. 특히 어머니는 더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아직 미성숙한 상태의 아이에게, 부모의 부재는 생존이 위태롭다고 느낄 만한 일일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버려두는 매 순간은 아이의 삶에 깊이 상처를 남긴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은 시장에 장사를 나간 어머니를 혼자서 기다리던 때의 깊은 절망감을 노래한 시다. 해는 벌써 졌고, 금이 간 창 너머에서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는데, 아이는 혼자 방에 남아서 엎드려 울고 있다. 조그만 기척 소리에도 혹시 어머니인가 하고 돌아보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이때의 아이의 간절한 마음과 반복되는 절망감이 ‘안 오시네’, ‘안 들리네’와 같은 되풀이되는 문장들로 절절하게 나타나있다. 아무리 도리질을 하려고 해도, 아이에게는 ‘영영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무서운 생각이 점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혼자 남겨진 아이로서의 서러움이 극대화되는 부분은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라는 부분이다. 아마도 방 안에는 배고프면 먹으라고 이불 밑에 묻어 두고 간, 그렇지만 이미 식어진 ‘찬밥’이 남아 있었을 테다. ‘찬밥취급’이라는 관용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볼 때, 화자의 혼자 남겨진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과 버려졌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서러운 마음을 ‘찬밥처럼’이라는 말처럼 적절하게 나타내기는 쉽지 않다.

   연을 달리하며 화자는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된다. 그렇지만 이 어른에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때의 절망감과 서러움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 기억은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춥고 외롭고 쓸쓸한 부분, 즉 ‘윗목’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의 윗목’은 하나씩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유년 시절의 아이에게 부모와의 관계는 세계의 전부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억은 생애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누구든지 부모님에 관련된 서운하고 쓸쓸한 기억을 하나쯤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이름붙일 적당한 말을 찾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 나에게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년의 윗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혹시 아직도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을지 모를 아이를 끌어안아 주며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쓰다듬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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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로 꾸역꾸역 쓰는 글들
자꾸만 누군가를 닮아가는 문장들
깔때기처럼 비슷해지는 결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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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일획을 긋는 도박(賭博)이자 도반(道伴)이었을 것이다


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04&pID=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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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 꽃과 잎의 믿음
눈과 비의 훼방
그리고 담이라는 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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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로 읽은 책, 숙제로 쓴 글

개인의 탄생

근대 사회가 도래했다. 공동체 단위의 생활의 무너지고 개인의 삶이 전면에 떠오른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던 사회에서 개인에게 모든 판단이 맡겨지는 사회로 변모한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이 되고, 개인의 선택의 영역이 점차 넓어진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니까. 그런데, 선택의 자유가 골치아프다 여기는 젊은이들은 ‘왜 사랑이 변하느냐’, ‘왜 종교를 믿어도 구원 받지 못하느냐’, ‘청춘이 아름답기는 개뿔’, ‘그저 돈이 최고다’라고 외치며 ‘고민하기’를 중단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단지 머리를 ‘굴리’는 데에만 능수능란해진다. 이들은 공동체적인 가치를 배격하며 철저히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기를 중단하였으므로 더 이상 개인다운 개인은 아니다.

 

숙고의 권리와 의무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현대인의 고단한 삶을 나타낸 말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이고, 양자 혹은 다자 사이에서 숙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것도 모두 개인이 믿기로 선택하기 나름이다. 돈을 최고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도, 돈을 숭배하는 것은 천박한 물질주의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자유다.

현대인에게는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 숙고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숙고할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지쳐 이 자유를 돈이나 종교, 혹은 권력에 반납하곤 한다.

저자는 현대인이 자신의 삶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는 이 자유를 반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숙고할 수 있는 권리를 끝까지 자신의 것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숙고하는 자세는, 현대인이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한 의무이다.



고민의 방향은 나를 넘어선 관계를 보는 것

저자가 고민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계속해서 함께 강조하는 것은 ‘관계’다. 자아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도 자아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종교의 의미도 사실은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관계들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대한 문제라고 역설한다. 일을 하는 의미 또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랑 또한 관계를 맺어가는 여러 가지 색깔의 방식이라고 한다.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그의 삶에 대한 질문의 방식이라고 말하자고 한다.

현대인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면서 놓치고 있는 ‘가치’의 문제를 저자는 ‘관계’라는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으로 읽혔다. 나의 욕망과 욕망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현대인들. 그렇지만 나 자신이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생각이 방향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개인이 아닌, 성숙하고 열린, 인간다운 ‘고민’을 하는 인간들의 숲. 저자가 꿈꾸는 것은 그런 사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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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37 자아라는 것은 자존심이기도 하고 에고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기를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타자 또한 비슷한 자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겉으로는 참고 견디고 진짜 자기는 감추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워 완전히 자기 속에 파묻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질주하는 자기를 멈춰 세우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받지도 못해 악을 쓰며 비명을 지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비대해지는 자아를 멈추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정신병리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카를 야스퍼스가 한 말입니다.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를 사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의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 .... 그 이유를 궁극적으로 말하면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49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말은 그 과정에서 '국가 내에 무수한 벼락부자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대에서 사업을 일으켜 입신출세를 이룬 이른바 신흥 부르주아의 출현이 그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극도의 헝그리 정신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넌더리가 나는 배금주의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치관이 기세 좋게 세계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52 시대를 밑바닥부터 만든 세대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이 국가가 발전했어'라는 만족스러운 감정이 있습니다. 사회에 여러 가지 모순이 발생해도 스스로 그 사회 건설의 당사자라는 점에서 큰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진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충실한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순만 눈에 들어와 그것을 만든 세대에 대해 불만을 가집니다.

55 막스 베버는 이 점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런 문화 발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마지막 사람들 letzte Menschen'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이들은 인간성이 과거에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이미 올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할 것이다.'"

65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 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는 같지 않습니다.

85 <산시로> 속에 매우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시로가 열차에 투신자살해 몸이 잘린 젊은 여성의 시체를 보는 장면입니다. ... 나중에 나쓰메 소세키가 "청춘이란 밝은 것이 아니고 한 꺼풀만 벗기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혹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22 나 스스로 '나는 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면 결국 '타자로부터의 배려를 원하기 때문에'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지위나 명예는 필요없다고 말하면 거짓이 될 터이고 돈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큰 것은 타자로부터의 배려입니다. 그것을 통해 사회 속에 있는 자기를 재확인할 수 있고,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감과도 관계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합니다.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136 사랑은 계속 모습이 변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둘 사이에 물음이 있고 서로 그 물음에 대해 반응할 의지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160 과거에 '노인'이 지니고 있던 힘은 사회의 폭주를 막아 주는 이른바 '안전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세대가 좀 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사회의 안전판 역할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보다 '분별 없는' 노인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누군가 나에게 요즘 시대 '노인의 힘'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교란하는 힘'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 노인의 '교란하는 힘'은 생산성이나 효율성, 젊음과 유용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까지의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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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찬양함    

베르톨트 브레히트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 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여라!
당신들이 현명하여 너무 믿을만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었다.

역사를 읽고 무적의 군대가
혼비백산 도주하는 것을 보아라.
곳곳에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되고
출범할 때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던
무적함대가 돌아올 때는
몇 척 안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인가 사람이 올라갈 수 없었던 산봉우리 위에 한 사나이가 올라섰고
끝이 없다고 믿었던 바다의 끝에
한 척의 배가 도달했다.

확고 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
구할 길 없어 포기한 환자에 대하여
오 과감해라, 의사의 치료는 !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 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

오, 얼마나 힘들여 하나의 교리는 쟁취되었던가 !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
이것은 꼭 이러한 것이지 대충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웠던가 !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교리를 지식의 비망록에 써 넣었다.

아마 오랫동안 그것은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많은 세대가
그것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것을 영원한 지혜로 알고
전문가들은 그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에 불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경험이
그 교리에 의혹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뒷날 신중하게 어떤 사람이 지식의 비망록에서
그것을 지워버린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명령을 받으면서, 수염을 기른 의사들에게
자기의 유용성 여부를 검사 받으면서, 황금빛 훈장을 단
눈부신 인사들에게 검열을 받으면서, 하느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을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엄숙한 목사들의 경고를 받으면서,
참을성 없는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일한다.
자기가 살집을 짓는 남자도 땀을 뚝뚝 흐르면서 고된 일을 한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화능력은 놀라웁고, 그들의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참을성은
한계가 없다. 논쟁을 할 때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을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 깊은 사람들이 만난다.
이 생각 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
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
이 일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들의 활동은 우유부단함을 본질로 한다.
그들이 애용하는 말은, 아직도 결단을 내릴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당신들이 의심을 찬양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은 찬양하지 말아라 !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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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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