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도 끝나고 학기도 끝나고 방학이 왔는데
내 책상에는 기말 수행평가로 걷은 학생들 노트가 아직도 산더미다.
아까워서 돌려주지를 못하고 있다.

1학년들은 매 수업시간이 시작되면 한 사람씩 나와서 자신이 골라온 시를 낭송하고 감상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다.
학생들은 발표자가 나누어준 시를 노트에 붙이고 남은 빈 칸에 자신의 감상을 적는다.
학기 말이 되면 학생들마다 서른 대여섯개의 시와 시 감상이 빼곡히 찬 노트가 걷힌다.
노트는 학생들이 붙인 시와 눌러쓴 감상글로 울룩불룩, 나달나달해져 있다.

학기 초에 이 수행평가를 설명하면서 언니들이 작년에 썼던 노트를 보여주면 아이들은 기가 질린다.
빼곡하게 노트를 채운 감상글을 자신들은 절대 못 쓰겠다며 도리질을 한다.
쓰면 다 읽어는 보냐고 물어보고, 내가 '난 니네 글 읽는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하면 반신반의한다.
그리고 점수를 잘 받겠다고 경쟁적으로 무슨 이야기든 써나가기 시작한다.
개중에는 열심히 쓰고 싶지 않아하는 아이들도 있다.

중간고사 끝나고 노트를 한번 걷는다.
정말 성실히 과제를 하느라 땀흘린 것이 보이는 학생도 있고
이 기회에 글 솜씨를 뽐내는 학생도 있고
스트레스 푸는 용도로 감상 공간을 활용하는 학생도 있고
잘 하고는 싶은데 잘 안 돼서 이 얘기 저 얘기 중구난방 쓰다가 그림을 그리는 학생도 있고
또 아예 시를 붙이는 일도 제대로 안 하는 학생도 있다.
선생 욕 부모 욕으로 가득한 글을 쓰는 학생도 있다.
솔직히 한줄한줄 모두 읽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읽노라고 읽는다. 
그리고,
어떤 학생이든 두세 문장으로 손수 글을 써서 피드백을 해 준다.
비난하지 않고. 쉽게 평가하지 않고.

중간고사 이후에는 글쓰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자기는 조금 써서 선생님이 글을 짧게 써준 것 같다며 쓰는 데 열을 내는 학생도 있다.
이런 얘길 쓰면 선생님이 나를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재밌게 읽었다고 하니 고맙다고 하는 학생도 있다.
틈틈이 쓰라는 얘기였는데, 자습시간에 일을 삼고 노트를 쓰는 학생도 있다.

기말고사에 노트를 걷으면 글의 질과 양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다.
성의없게 썼던 학생들이 성의있게 쓰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염세주의로 가득한 글을 썼던 학생들은 더 신나서 세상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번엔 그림 안 그리려고 했는데 또 그림 그려서 미안하다고 하기도 한다.
지난 번에 썼던 피드백에 답장을 써놓은 학생들도 있다.
못 읽고 지나갔다가 학생이 상처받으면 어쩌나 싶은 고백을 써놓은 학생들도 있다.

내가 한 것은 단지 그 학생에게 두세줄의 글을 써 준 것밖에 없는데
아이들은 교사 혹은 어른의 이런 작은 성의에도 크게 반응해준다.
기말고사에는 그만큼의 답장을 해주지 못한다.
성적처리가 바빠서이다.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대답은 한두자리의 숫자다.
고맙고, 또 그만큼 더 미안하다.
그래서 돌려주지를 못한다.


AND

 
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

                                           최 정 례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개 있다
      파리바게뜨,엠마
      김창근베이커리,신라당,뚤레쥬르

      파리바게뜨에서는 쿠폰을 주고
      엠마는 간판이 크고
      김창근베이커리는 유통기한
      다 된 빵을 덤으로 준다
      신라당은 오래 돼서
      뚤레쥬르는 친절이 지나쳐서

      그래서
      나는 파리바게뜨에 가고
      나도 모르게 엠마에도 간다
      미장원 냄새가 싫어서 빠르게 지나치면
      김창근베이커리가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땐
      학교에서 급식으로 옥수수빵을 주었는데
      하면서 신라당을 가고
      무심코 뚤레쥬르도 가게 된다

      밥 먹기 싫어서 빵을 사고
      애들한테도
      간단하게 빵 먹어라 한다

      우리 동네엔 교회가 여섯이다
      형님은 고3 딸 때문에 새벽교회를 다니고
      윤희 엄마는 병들어 복음교회를 가고
      은영이는 성가대 지휘자라서 주말엔 없다
      넌 뭘 믿고 교회에 안 가냐고
      겸손하라고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라며
      내 귀에 테이프를 꽂아 놓는다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교회가 여섯 미장원이 일곱이다
      사람들은 뛰듯이 걷고
      누구나 다 파마를 염색을 하고
      상가 입구에선 영생의 전도지를 돌린다
      줄줄이 고기집이 있고
      김밥집이 있고
      두 집 걸러 빵냄새가 나서
      안 살 수가 없다
      그렇다
      살 수 밖에 없다


-------------------------------------------------------------

며칠 전 끼니를 때우기 위해 파리바게뜨에 갔는데
아 글쎄 그 동안 파리바게뜨를 얼마나 애용했는지
꽤 많은 빵을 살 수 있을 정도의 포인트가 쌓여있었다.

나는 내가 그 빵집에 그리 자주 가는지 몰랐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집 전철역 앞에도 학교 앞에도 파리바게뜨가 있고 
심지어 얼마 전에는 학교 앞 파리바게뜨 아주머니가 날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인사를 받던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위 시는 얼마 전 시인이 학교에 와서 강연을 했을 때 조각난 모양으로 소개해주었던 시다.

학생들 내일 점심을 위해
또 파리바게뜨에서 80인분을 주문해놓고 나니
'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라던 이 시가 생각이 나서 검색을 해서 전문을 읽었다.

육신의 배고픔은 빵집으로 채우고
영혼의 배고픔은 교회에서 채우고
배고프지 않느냐며 빵집에서는 쿠폰을 발행하고
교회에서는 전단지를 뿌려가며 사람을 끌어모으고
이렇게
허기를 채우기 위해 도시를 헤매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AND



말의 힘

황인숙

 
기 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 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AND



When I born, I Black
When I grow up, I Black
When I go in sun, I Black
When I scared, I Black
When I sick, I Black
And When I die, I still Black
And You, White fellow
When you born, you Pink
When you grow up, you White
When you in sun, you Red
When you cold, you Blue
When you scared, you Yellow
When you sick, you Green
And When you die, you Gray
And you calling me Colored?


태어날 때 내 피부는 검은색
자라서도 검은색
태양 아래 있어도 검은색
무서울 때도 검은색
아플 때도 검은색
죽을 때도 나는 여전히 검은색이죠.
그러데 백인들은
태어날 때는 분홍색
자라서는 흰색
태양 아래 있으면 빨간색
추우면 파란색
무서울 때는 노란색
아플 때는 녹색이 되었다가
또 죽을 때는 회색으로 변하잖아요.
그런데 백인들은 왜 나를 유색인종이라 하나요?

by an Anonymous pupil of King Edward VI School, Birmingham, UK.

Found in The children's book of poems, prayers and meditations ed. Liz Attenborough (Element Books, 1989)


AND



'가본 적 없는 당신 마음의 먼 산'
'되돌아오는 샌드백'
등으로
연애의 차가운 단면을 보여준 연애시 두 편.




채호기

당신의 눈에서
사랑의 눈이 펄펄 내립니다.
눈은 쌓이지 않고 대부분
가슴에 깨끗이 스며듭니다.

당신이 가본 적 없는 내 마음의
먼 산에도 눈은 쌓이겠지요.
나는 도심의 한가운데서
흰곰처럼 웅크린 먼 산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물기 어린 눈에서
눈이 내리고......
먼 산에 눈은 쌓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언 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흰 날개를 팔랑이며 내려와
조용한 수면에 닿겠지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사랑하는 당신의 눈에서
사랑의 눈이 내립니다.
내 마음에 자국도 없이......

사랑의 함박눈이 내리고
내가 가본 적 없는 당신 마음의
먼 산에도 눈은 쌓이겠지요.

당신과 내가 이렇게
함께 따뜻해도
눈이 쌓일수록 깊어가는 고요뿐
당신과 내가 가본 적 없는
먼 산에 눈은 쌓이겠지요.

눈 쌓인 먼 산에 가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당신과 내가 모르는
덧없는 치장일 뿐이지요.


연애의 법칙

진은영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의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AND


'꿀꺽 삼키면 속이 환해지는 알약'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어제 문득 저 문구가 떠올랐었는데,
다시 찾아 읽어보니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시로구나.

다시 읽어보니 '통증이 찾아오고 통증은 빛 같다'는 말이 좋았던 것 같다.

--------------------------


달이 걸어오는 밤

허수경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 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면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AND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 고두현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