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교사 할당제'라는 역(한)발상
(야꼬 / 언니네 회원, 교사 , duipsul@gmail.com)
지난 4월 서울시 교육청의 한 담당자로부터 교원 신규 임용에 있어 일정 비율 이상의 남성 교원을 임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언급이 있자마자, 각종 신문을 비롯한 언론들은 이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에 바빴다. 이러한 모습은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설명해야만 할,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독특한 하나의 사태이다. 왜 그들은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 속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갖가지 다른 사례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골프장 캐디, 요식 업소의 수많은 여성들, 3교대에 시달리는 간호사들, 밤거리를 밝히는 유흥업소들 -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이미 사회 분업 구조가 심각하게 성별화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교사직의 여초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를 건너 뛴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 분야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며) ‘권고되어온’ 분야이자 (그래도 다른 곳보다 차별이 덜 하다는 이유로) ‘선호되어온’ 분야이다. 남교사 할당제 논의의 부상은 이러한 장래 희망으로서의 교사직에 대한 성별화된 인식차, 노동시장에 대한 여성의 접근도와 같은 사회적 조건을 한편으로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여성 할당제에 대한 의도적 오독 및 교육에 대한 가부장적 개입을 엿볼 수 있다.


소위 ‘할당제’라 불리는, 차별적 조건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채용목표제는 구조적 차별에서 기인한 제도이며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평등한 조건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 현재 공직 분야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도입되어 있는 여성 할당제는 여성이 직업 선택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남교사 할당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은 특정한 차별적 조건을 전제하거나 근거에 둔 것이 아니다. 오직 교직에 있어서의 성별의 수량적 차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이유 없는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현 교원의 성별 비율에 있어서의 수량적 차이는 성별화된 전체 분업 구조 차원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여성에 의한 남성의 차별의 결과일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남교사 할당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수량적 차이를 원인으로 하는 잠재적 문제점들, 혹은 아이들에게 닥칠 재앙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자신의 논리를 보충하고자 시도한다.


이들은 우선 아이들 세대의 교육에서 성역할 모델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휩싸인 그들의 시선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역할 모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여자 아이에게는 가정 교과를 가르치고 남자 아이에게는 기술 교과를 가르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최근에서야 삭제되기 시작한, 성역할 구분적인 각종 삽화들 - 앞치마를 입은 어머니와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들, 간호사 언니와 의사 아저씨들로 뒤덮인 병원의 그림들을 다시 교과서에 실어야 할 판이다. 7차 교육 과정의 도입 및 위와 같은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남녀의 성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전수되어야 할 문화가 아닌, 극복하고 바꾸어 가야 할 대상이라고 합의 셈인데, 지금에 와서 금세 남자아이들이 남자답게 자라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아이의 완성된 정체성의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전제 하에 교육 과정에 있어서의 아버지의 부재를 한탄한다. 그러나 백번 양보하여 그들의 말이 맞다 하더라도, 학교는 그들의 말대로 전문적 교육을 하는 공간이다. 교수 활동은 교원의 전문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지, 교수자의 성차에 따라 나누어지지 않는다. 교수 활동이 교수자의 성차를 전제해야만 한다면, 교육 과정은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개의 성별에 따라 두 개의 과정으로 분리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남교사 할당제는 개선된 교육 과정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며, 교육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성차별적인 주장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억지스런 근거들을 들이대면서까지, 그리고 차별적 조건을 완화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의 의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제기되고 있는 이 남교사 할당제가 제기되고 있는 근원적 이유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회가 공무원 중심으로 돌아간다지만,,, 자지 달고 태어나서 남자가 진짜 어린 것들하고 뭐할라고 교사 하냐,, 쯔쯔쯔,,,,, 에유,,, 남들이 가니깐 다들 흘러가는거냐,, 한심한 것들,,공부해서 몸값키워 대기업 들어가라,, 꼴통들,,쯔쯔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시한 남교사 할당제에 대한 찬반을 묻는 여론 조사의 아래에 달린 댓글 중 하나이다. 위 댓글은, 남성이 초등학교 교원직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과거의 사회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아들은 대학에 보내고 딸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으로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은 법대에 보내고 딸은 ‘사범대에나 보내는 게 제일’이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저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 댓글의 말마따나 ‘공무원 중심’ ‘공무원 완소’ 시대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물으면 ‘7급 공무원’을 써내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아들이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를 써내면 노벨상 타라고 격려하고 ‘공무원’을 써내면 꿀밤을 먹였던 때와는 다른 시대가 된 것이다. 한 신문에서는 남교사 할당제의 문제를 밥그릇 문제로 보고 민감하게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교육적 관점에서 그 타당성을 인정하라는, 자못 훈계조의 사설을 실었지만, 이 문제에 불을 붙인 도화선은 결국 ‘교육 문제’가 아니라 ‘취업 문제’에 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 채 교육적 관점만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는 이미 고착화된 차별적 조건들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였다. 여성운동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을 벌였던 것은,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시적인 조치를 통해서라도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먹고 살기가 각박해지니 ‘양성평등’이라는 낱말을 의도적으로 오독하기를 서슴지 않고, ‘차별적 조건 완화’를 위해 투쟁으로 쟁취한 여성 할당제의 당초의 취지를 왜곡하면서까지 수량적 동일함을 내세우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최근의 경향은 몹시 괘씸하다. 특정 집단의 사회적 진출을 배제하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성이 교직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사회적 장벽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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