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을 ‘교권’문제로 보면 대책이없다

[좌담] 여교사 성추행 동영상이 남긴 것
 
여성주의 저널 일다 우완


<여러 남성이 한 여성을 둘러싸고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귀자’고 종용한다. 이를 피하려고 여성이 자리를 옮기자, 놀려대며 다시 에워싸고 팔을 잡는다. 그리고 이 상황을 카메라로 찍어 외부에 공개한다.>
 
이 런 일이 발생했다면, 누가 보아도 명백한 성추행이다. 그런데 이 일이 교실에서 남학생과 여교사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로, 성추행이나 성희롱이라는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워진다. 위 상황 속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남성-여성 간의 ‘성별 권력’ 관계를 우리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탓이다. 하지만 성별 권력관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사건의 본질이 은폐될 수밖에 없다.
 
사 회를 떠들썩하게 한 소위 “여교사 성희롱 동영상” 사건 이후 오가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교실 성폭력 예방하기 위한 방법’보다는 침해 당한 ‘교권’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때마침 추진 중인 ‘교내 휴대폰 사용금지 조례’ 제정움직임과 맞물려, 교권회복 목소리는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철 지난 논쟁인 ‘남교사 할당제’를 도입하자는 말도 나온다.
 
‘성별 권력권계’라는 본질 은폐해선 안돼
 
▲ 9월 19일,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과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 여성주의팀이 모여 '여교사 성추행 동영상' 사건을 둘러싼 논의와 대책에 대한 좌담을 진행했다.
19 일, 이번 교실 성추행 사건을 다시금 살펴보고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필자가 속해 있는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이하 교사모임)과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 여성주의팀(이하 청소년네트워크) 구성원들이 모여 대담을 진행했다.

 
우 리는 먼저 이번 사건이 ‘교권침해’사건으로 일반화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 공감했다. 교사모임의 정주연씨는 ‘교권’이 보장되던 1970~1980년대에도 “여교사에 대한 남학생들의 성희롱은 늘 있어 왔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잘못된 교실문화를 개선한답시고 학생들을 억압하거나 통제할 근거를 만들어 내는 건, “엉뚱하고 무책임한 대책”이라고 지적했다.
 
청소년네트워크 엠건씨도 “성희롱의 본질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어린애가 교사들한테 기어 올랐다는 것에만 집중된 언론의 태도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교 사모임의 조영선씨는 기존에 여교사들이 겪은 성희롱보다 이번 사건이 크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 공간에 유통시킨 것이 학교집단에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영선씨는 이 사건의 여파가 핸드폰 사용금지 조례 제정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또한 대담자들은 이번 사건이 ‘교권침해’라고 뭉뚱그려지면서, 정작 사건 당사자인 여교사 본인의 목소리는 사라져 버렸다는 점에 주목했다.
 
청소년네트워크 한낱씨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이 문제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막상 사건을 다루는 시선에서는 여성이 배제되는 일이 잦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젊은 여교사의 ‘위치’
 
사건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본인이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당당하게 나서서 이야기하기란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비정규직 여교사의 경우라면, 학교사회에서 자신의 피해를 발언하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교 사는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아니라, 다층적인 권력관계 망 속에 놓여 있는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권’이라는 말로 교사집단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기간제’로 일하고 있는 젊은 여교사인 만큼, 실제로 교직사회 안에서 이 교사의 정당한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교사모임에서는 전형적인 신규 여교사의 입장에 대해서 “아가씨 선생님”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학교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 처하게 되는 교무실의 현실은 배려와 우대, 그리고 무시와 하대가 묘하게 섞여 있는 분위기다.
 
일례로 남학생들이 있는 앞에서 “여자선생님은 약하시니까 너희들이 잘 도와드려!”라고 말하는 선배 남자교사의 ‘배려 아닌 배려’는, 학교에서 여교사의 위치를 더욱 의존적이고 나약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청 소년네트워크 활동가인 십대들도 입을 모아 ‘남자선생님들이 여자선생님들을 학생들 앞에서 귀엽지 않느냐고 칭찬한다’, ‘학교에서 남자선생님이 하는 역할과 여자선생님이 하는 역할이 따로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학교 내 가부장적 교사문화를 이야기했다.
 
성적 긴장감을 ‘가족적’이라고 포장하는 학교
 
학교운영이 가부장적 가족모델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남교사가 해야 할 역할과 여교사가 해야 할 역할을 나누어, 성별 분업구조로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한 예로 지적됐다.
 
또 한 남자교사들은 엄하게 혼내고 규율을 잡는 역할을 한다면, 여교사들은 학생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분위기도 엄연히 존재한다. ‘남교사 할당제’를 요구하는 쪽에서 ‘여교사는 엄마, 남교사는 아빠역할이니 모두 균형 있게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를 드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교 사모임의 조영선씨는 이러한 가부장적 가족모델에 기반한 학교문화가 ‘교권을 노동권으로서 당당히 인정받을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문화는 엄연히 존재하는 남학생과 여교사 사이, 남교사와 여학생 사이의 성별 권력관계, 그리고 성적 긴장감을 ‘가족적’이라고 포장하는 기반이 된다.
 
청소년네트워크의 공기씨와 엠건씨는 학교에서 담임교사와 ‘아빠와 딸’ 같은 사적인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교사가 자신의 일상생활에 대해 강한 규제를 행사하게 되어 당황했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 학교 내 교사 성추행 사건’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학교문화와 맞물려 있어, 다양한 논쟁의 지점을 던져주고 있다. 여성주의 교사모임 <삐삐 롱스타킹>과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 여성주의팀에서는 이날 논의결과를 담은 입장을 공동 발표하기로 했다.
 
‘학교 내 성폭력’ 근본적 문제제기 필요해
 
사 실 남학생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여교사의 이야기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의 고정 레퍼토리 중 하나다. 최근 여교사와 남학생 사이 로맨스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몇 번 다루어졌다. 이번 ‘여교사 성희롱 동영상’ 사건은 어찌 보면 흔한 ‘여교사 수난시리즈’의 변주곡인지도 모른다.
 
이 번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려면 학교 내 성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교장, 교감, 부장교사들이 신규교사에게 행하는 직장 내 성희롱, 남교사에 의한 여학생 성추행 문제 등도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런 논의 없이 ‘교권을 강화’한다는 것은, 학교 안의 남성적인 훈육방식을 강화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해법은 학교문화의 가부장성을 타파하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좌담이 끝나고 청소년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한 청소년이 건넨 후기다. 스스로 ‘10대 여성주의자’라고 말하는 십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경청해보자.
 
< 이번 사건이 터지고 ‘문제는 교권의 추락’, ‘인성교육 강화해야’ 등으로 몰리는 반응을 보면서, 이것이 한 여성에게 가해진 성적 폭력이란 사실엔 대부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감히 ‘교사’에게 기어오른 학생이라는 점에서, 극심한 반감을 느끼고 있을 뿐.
 
좌 담 자리에서 ‘교권의 주어는 남교사’라는 말을 듣고 이야기 나누는 동안, 이런 흐름들이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더 명확해졌다. ‘여교사 성희롱 동영상’ 사건의 대책으로 교권 신장을 주장하는 담론은 ‘누구를 위한’ 목소리인가? 적어도 이것이 학생들을 위한 목소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당사자인 교사조차 배제시킨 채 이야기가 진행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듯, 심지어 여교사들을 위한 목소리도 아니다.
 
교 권을 사랑하는 분들께 끝으로 몇 마디! 교사들이 겪는 인권침해 때문이라도 교사의 권위가 서야 한다? 교사들의 고통이 말 안 듣는 못된 학생에게서 기인한다면, 학생들의 고통은 권위적인 교사들과 억압적인 학교와 사회로부터 기인한다는 걸 무시해선 안 된다. ‘교사들의 현실적 고통이 학생들과 대립한다고 해결될 수 있느냐?’ 물었을 때, 그러한 해법은 학생들을 때려서 내 고통을 없애는 전형적인 강자의 방식밖에 안 된다는 걸 꼭 기억하시길.> 





기사입력: 2009/09/23 [00:46]  최종편집: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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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교사 모임 <만나고 싶었습니다> 두번째 모임, 뜬금없이 서정적인 발제문 2009. 2.21

   

- 여학생 가르치기의 아쉬움

by 우선생

    방금 전 한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발제문이 써지지 않아 핑곗김에 보게 된, 여성판 <죽은 시인의 사회>라 불리는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 전통 있는 명문 여대에 교수로 신규 임용된 진보적 교수 줄리아 로버츠의 이야기다. 이 신참 교수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꿈으로 품고 살아가는 학생들의 가치관에 균열을 내고 보수적인 학교 당국에 맞서 새로운 커리큘럼을 제시하기도 하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하는데, 냉담하던 학생들이 결국에는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응원한다. 학생들이 그녀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마지막 가는 길을 자전거로 따르며 배웅하는 이 장면에서, 그만 눈물이 났다.

    여학생 가르치기의 ‘아쉬움’이라는 제목은 정확히 저 눈물의 근원지를 가리킨다. 나는 가지지 못했던 순간을 그녀가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남학생들이 아닌, 여학생들이기에 더 온전하고 충만했던 기쁨의 순간들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자료로 마련한 여성의 인권을 다룬 영상을 보며 학생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나 공감의 웃음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끌어내고자 하는 그들의 고민들이 글 속에 나타난 것을 읽었을 때, 저희들끼리의 대화 속에서 문득 그들이 성장해가는 것을 느낄 때, ‘나’이기에 털어놓는 것이라 여겨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문득문득 이 아이들이 ‘내가 받았던 것보다는 나은’ 교육을 받고 있는 것 아닐까, 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기대’라는 단어가 여학생들을 이야기하면서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들을 바라보며 동지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험난한 성장기는 나와 다르기를 바라고, 그녀들의 십 년 후의 모습은 보기 싫은 나의 친구 누구누구가 아니기를 바라고, 나아가 나 자신이 학생들을 ‘다른 여성’으로 만드는 데 조금은 일조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우리가 최소한 그녀들을 흔해빠진 여자들로 길러내고 있지는 않는 것이기를, 그래서 언젠가 그들이 우리를 찾아와 함께 여성으로서의 삶을 나누는 동지로 자라주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란다.

    그렇지만 ‘아쉬움’이라는 단어가 결국 등장하고 마는 이유는 저 기대와 바람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만들기에 우리 자신이 너무도 역부족임을, 곳곳에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여학생들을 정숙하고 ‘바람직한’ 여성으로 길러내기를 요구하고, 더불어 여교사란 그런 여성으로서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은근한 압력이 학교 내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동료들 또한 그 역할 모델로서의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곤 한다. 한편 학생들은 영화 속에서처럼 ‘스위트 홈’의 여주인으로서의 꿈(그 꿈이 커리어 우먼, 혹은 오피스 레이디의 꿈이라 해도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다)에 사로잡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더 힘든 경우는 삶의 모든 의욕을 상실한 학생들이다.) 남녀 공학에선 남학생들과의 관계(권력 관계든, 연애 관계든) 속에서 왜곡된 ‘여학생다움’이 횡행하고 있거나 그들의 목소리 자체가 묻혀있기 쉽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입시 교육의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또한 존재하고, 틈틈이 분위기 잡는답시고 ‘꼰대’같은 모습도 보여주어야 할 상황이 종종 찾아오곤 한다. 우리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현실의 교실 속에는, 교사와 학생의 배움과 나눔이 오가는 아름다운 기쁨과 충만의 순간보다는 유치하디 유치한 기 싸움, 협상, 배신, 거짓말, 삐짐과 같은 것들이 더 자주 있을지도 모른다. ‘여학생들은 자주 삐져서 피곤하다’는 말은 단지 편견에서 나온 말이지만은 않다. 그들은 확실히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그것은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더 많은 것을 교사로부터 기대하기 때문이다. 남고의 교무실 풍경과 여고의 교무실 풍경을 내 짧은 경험에서나마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몇몇 여학생들은 교사들과 끊임없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고, 그 관계가 본인들이 기대한 것과 다르게 진행될 때, 그들은 ‘삐짐’이라는 의사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학생들이 가르치기 피곤하다’는 말이 듣기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말을 여교사에게 들을 때 좀 더 섭섭한데, 그것은 그들이 내가 앞서 서술한 여학생에 대한 ‘기대’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인 것 같다. 삐지는 여학생들이란, 교사로부터 특별한 관계를 기대하는 학생들이고, 나 또한 그들과 특별한 관계 맺기를 바라는 교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바라는 관계와 내가 바라는 관계가 같지 않다는 데 있지, 그들이 특별한 관계를 바라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그 특별한 관계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우리의 여학생 교육은 한 마디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지금의 여학생 문화는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가 제시해야 할 새로운 여학생 주체의 모델은 무엇일까? 여교사 - 여학생 관계의 전범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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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교사 할당제'라는 역(한)발상
(야꼬 / 언니네 회원, 교사 , duipsul@gmail.com)
지난 4월 서울시 교육청의 한 담당자로부터 교원 신규 임용에 있어 일정 비율 이상의 남성 교원을 임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언급이 있자마자, 각종 신문을 비롯한 언론들은 이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에 바빴다. 이러한 모습은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설명해야만 할,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독특한 하나의 사태이다. 왜 그들은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 속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갖가지 다른 사례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골프장 캐디, 요식 업소의 수많은 여성들, 3교대에 시달리는 간호사들, 밤거리를 밝히는 유흥업소들 -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이미 사회 분업 구조가 심각하게 성별화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교사직의 여초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를 건너 뛴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 분야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며) ‘권고되어온’ 분야이자 (그래도 다른 곳보다 차별이 덜 하다는 이유로) ‘선호되어온’ 분야이다. 남교사 할당제 논의의 부상은 이러한 장래 희망으로서의 교사직에 대한 성별화된 인식차, 노동시장에 대한 여성의 접근도와 같은 사회적 조건을 한편으로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여성 할당제에 대한 의도적 오독 및 교육에 대한 가부장적 개입을 엿볼 수 있다.


소위 ‘할당제’라 불리는, 차별적 조건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채용목표제는 구조적 차별에서 기인한 제도이며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평등한 조건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 현재 공직 분야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도입되어 있는 여성 할당제는 여성이 직업 선택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남교사 할당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은 특정한 차별적 조건을 전제하거나 근거에 둔 것이 아니다. 오직 교직에 있어서의 성별의 수량적 차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이유 없는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현 교원의 성별 비율에 있어서의 수량적 차이는 성별화된 전체 분업 구조 차원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여성에 의한 남성의 차별의 결과일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남교사 할당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수량적 차이를 원인으로 하는 잠재적 문제점들, 혹은 아이들에게 닥칠 재앙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자신의 논리를 보충하고자 시도한다.


이들은 우선 아이들 세대의 교육에서 성역할 모델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휩싸인 그들의 시선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역할 모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여자 아이에게는 가정 교과를 가르치고 남자 아이에게는 기술 교과를 가르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최근에서야 삭제되기 시작한, 성역할 구분적인 각종 삽화들 - 앞치마를 입은 어머니와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들, 간호사 언니와 의사 아저씨들로 뒤덮인 병원의 그림들을 다시 교과서에 실어야 할 판이다. 7차 교육 과정의 도입 및 위와 같은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남녀의 성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전수되어야 할 문화가 아닌, 극복하고 바꾸어 가야 할 대상이라고 합의 셈인데, 지금에 와서 금세 남자아이들이 남자답게 자라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아이의 완성된 정체성의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전제 하에 교육 과정에 있어서의 아버지의 부재를 한탄한다. 그러나 백번 양보하여 그들의 말이 맞다 하더라도, 학교는 그들의 말대로 전문적 교육을 하는 공간이다. 교수 활동은 교원의 전문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지, 교수자의 성차에 따라 나누어지지 않는다. 교수 활동이 교수자의 성차를 전제해야만 한다면, 교육 과정은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개의 성별에 따라 두 개의 과정으로 분리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남교사 할당제는 개선된 교육 과정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며, 교육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성차별적인 주장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억지스런 근거들을 들이대면서까지, 그리고 차별적 조건을 완화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의 의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제기되고 있는 이 남교사 할당제가 제기되고 있는 근원적 이유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회가 공무원 중심으로 돌아간다지만,,, 자지 달고 태어나서 남자가 진짜 어린 것들하고 뭐할라고 교사 하냐,, 쯔쯔쯔,,,,, 에유,,, 남들이 가니깐 다들 흘러가는거냐,, 한심한 것들,,공부해서 몸값키워 대기업 들어가라,, 꼴통들,,쯔쯔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시한 남교사 할당제에 대한 찬반을 묻는 여론 조사의 아래에 달린 댓글 중 하나이다. 위 댓글은, 남성이 초등학교 교원직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과거의 사회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아들은 대학에 보내고 딸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으로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은 법대에 보내고 딸은 ‘사범대에나 보내는 게 제일’이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저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 댓글의 말마따나 ‘공무원 중심’ ‘공무원 완소’ 시대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물으면 ‘7급 공무원’을 써내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아들이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를 써내면 노벨상 타라고 격려하고 ‘공무원’을 써내면 꿀밤을 먹였던 때와는 다른 시대가 된 것이다. 한 신문에서는 남교사 할당제의 문제를 밥그릇 문제로 보고 민감하게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교육적 관점에서 그 타당성을 인정하라는, 자못 훈계조의 사설을 실었지만, 이 문제에 불을 붙인 도화선은 결국 ‘교육 문제’가 아니라 ‘취업 문제’에 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 채 교육적 관점만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는 이미 고착화된 차별적 조건들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였다. 여성운동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을 벌였던 것은,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시적인 조치를 통해서라도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먹고 살기가 각박해지니 ‘양성평등’이라는 낱말을 의도적으로 오독하기를 서슴지 않고, ‘차별적 조건 완화’를 위해 투쟁으로 쟁취한 여성 할당제의 당초의 취지를 왜곡하면서까지 수량적 동일함을 내세우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최근의 경향은 몹시 괘씸하다. 특정 집단의 사회적 진출을 배제하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성이 교직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사회적 장벽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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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쓴 글.


여교사에 대한 편견 부추기는 언론
‘남교사 할당제’에 보내는 찬사 우려돼
 
여성주의 저널 일다 우완

<필자 우완님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임 중입니다. -편집자 주>


지난 7일, 서울시 교육청은 초등 및 중등교원 신규 임용에서 남성 교원을 30%까지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교사가 ‘너무 많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신문과 방송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교사 ‘여초’ 현상을 뉴스거리로 다루고 있다. 여성 교사가 다수를 차지하다 보니 학생들 인성교육 면에서나 학교운영 면에서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는 ‘남성 교원 할당제’라는 제도를 마련하겠다는 목소리로까지 번졌다.

서울시 교육청의 발표가 있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주요 일간지 사설에는 일제히 찬성 의견들이 실렸다. “남성교사 적정선 확보해야”(세계일보), “남자교사 임용 늘리는 방안 필요하다”(한국일보), “남교사 비율 높일 필요 있다”(국민일보) 등이 그것이다. “교사 남녀 불균형 더 방치해서는 안 된다”(매일신문), “남성교사 임용확대 불가피하다”(서울신문) 등의 표제에서는 절박함마저 느껴진다.

여교사의 학생지도력 문제 삼다니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된다는 여성 교사 중 한 사람으로서, 이런 보도들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이렇다 할 연구나 근거 자료 없이 여성 교사에 대한 편견을 거르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은 ‘교직의 여성화’로 인해 남학생들의 성 역할 사회화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면서,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여자교사가 남학생의 특성과 고민을 다 이해하긴 힘들 것”(한국경제)이라고 단언한다.

여성 교사들이 너무 많아지면 “생리 휴가, 임신과 출산, 육아 휴직 등이 많아지면서 계약직 교사를 확보하는 것도 어려워 학교 운영이 힘들다”(중앙일보)며, 여성들이 노동현장에서 보장 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교내 폭력, 왕따, 도난 사고 등은 여교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많”고(중앙일보),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고학년 남학생을 여교사가 다루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나 폭력을 휘두르는 남학생과 여교사간 갈등”이 벌어지고(국민일보) 있다는 둥, 여성들의 학생 지도력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언론의 이 같은 보도태도에 대해 실제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한 여성으로서 통탄할 지경이다. 교육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언론이, 교육 현장에 있는 여교사들의 역할을 이렇게 깎아 내림으로 인해 어떤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여교사는 엄마, 남교사는 아빠?

이들 보도와 사설의 주장에서, 가장 주된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교직의 여성화로 인해 학생들의 전인교육 측면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는 서울시 교육청의 발표가 있은 후 “가정에는 엄마 아빠가 있듯 학교에서도 남녀 교사가 적절히 섞여 있어야 한다”고 말한 초등학교 교사의 찬성 의견을 소개했다. “아이들이 여교사는 엄마로, 남자교사는 아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초등학교 교감의 의견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아빠와 엄마로 이루어진 소위 ‘정상 가족’에서 자라야만 ‘전인교육’이 가능하다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만큼 우리 교육 현장에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 아닌 다양한 다른 가족들에 대해서 ‘비정상’ 혹은 ‘결손’이라고 보는 차별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울신문은 사설에서 “남녀의 역할 모델은 성장기 어린이, 청소년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부분”이라며, 밥그릇의 문제가 아닌 교육적 관점으로 이 문제를 접근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또한 ‘남녀의 성 역할 구분은 바람직한 것’이라는, 성 역할 고정 이데올로기를 ‘교육적 관점’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이 교육적 관점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성 역할 고정 이데올로기는 이미 우리 나라 교육 과정에서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7차 교육과정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양성평등 관점’을 도입, 각종 교과서 삽화에서는 가사를 돌보는 엄마와 직장에 나가는 아빠의 모습을 삭제하기로 했고, 사회 교과서에서는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은 고정된 것도 아니고 반드시 닮아야 할 것도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성 역할 고정관념’ 드러내는 언론

교직의 여성화를 문제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또 다른 근거로, 학교업무 진행 및 운영 면에 문제가 생긴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건을 나를 때 남자 교사가 필요”(조선일보)하고, “각종 행사 준비과정이나 수련 활동, 운동회 등에선 아무래도 남자 교사의 역할이 필요”(중앙일보)하다는 것이다. 학교에 남자 교사가 너무 적어 운동회 때면 운동장에 혼자서 줄을 긋느라 너무 힘이 드니, 어서 남자 동료를 충원해 달라는 웃지 못할 발언도 실려 있다.

만약 ‘왜 학교를 운영하는 데에 남성 교원이 꼭 필요한가’라고 진지하게 물을 경우, ‘아무래도 힘을 쓸 일이 많다’고 얼버무릴 작정인가? 그렇다면 ‘남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근력’이 필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교사로서 해야 할 여러 행정업무들은 결코 한쪽 성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혹시라도 업무 자체가 성별로 나뉘어있다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성별 분업의 문제를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개선해야 할 일이지, ‘여자가 너무 많아서 학교 경영하기 힘들다’고 성차별적인 주장을 할 일이 아니다.

이쯤에서 돌이켜 보아야 할 사실은, 교직에 여초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도 교장의 절대다수, 교감의 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이다. 남자아이들이 남성답게 자라나지 못할까봐 걱정하기 이전에, 학생들이 ‘남자는 윗사람, 여자는 아랫사람’이라는 잘못된 성 역할 고정관념과 성차별 의식을 배우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지 않은가?

교장은 ‘남성’, 비정규직 교원은 ‘여성’인 현실

만약 언론이 교육자의 성별 비율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다면, 직종 별 근로환경과 고용형태, 임금, 사회적 대우의 문제를 성별 불평등의 문제와 연결시켜 종합적으로 분석해보아야 할 것이다.

학교 ‘비정규직’ 교원의 경우 여성이 대다수이고,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의 성별비율은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왜 교육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가. 나아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교사 비율이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에 대해선, 왜 남자어린이의 전인교육 문제를 우려하지 않는가.

아직도 교육 현장에선 여성에게 폭력적인 교무실 문화로 인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여교사들이 있고, 남성 교사만을 선호하는 사립학교 재단의 편견으로 인해 부당하게 교육현장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다. 언론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알리고 공정한 시각으로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기사입력: 2007/04/12 [22:30]  최종편집: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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