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여교사 | 4 ARTICLE FOUND
- 2009.09.26 성폭력을 교권문제로 보면 대책이 없다
- 2009.06.10 나와 그녀들
- 2009.06.10 남교사 할당제라는 역(한)발상
- 2009.06.10 여교사에 대한 편견 부추기는 언론
여교사 모임 <만나고 싶었습니다> 두번째 모임, 뜬금없이 서정적인 발제문 2009. 2.21
나와 그녀들
- 여학생 가르치기의 아쉬움
by 우선생
방금 전 한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발제문이 써지지 않아 핑곗김에 보게 된, 여성판 <죽은 시인의 사회>라 불리는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 전통 있는 명문 여대에 교수로 신규 임용된 진보적 교수 줄리아 로버츠의 이야기다. 이 신참 교수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꿈으로 품고 살아가는 학생들의 가치관에 균열을 내고 보수적인 학교 당국에 맞서 새로운 커리큘럼을 제시하기도 하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하는데, 냉담하던 학생들이 결국에는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응원한다. 학생들이 그녀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마지막 가는 길을 자전거로 따르며 배웅하는 이 장면에서, 그만 눈물이 났다.
여학생 가르치기의 ‘아쉬움’이라는 제목은 정확히 저 눈물의 근원지를 가리킨다. 나는 가지지 못했던 순간을 그녀가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남학생들이 아닌, 여학생들이기에 더 온전하고 충만했던 기쁨의 순간들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자료로 마련한 여성의 인권을 다룬 영상을 보며 학생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나 공감의 웃음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끌어내고자 하는 그들의 고민들이 글 속에 나타난 것을 읽었을 때, 저희들끼리의 대화 속에서 문득 그들이 성장해가는 것을 느낄 때, ‘나’이기에 털어놓는 것이라 여겨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문득문득 이 아이들이 ‘내가 받았던 것보다는 나은’ 교육을 받고 있는 것 아닐까, 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기대’라는 단어가 여학생들을 이야기하면서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들을 바라보며 동지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험난한 성장기는 나와 다르기를 바라고, 그녀들의 십 년 후의 모습은 보기 싫은 나의 친구 누구누구가 아니기를 바라고, 나아가 나 자신이 학생들을 ‘다른 여성’으로 만드는 데 조금은 일조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우리가 최소한 그녀들을 흔해빠진 여자들로 길러내고 있지는 않는 것이기를, 그래서 언젠가 그들이 우리를 찾아와 함께 여성으로서의 삶을 나누는 동지로 자라주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란다.
그렇지만 ‘아쉬움’이라는 단어가 결국 등장하고 마는 이유는 저 기대와 바람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만들기에 우리 자신이 너무도 역부족임을, 곳곳에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여학생들을 정숙하고 ‘바람직한’ 여성으로 길러내기를 요구하고, 더불어 여교사란 그런 여성으로서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은근한 압력이 학교 내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동료들 또한 그 역할 모델로서의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곤 한다. 한편 학생들은 영화 속에서처럼 ‘스위트 홈’의 여주인으로서의 꿈(그 꿈이 커리어 우먼, 혹은 오피스 레이디의 꿈이라 해도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다)에 사로잡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더 힘든 경우는 삶의 모든 의욕을 상실한 학생들이다.) 남녀 공학에선 남학생들과의 관계(권력 관계든, 연애 관계든) 속에서 왜곡된 ‘여학생다움’이 횡행하고 있거나 그들의 목소리 자체가 묻혀있기 쉽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입시 교육의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또한 존재하고, 틈틈이 분위기 잡는답시고 ‘꼰대’같은 모습도 보여주어야 할 상황이 종종 찾아오곤 한다. 우리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현실의 교실 속에는, 교사와 학생의 배움과 나눔이 오가는 아름다운 기쁨과 충만의 순간보다는 유치하디 유치한 기 싸움, 협상, 배신, 거짓말, 삐짐과 같은 것들이 더 자주 있을지도 모른다. ‘여학생들은 자주 삐져서 피곤하다’는 말은 단지 편견에서 나온 말이지만은 않다. 그들은 확실히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그것은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더 많은 것을 교사로부터 기대하기 때문이다. 남고의 교무실 풍경과 여고의 교무실 풍경을 내 짧은 경험에서나마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몇몇 여학생들은 교사들과 끊임없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고, 그 관계가 본인들이 기대한 것과 다르게 진행될 때, 그들은 ‘삐짐’이라는 의사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학생들이 가르치기 피곤하다’는 말이 듣기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말을 여교사에게 들을 때 좀 더 섭섭한데, 그것은 그들이 내가 앞서 서술한 여학생에 대한 ‘기대’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인 것 같다. 삐지는 여학생들이란, 교사로부터 특별한 관계를 기대하는 학생들이고, 나 또한 그들과 특별한 관계 맺기를 바라는 교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바라는 관계와 내가 바라는 관계가 같지 않다는 데 있지, 그들이 특별한 관계를 바라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그 특별한 관계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우리의 여학생 교육은 한 마디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지금의 여학생 문화는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가 제시해야 할 새로운 여학생 주체의 모델은 무엇일까? 여교사 - 여학생 관계의 전범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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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서울시 교육청의 한 담당자로부터 교원 신규 임용에 있어 일정 비율 이상의 남성 교원을 임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언급이 있자마자, 각종 신문을 비롯한 언론들은 이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에 바빴다. 이러한 모습은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설명해야만 할,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독특한 하나의 사태이다. 왜 그들은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 속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갖가지 다른 사례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골프장 캐디, 요식 업소의 수많은 여성들, 3교대에 시달리는 간호사들, 밤거리를 밝히는 유흥업소들 -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이미 사회 분업 구조가 심각하게 성별화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교사직의 여초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체 노동시장의 성별 분업 구조를 건너 뛴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 분야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며) ‘권고되어온’ 분야이자 (그래도 다른 곳보다 차별이 덜 하다는 이유로) ‘선호되어온’ 분야이다. 남교사 할당제 논의의 부상은 이러한 장래 희망으로서의 교사직에 대한 성별화된 인식차, 노동시장에 대한 여성의 접근도와 같은 사회적 조건을 한편으로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여성 할당제에 대한 의도적 오독 및 교육에 대한 가부장적 개입을 엿볼 수 있다. 소위 ‘할당제’라 불리는, 차별적 조건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채용목표제는 구조적 차별에서 기인한 제도이며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평등한 조건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 현재 공직 분야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도입되어 있는 여성 할당제는 여성이 직업 선택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남교사 할당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은 특정한 차별적 조건을 전제하거나 근거에 둔 것이 아니다. 오직 교직에 있어서의 성별의 수량적 차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이유 없는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현 교원의 성별 비율에 있어서의 수량적 차이는 성별화된 전체 분업 구조 차원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여성에 의한 남성의 차별의 결과일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남교사 할당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수량적 차이를 원인으로 하는 잠재적 문제점들, 혹은 아이들에게 닥칠 재앙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자신의 논리를 보충하고자 시도한다. 이들은 우선 아이들 세대의 교육에서 성역할 모델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휩싸인 그들의 시선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역할 모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여자 아이에게는 가정 교과를 가르치고 남자 아이에게는 기술 교과를 가르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최근에서야 삭제되기 시작한, 성역할 구분적인 각종 삽화들 - 앞치마를 입은 어머니와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들, 간호사 언니와 의사 아저씨들로 뒤덮인 병원의 그림들을 다시 교과서에 실어야 할 판이다. 7차 교육 과정의 도입 및 위와 같은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남녀의 성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전수되어야 할 문화가 아닌, 극복하고 바꾸어 가야 할 대상이라고 합의한 셈인데, 지금에 와서 금세 남자아이들이 남자답게 자라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아이의 완성된 정체성의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전제 하에 교육 과정에 있어서의 아버지의 부재를 한탄한다. 그러나 백번 양보하여 그들의 말이 맞다 하더라도, 학교는 그들의 말대로 전문적 교육을 하는 공간이다. 교수 활동은 교원의 전문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지, 교수자의 성차에 따라 나누어지지 않는다. 교수 활동이 교수자의 성차를 전제해야만 한다면, 교육 과정은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개의 성별에 따라 두 개의 과정으로 분리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남교사 할당제는 개선된 교육 과정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며, 교육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성차별적인 주장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억지스런 근거들을 들이대면서까지, 그리고 차별적 조건을 완화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의 의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제기되고 있는 이 남교사 할당제가 제기되고 있는 근원적 이유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회가 공무원 중심으로 돌아간다지만,,, 자지 달고 태어나서 남자가 진짜 어린 것들하고 뭐할라고 교사 하냐,, 쯔쯔쯔,,,,, 에유,,, 남들이 가니깐 다들 흘러가는거냐,, 한심한 것들,,공부해서 몸값키워 대기업 들어가라,, 꼴통들,,쯔쯔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시한 남교사 할당제에 대한 찬반을 묻는 여론 조사의 아래에 달린 댓글 중 하나이다. 위 댓글은, 남성이 초등학교 교원직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과거의 사회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아들은 대학에 보내고 딸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으로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은 법대에 보내고 딸은 ‘사범대에나 보내는 게 제일’이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저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 댓글의 말마따나 ‘공무원 중심’ ‘공무원 완소’ 시대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물으면 ‘7급 공무원’을 써내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아들이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를 써내면 노벨상 타라고 격려하고 ‘공무원’을 써내면 꿀밤을 먹였던 때와는 다른 시대가 된 것이다. 한 신문에서는 남교사 할당제의 문제를 밥그릇 문제로 보고 민감하게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교육적 관점에서 그 타당성을 인정하라는, 자못 훈계조의 사설을 실었지만, 이 문제에 불을 붙인 도화선은 결국 ‘교육 문제’가 아니라 ‘취업 문제’에 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 채 교육적 관점만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적극적 조치로서의 할당제는 이미 고착화된 차별적 조건들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였다. 여성운동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을 벌였던 것은,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시적인 조치를 통해서라도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먹고 살기가 각박해지니 ‘양성평등’이라는 낱말을 의도적으로 오독하기를 서슴지 않고, ‘차별적 조건 완화’를 위해 투쟁으로 쟁취한 여성 할당제의 당초의 취지를 왜곡하면서까지 수량적 동일함을 내세우는, ‘남교사 할당제’를 위시한 최근의 경향은 몹시 괘씸하다. 특정 집단의 사회적 진출을 배제하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성이 교직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사회적 장벽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