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공감 | 3 ARTICLE FOUND

  1. 2010.06.26 공감과 이해, 잘못과 벌
  2. 2009.11.12 도덕감수성과 진보
  3. 2009.11.08 <도덕감정론> 서평 중에서


"감정은
1. 몸의 상태다.
2. 최초의 판단이다.
3. '생존'과 연관된 감각과 판단이다. (좋다 : 살 것 같다 / 나쁘다 : 못 살겠다)
4. 인지되지 못한다."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는 태어날 때 이미 숙성한 상태인 반면
인지 능력을 관장하는 해마체는 만 3세에 와서야 숙성된다.
인간에게 남는 최초의 기억은 만 3세 이전의 감정적 기억들이고 이것이 인간을 결정한다."

"이해받고 공감받는 경험을 해 본 아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된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자존감이 높아져야 관용적이 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한 당신이 나의 **가 되어주어 나는 **로서 참 행복해요"라고 자주 말해보자."

- 어제 교직원 연수, 감신대 안석모 교수님의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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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판단이 그 사람의 입장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입장에 따라 뒷받침 논거들이 만들어지고는 한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논리로만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생존'이 오고 가는 경험을 한 보수적 노인네들을 '논리'로만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흔히들 이렇게까지만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논리로만은 안 되고 그들을 '감동'시켜야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감동이 아닌 억지스러움만 남을 수 있다.

감동이 만들어지는 경로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하나는 상처받은 경험에서 만들어 낸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결론을 역전시킬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는데 막상 정글과 같은 사회를 만나고 받았던 심리적 충격을 보상하는 경험,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절망하고 포기하며 세운 심리적 방어벽을 깨뜨리는 경험,
이런 경험들이 감동을 만들고 사람을 바꾼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맞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은 바뀐다는 말이 맞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덕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경험이 만들어낸 심리적 습관들이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습관은 말 그대로 '습관'이어서,
이 습관과 성격이 결국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 하더라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하는 판단이 사실은 '(상처로부터 비롯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은,
인지하기 어려운 '감정'을 '단지 감정'으로 인지하게 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렵다.

이러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상처의 경험을 역전시키는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경험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지만,
'공감과 이해'의 여유를 가진 누군가가 주변에서 '의지를 가지고' 돌보아주는 것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쟤는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하는,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싸가지 없게 들리는 말을
학생들은 쉽게 내뱉는다.
그리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교사들도 많다.

그러나 그 '벌'은, 실은, 잘못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계도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쟤의 심한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당한 사람의 심리적 상처를 보상하는 과정에서 요구되고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심리적 상처의 보상은, 벌과 분리된, 심리적 상처 치유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테면 '사형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최근 자주 언급되고 있는
어린이 성추행범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의 생존본능과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는 센세이셔널한 이슈다.
일단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전문가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치유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는 전국민이다.
전국민이 입은 이 심리적 상처(생존의 위기감)는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해야 한다.
어린이 성추행범이 등장했던 사회적 맥락을 책임지고 검토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사형'은 피해자들의 심리적 상처를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해소하는 방법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많은 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벌들이 다른 학생들을 위한 전시 효과를 노리거나,
때로는 학생으로부터 '교사가' 받은 심리적 상처를 보상해주기 위해 진행된다는 점은
반드시, 열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잘못은 잘못대로 계도받되,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학생이 있다면,
그 상처받은 학생에 대한 돌봄이 필요하다.
이 학생이 자신의 상처를 '남이 벌받는 꼴'을 보며 보상받는다면
'내가 아픈 만큼 남도 아파야 한다'라는 잘못된 결론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학급이 있다면,
그 학급의 담임이 학급을 토닥여 주고 잘못의 과정에 대해 성찰해 주어야 한다.
어느 학생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 스스로 '나도 상처받는 감정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상처를 삭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괜히 '교권'을 들먹이며 '학생 인권과 교권'이 대립되는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학생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권력 집단들의 왜곡된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이다.

잘못한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변화하는 때는 언제일까?

벌을 받으며, 종종 학생이 변화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종종 '**하면 ##받으니 **하지 말아야겠군'하는 동물적 학습에 불과하다.
이건 '**'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아니다.
그 학생은 아마도 뒤에서 침을 뱉으며 학교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고 교사들을 욕할 것이다.

그런데 또 벌을 받으며, 학생이 진심으로 반성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 벌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벌을 주는 교사나 부모와의 '우연한 소통의 순간'에 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조용한 성찰의 번뜩이는 순간에 있다.

그렇다면 벌의 내용은 학생, 교사, 부모의 '소통', 그리고 조용한 '반성'에 집중되어야지
다른 행정적이고 전시적인 절차에 집중된다면 우스운 일이다.

"심한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해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며
'그 잘못 때문에 너희들이 속상했구나'라고 말해주고 그 감정은 감정대로 해소하도록 도와주어야
학생들이 이기적이고 어린애같은 보상게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과정 없이,
"그래, 걔는 이런 잘못을 해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했어. 그렇지?"라고만 말한다면
아이들은 아마도, 훗날, 제 앞가림은 잘하지만 남의 불행 앞에서는 둔감한, 싸이코패스들이 될 것이다.
'남자 친구의 배신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여자 친구가 배신해서 강간범'이 되고
'부모가 상처주었으니 나도 부모를 학대'하고
등등등.

그런데 학교는, 이 과정을 모두 다 성찰하여 학생들과 교사들을 배려하기에는 너무나 근대적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결국은,
근대적인 학교가
살인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자살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강간하는 아이들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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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인명 사전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그러니까, 이광수는, 천재고 아니고를 떠나서, 기회주의자야 기회주의자. 그래서 나쁜 거야."
"기회주의자...... 아 정말 예전에는 듣기에 무서운 말이었는데, 이젠 그 말에 대한 감각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요즘 애들은 기회주의자라는 말이 나쁜 말인 줄도 모를걸요?"
"그치. 아마 '기회를 잘 이용하는 사람'인 줄 알 걸?"
"하하하, 기회를 잘 이용하는 사람, 맞아, 아마 그런 건 줄 알 거야. 능력있는 사람."
"이런 시대이니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거지."


선덕여왕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아, 근데 선덕여왕은, 너무 사람 많이 죽어서 보기 힘들어요."
"맞아, 죽어도 꼭 목을 베고 피를 뿜으면서 죽데?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비극과 폭력을 레저로 즐기는 시대예요. 아내의 유혹 같은 게 성공하는 것도 다 그런 거지."
"게임도 다 그렇고......."
"이런 시대이니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거죠."



도덕감각, 공감능력, 따뜻한 감수성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요즘에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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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을 이타심으로 한정하여 이해한 사람은 스미스의 스승 허치슨이었다. 스미스는 스승의 생각을 비판하고, 이타심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도덕감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도덕감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동감(sympathy·공감) 능력’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쁨·슬픔·욕구·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경우 즐거움을 느끼고 그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 경우엔 불쾌함을 느낀다.

스미스는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적정성’이라고 말한다. 이타심이라고 해서 꼭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팽개치고 남을 돕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이라고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 행위도 그것이 적정한 수준이라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상상력이야말로 공감 능력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그 적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스미스는 여기서 ‘제3의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간 행위의 경험적 축적 위에서 그런 관찰자를 상정할 수 있으며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그런 관찰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관찰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도덕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스미스가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스미스는 공감의 원리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조화와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늘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질서 있게 운행하듯이, 인간의 이기심도 질서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의 이런 규명 위에서 <국부론>의 논의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기심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 사회적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따름이다.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였다. 노동과 자본이 분화되지 않고, 자본가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던 시대였다. 스미스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와 질서는 소박한 단순상품생산 시대의 목가적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이론을 노동과 자본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스미스의 ‘자유방임’ 논리를 자신들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더구나 스미스의 ‘자유방임’ 주장은 그 시대의 상업자본가들의 독점과 특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할 경우에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애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모든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철학자’가 스미스였던 것이다.


기사등록 : 2009-11-06 오후 09:01:02 기사수정 : 2009-11-06 오후 09: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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