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네 인생을 참 많이 사랑해줬어." | 1 ARTICLE FOUND

  1. 2011.01.07 "걔는 네 인생을 참 많이 사랑해줬어." 2



2004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아일랜드'에는 
에로비디오 전문 배우 '시연'(배우 김민정)과 백수 건달 '재복'(배우 김민준)이 나온다. 
'재복'이는 에로비디오 촬영 현장을 구경하러 놀러 갔다가 '시연'에게 반하고
'시연'도 '재복'의 그 마음이 좋아서 둘은 단박에 사귀게 되고,
'시연'네 가족과 함께 급, 동거한다. 

그러다 어느 잘 나가는 작가주의 감독님의 눈에 들어 '시연'은 주연 여배우로 발탁되고 
'재복'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시연'이를 떠나게 되는데 
그 '재복'이가 떠나는 걸 아쉬워 하며 '시연'의 엄마(배우 윤여정)가 '시연'에게 하는 말이 있다.

생각난 김에 대본을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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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연의 집 앞(새벽)


신문을 집으러 나오는 시연부. 기지개를 켠다. 신문을 집어 들고 의아한 듯 앞쪽을 본다.


시연부: (의아한 듯) 재복아. 너 어디가?


시연부의 시점에서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재복의 뒷모습이 조그맣게 보인다.

이때, 시연모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온다.


시연부: 시연엄마. 재복이 어디가?

시연모: (의심스런 눈으로 물끄러미 재복을 본다.) 으응? 재복아. 너 어디 가니?


#2. 시연의 집 골목(새벽)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재복. 힐끔 조그만 시연부와 시연모를 본다. 그리고 어둡게 고개 돌리며 걷는다.


재복: (걸으며 아련한 미소. 눈가가 촉촉해진다.) 어머니, 아버지. 시민아, 시채야, 시혜야, 시경아. 그리구... 우리 시연아. ... ...잘 살자.


눈가를 닦으며 파란 새벽길을 걸어 내려가는 힘찬 발걸음.


(중략)


#9. 시연의 집-시연의 방(아침)


앞 단추를 풀어 헤친 채, 열려진 장롱문을 보고 있는 시연. 한 켠의 빈 자리. 빈 옷걸이만 걸려 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연모.


시연모:  (팔짱을 끼고 째려본다.)

시연 : (시연모를 본다.) 왜 이러셔?

시연모 : 좀 떴다구, 줄창 외박이네? 뜨면 외박하니?

시연 : ...그렇게 되네?

시연모 : 그르니까 재복이가 삐져서 집을 나가지. 잘 달래서 델구 들어 와.

시연 : (냉정하게) 나갈 때가 됐으니까, 나갔지.

시연모:  ...

시연:  ...

시연모 : (마뜩찮은 표정으로) 참... 극본대루 되는구나, 이게...

시연 : 무슨 극본...

시연모 : 왜, 있잖니. 여자가 뜨면, 남자 버리구... 그러는 거...

시연 : ...엄마, 염장질러? 나가.

시연모 : (인상을 쓴다.) 난 재복이가 좋단 말야.

시연 : ...웃기는 새끼야, 아주. 내가 쫓아냈어야 되는데, 지 발루 기어나가네? 약은 새끼.

시연모:  ...걔는 얘. ...골이 좀 비어서 그렇지, 약지는 않지. 머리가 나빠서 약은 짓은 못해, 걔가... 난, 걔 짱구굴리는 거 못 봤어. 그래봤자 다 들키구...

시연:  걘 나 사랑하지두 않아. ...걔가 그랬어. 걔가 먼저 나 찼어. 알지두 못하면서...

시연모:  (물끄러미 시연을 본다.)

시연 : 그 새끼 재섭는 새끼야.

시연모:  글쎄, 뭐. 그거야, 내가 알 수는 없는 거구... 근데, 걔가 널 사랑하는지 아닌진 내가 잘 모르겠지만... 근데... 걘 니 인생을 참 많이 사랑해 줬어. 내가 그건 알어... 그래서 재복일 좋아해. (그리곤 나간다.)


시연, 물끄러미 시연모를 바라보다가 시계를 풀어 탁자 위에 올린다. 앨범 하나가 눈에 띈다. 

앨범을 넘기면, 시연의 기사 사진이 스크랩 되어 있다. 그 첫장에 제목 하나가 써져 있다. 

시연천사, 하늘을 날다.

조그만 기사 한 토막까지 신문기사들을 오려 정성껏 붙인 재복의 스크랩북.

시연, 피식 웃다가 우울한 눈으로 앨범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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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시연 엄마의 말이 내 마음에 남았었다.

"걔가 널 사랑하는지 아닌진 내가 잘 모르겠지만... 근데... 걘 니 인생을 참 많이 사랑해 줬어."


요즘 즐겨 보고 있는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김주원이 길라임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난 그걸 잘 모르겠다. 

좋다고 요란을 떨며 쫓아다니기는 하는데, 

이야기 속에 그 마음의 온도가 잘 드러나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거기에는 아마 작가의 탓도 있고 배우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김주원이 길라임의 남루한 인생을 받아들이고 아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 조금씩 느껴졌다. 

첫눈에 반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삶'을 아껴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김주원이 그걸 해내기 시작한 것 같아 기특하다.


그게 기특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인 이유는,

김주원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재벌3세라서만은 아니다. 

재벌3세까지 갈 것도 없이,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걸 해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실은 무리다.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라는 말이나 '얼굴이 예뻐야'라는 얘기가 다 어쩌면 비슷한 얘기인데,

다들 모두 자기 사느라 바쁘고 자기 상처 꼬매느라 바빠서 남의 인생까지 끌어안을 여유가 없다. 

그나마 얼굴이라도 예뻐야 - 즉 즉각즉각 느껴지는 시각적 자극이라도 있어야 

그 각박한 삶을 보상받는 느낌이 들고 그 남의 인생까지도 봐줄 마음이 생기는 것인게다. 


'재복'이는, 가진 게 없었고 그래서 잃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시연'이의 하루하루를 안쓰러워 할 줄 알았고 '시연'이의 꿈을 소중하게 여겼고 

'시연'이의 성공을 마음 속 깊이 자랑스러워할 줄 알았다. 


나도 - 몰랐는데 - 이제 와 다시 돌아보면, 나도 내 삶을 사랑해주었던 몇몇 사람을 알고 있다. 

평탄하지만은 않은 일상을 안쓰럽게 지켜봐주고,

때로는 애정이 담긴 유머로 눈물을 닦아주고,

시끄럽게 부산을 떨며 저 잘난 맛에 사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주고,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는 나의 자존심과 자격지심들을 귀엽게 쓰다듬어 주었던 이들.


그리고, 나도, 

반짝거리지만 오래되어 빛을 바랜-그렇지만 추억이 담긴 악세서리처럼,

군데군데 터지고 덕지덕지 꿰매놓은-그렇지만 너무나 익숙해서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낡은 이불처럼,

그런 내 삶의 구석구석을 사랑한다.



음,,, 

그렇다고. 

끝.

[출처] 아일랜드 10회|작성자 비애천사

[출처] 아일랜드 10회|작성자 비애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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